무공 쓰는 외과 의사 350화
제67장 메이유 클리닉(5)
뜻밖의 소식에 놀랐는지 레이먼드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손에서 놓친 공이 떨어져 본인 발등을 때리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음에도 전혀 알아채지를 못했다.
“거…… 거짓말 하지 마. 너 따위가 감히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시험 수석은.”
레이먼드의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깃들었다.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왜 하겠어? 정 못 믿겠으면 그 친한 감독관한테 직접 연락해서 물어보든가.”
허를 찔렸는지 레이먼드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준후가 자신과 감독관의 관계를 꿰뚫고 있을 거란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따라서 누구도 알 수 없는 정보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레이먼드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케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따라 유독 신호음이 길게 느껴졌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치즈 같았다.
-어, 무슨 일이냐?
“선배. 뭐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요. 부스트 업 테스트 수석이 누구에요?”
-네가 시비 걸었던 준후 서. 그 친구 실력이 장난 아니더라. 앞으로 괜히 날 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
케빈이 전한 소식에 레이먼드는 귀를 의심했다.
정말 얘가 수석이라고?
메이유 의과 대학 출신에, 메이유 클리닉 신경외과 최우수 레지던트에 뽑혔던 자신이 아니라?
케빈의 말투에서 자신보다 준후를 더 위로 쳐주는 뉘앙스가 느껴졌기에.
레이먼드가 얼굴을 구겼다.
“전산에 오류가 있었던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OMR 카드로 시험을 본 것도 아니고 웬 전산 오류?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그런데요?”
-내가 준후 봉합하는 걸 현장에서 봤잖아? 언터쳐블이었어. 교수님들도 기겁을 하시더라.
“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전화 끊을 게요.”
레이먼드는 황급하게 통화를 종료했다.
계속 전화기를 붙잡았다간 케빈에게 저 망할 준후의 칭찬만 귀 따갑게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다.
“이제 속이 후련하니?”
준후가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레이먼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느끼한 음식을 꾸역꾸역 먹은 것처럼 속이 니글니글거렸다.
의사를 꿈꾼 이후부터.
의대에서 건.
병원에서건.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레이먼드였다.
현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디서 굴러 온지도 모를 동양인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야, 농구하다 말고 뭐 해?”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
농구 골대 근처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레이먼드 쪽으로 몰려왔다.
전부 부스트 업 프로그램 합격자였다.
그중 한 명인 올리버가 준후를 알아보고 반색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너도 합격했구나?”
“날 알아?”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정작 준후는 올리버를 모르는 듯했다.
“너랑 레이먼드가 시비 붙었을 때 가까이에 있었거든. 멘탈이 흔들려서 고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어쨌든 반갑다. 올리버라고 해.”
사교의 왕답게 올리버가 준후에게 선뜻 악수를 청했고 준후는 악수를 받았다.
준후를 모르는 합격자도 꽤 있었기에 겸사겸사 통성명이 오고 갔다.
하지만!
주변에서 뭐라고 떠들던 레이먼드는 관심이 없었다.
레이먼드의 관심사는 오로지 준후를 향해 뒤틀린 자신의 심보를 어떻게 풀어낼까.
거기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쓰거나 폭력은 앞으로 자제해야 했다.
가져갈 수 있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폴, 너 아까 피곤하다고 했지?”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분명 피곤하다고 했잖아. 내가 헛소리라도 들었다는 거야?”
“어? 어. 하긴…… 했었지.”
레이먼드가 도끼눈을 뜨고 묻자 폴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 너 농구 좋아해? 한 게임 뛸래?”
* * *
농구 코트 3점 슛 라인 바깥에 3명이 서 있었다.
그중에 준후도 껴 있었다.
농구를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고 앞으로 7년을 함께할 동료들과 친목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이 자리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쯧쯧쯧. 수법이 이렇게 노골적이고 저급해서야…….’
준후는 자신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레이먼드를 바라보곤 피식 웃었다.
레이먼드가 순수한 의도로 준후를 농구에 끼웠을 리가 없었다.
속셈이 손금 보듯 뻔했지만 상관없었다.
쥐새끼가 함정을 팠다고 해서 호랑이가 걸려들겠는가.
“안 빼는 걸 보면 농구는 좀 하나 보네?”
레이먼드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할 만큼은 하지.”
“글쎄. 그 도토리 같은 키로 해봐야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크크크.”
레이먼드는 키가 180센티미터 후반인 데다가 덩치가 곰만 했다.
피지컬로는 준후를 압도했다.
“지금 스코어는 10 대 6이야. 우리가 지고 있어. 준후 네가 분발해 줘야 해.”
같은 팀은 올리버가 준후에게 한마디 했다.
준후는 고개만 끄덕였다.
통. 통. 통.
공을 가진 올리버가 드리블을 하면서 준후 팀의 공격이 시작됐다.
올리버는 수비를 따돌리려다가 여의치 않았는지 준후에게 패스했다.
준후는 느긋하게 공을 튕기며 레이먼드의 반응을 살폈다.
시험 성적에서 밀린 걸 만회하겠다는 듯 레이먼드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공을 튕기던 준후가 우측으로 시선을 던졌다.
동시에 어깨와 몸통, 다리의 무게 중심까지 우측으로 쏟았다.
이에 화답하듯.
레이먼드가 게걸음으로 준후의 우측 진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준후의 노림수였다.
탕!
오른손에 있던 공이 V자를 그리며 왼손으로 넘어갔다.
크로스 오버 드리블.
준후는 번개처럼 방향을 전환해서 좌측 돌파를 시도했다.
“어? 어?”
억지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던 레이먼드가 얼빠진 소리를 내다가 자빠져 버렸다.
파바바밧!
