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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51화 (348/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351화

제68장 신입(1)

1층 구내식당은 한산했다.

한창 식당이 붐빌 저녁 식사 시간인데도 식탁이 넉넉하게 비어 있었다.

음식은 뷔페처럼 자율 배급제로 운영되었다.

쟁반에 본인이 원하는 음식을 원하는 만큼 챙겨서 담으면 그만이었다.

준후는 식기도구를 챙기고 쟁반을 든 채 음식이 진열된 장소로 이동했다.

대기 줄이 시작되는 곳에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빙 둘러 표현한 것 같아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의사들의 영양을 고려했는지 식사 메뉴에는 건강식이 많았다.

푸릇푸릇한 샐러드, 각종 과일, 견과류, 통 곡물 파스타, 으깬 감자, 스팀에 찐 닭 가슴살 등등.

개중에는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새빨간 김치였다.

준후는 적당히 음식을 담고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금발 곱슬머리에 순박한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준후 맞은편에 앉았다.

함께 농구를 했던 올리버였다.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준후의 방문을 노크했던 사람이 올리버였다.

“괜찮으면 저녁이나 같이 할래?”

올리버가 검지로 본인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준후는 좋다며 올리버와 합류했다.

“다른 애들은 안 보이네?”

준후가 식당을 훑으며 말했다.

“다들 병원에 있는 식당으로 갔어. 중식 먹는다고. 식당 밥은 맛이 없다나 뭐래나.”

올리버가 어깨를 으쓱하곤 옥수수 스프를 떠먹었다.

“레이먼드가 리더인가 보네?”

“그런 셈이야. 합격자 중에 메이유 클리닉 출신이 가장 많으니까. 참고로 레이먼드는 메이유 클리닉 신경외과에서 넘버원이었어.”

“걔 혹시 레지던트 때도 인종차별했니?”

올리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물론 레이먼드가 앞으로 준후에게 까불어 봐야 호되게 당할 일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레이먼드 패거리에 안 붙어도 되겠어? 나랑 있어서 별로 이득이 될 것 같지 않았는데?”

준후는 올리버를 살짝 떠보았다.

이런 가정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올리버는 레이먼드가 보낸 첩자일 수도 있었고.

순수하게 준후에게 호감이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둘을 잘 구분해야 했다.

“레이먼드가 뭐 그렇게 잘났다고 내가 꼬리를 흔들면서 살랑살랑 아부를 떨어야 돼?”

“왜? 다른 애들은 잘하고 있잖아?”

“그건 걔네가 멍청해서 그런 거고.”

올리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 실력을 키워서 내 환자를 잘 봐야지. 레이먼드를 쫓아다닌다고 내 실력이 레이먼드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합격.”

“엥? 무슨 합격?”

“대충 그런 게 있어.”

준후는 모처럼 웃었다.

올리버와는 말이 통할 것 같았다.

현대가 됐든.

무림이 됐든.

잘 나가는 사람 옆에 붙어서 빌어먹으려는 족속은 어디에나 있었다.

반골기질이 있는 준후는 그런 부류들을 싫어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농구할 때 끝내주더라. 레이먼드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던데?”

농구로 화제를 전환하는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드리블도 현란하고 심지어 레이먼드한테 힘 싸움도 안 밀리더라. 솔직히 레이먼드가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타입이라 껄끄러웠는데 그걸 네가 박살 내줘서 엄청 통쾌하더라고.”

“한국 속담에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거든.”

말을 마친 준후가 김치를 한 조각 입에 넣었다.

김치는 맵지도 않고 젓갈 맛도 거의 나지 않았다. 가짜 김치에 괜히 입맛만 버렸다.

“오. 너 한국 출신이구나.”

“한국에 대해서 알아?”

“어느 정도는. 한국도 신경외과 강국이라고 들었는데 네가 그래서 수석을 차지했구나.”

올리버는 준후의 수석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레이먼드와 나눈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테스트 1등이야 지나간 일이고 앞으로가 중요하지. 그나저나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엥? 너 오리엔테이션 메일 못 받았어?”

“오리엔테이션 메일?”

준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올리버가 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 묻은 스프도 내버려 둔 채 말했다.

“오늘 오전에 의국에서 메일 보냈거든. 앞으로의 수련 과정을 요약한 메일말이야.”

“못 받았어. 받았으면 너한테 묻지도 않았지.”

“다른 애들은 다 받은 걸로 아는데 이상하네……?”

“그러게.”

준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쓸어내렸다.

공교롭게 자신만 누락된 걸까.

아니면 레이먼드 또는 누군가의 고의적인 계략인 걸까.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불쾌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메일 주소 알려줘. 내가 받은 메일 그대로 너한테 보내줄게.”

“그럼 고맙지.”

준후는 겸사겸사 올리버와 메일 주소, 휴대폰 번호까지 주고받았다.

준후의 휴대폰에 미국 동료의 이름이 처음 저장된 순간이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준후는 올리버와 기숙사 인근 공원을 걸었다.

겨울에 가까운 봄이라 그런지 해가 떨어지자 바람이 유독 쌀쌀했다.

정원에는 잔디만 무성했고 가로수는 아직 헐벗은 채였다.

두 사람의 화제는 단연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교육 과정이 잘