레이먼드를 완전히 따돌린 준후가 골대 밑으로 돌진했다.
“막아!”
“가고 있다고!”
도움 수비가 따라붙었지만 늦었다.
준후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용수철이라도 밟고 뛴 것처럼.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도약한 준후.
쾅!
벼락같은 울림이 골대와 백보드를 뒤흔들었다.
준후의 원 핸드 슬램덩크가 작렬했다.
“와, 시작부터 덩크를 찍어버린다고? 방금 점프하는 거 봤어?”
“에어 조던인 줄 알았네. 근데 나는 드리블이 훨씬 멋있더라. 레이먼드를 완전히 따돌렸잖아.”
“나이스 준후! 환상적인 덩크였어!”
적군이든 아군이든 준후에게 감탄하기 바빴다.
준후는 멋쩍게 웃었다.
솔직히 준후는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치트키 같은 존재였다.
내공과 무공으로 인해 준후의 신체 능력은 인류 최강이었다.
축구, 농구, 야구, 배구, 골프, 마라톤, 볼링 등등.
그 어떤 스포츠에 몸을 담더라도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좋아. 이 기세를 몰고 가자고. 이번에 준후 너부터 시작하자.”
올리버가 골대 아래 놓인 공을 주워 준후에게 던졌다.
공을 받은 준후가 3점 라인 바깥에 섰다.
3 대 3 반코트 농구는 공격에 성공한 쪽이 계속 공격하는 룰이 있었다.
“키가 전봇대처럼 커도 별 볼 일 없는데?”
준후는 자신을 가로 막은 레이먼드를 약 올렸다.
도발이 성공했는지 레이먼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벌렁벌렁 거리는 콧구멍에서는 거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한 번 따돌린 걸로 우쭐하지 마. 찍 소리도 못하게 눌러줄 테니까.”
“희망사항이지?”
“X랄. 넌 내 손에 죽었어.”
준후가 공을 튕기면서 공격의 막이 올랐다.
준후는 적당한 속도로 우측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따라붙어 어깨로 준후를 밀어내려 했다.
마치 미식축구 선수가 태클을 하는 것처럼.
명백한 반칙이었지만 이는 준후가 일부러 유도한 것이었다.
스킬뿐만 아니라 힘으로도.
자신이 레이먼드를 압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무래도 레이먼드는 시험에서 추락한 자존심을 농구로 만회하려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었다.
준후는 레이먼드를 철저히 짓밟고자 했다.
‘쥐새끼 같은 놈. 나가 떨어져라!’
레이먼드가 체중을 실어 본인의 어깨로 준후의 어깨를 힘껏 들이받았다.
준후가 꼴사납게 자빠지면 좋았고.
그 와중에 손이나 다리를 다치면 더 좋았다.
그러면 교육 프로그램을 소화하기 더 힘들어질 테고 몸 관리를 못했다며 한 소리를 들을 테니까.
하지만 웬걸?
어깨와 어깨가 마주 닿는 순간.
레이먼드는 무언가가 한참 어긋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맞닿은 준후의 어깨가 강철처럼 단단했던 것이다.
“아아아악!”
레이먼드의 비명이 코트에 울려 퍼졌다.
준후와의 힘 싸움을 감당하지 못해 뒤로 벌러덩 넘어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폭발적인 완력이……?
“미친! 힘 싸움에서도 레이먼드가 상대가 안 되는데?”
“그럼 무슨 수로 준후를 막아?”
레이먼드의 동료들이 감탄 섞인 푸념을 내뱉었다.
한편 엉덩방아를 찧은 레이먼드는 준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준후는 더 이상 돌파를 시도하지 않고 레이먼드를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너와 나의 격차라는 듯.
“일어나. 찍소리도 못하게 해준다며.”
“이 새끼가!”
레이먼드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준후를 다시 막아섰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준후에게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구겨진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펴야 했다.
텅. 텅. 텅.
준후가 이전과는 달리 등을 보인 채 드리블을 했다.
포스트 업이라는 기술이었다.
주로 장신의 피지컬 좋은 선수들이 안전하게 공을 지키면서 골밑까지 밀고 들어가는.
일종의 탱크 같은 기술이었다.
‘대체 뭘 쳐 먹으면 힘이 이렇게 좋은 거야?’
레이먼드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켰다.
준후가 등으로 밀고 들어오는데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도 계속 뒤로 밀리기만 할 따름이었다.
레이먼드는 결국 이번에도 수비에 실패했다.
준후의 등 힘을 못 버티고 3번째로 넘어지고 말았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쾅!
다시 한번 호쾌한 덩크가 골대에 꽂혔다.
* * *
기숙사로 돌아온 준후는 창가에 서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에 물든 준후의 얼굴은 찬란한 황금빛이었다.
‘이젠 어떻게 나오시려나?’
레이먼드를 떠올리며 준후는 피식 웃었다.
부스트 업 테스트는 물론이고 농구 시합에서도 준후는 경이로운 능력을 선보이며 레이먼드를 박살 냈다.
레이먼드는 과연 자신이 모든 면에서 준후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인정했을까.
준후에게 품은 쓸데없는 경쟁심을 포기했을까.
아니면 바짝 약이 올라 더 독기를 품게 되었을까.
결과는 내일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나를 적으로 돌리면 피곤한 건 그쪽이겠지만.’
이번 농구에서는 레이먼드를 혼쭐 내준 것과는 별개의 소득도 있었다.
앞으로 7년간 함께 지낼 동료들의 얼굴을 익혔다는 점이었다.
첫 인상으로 판단하기는 섣부른 감이 없지 않았지만 다들 괜찮은 사람들로 보였다.
슬슬 수련을 해볼까 하는데.
똑. 똑. 똑.
예상치 못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찾아왔을까.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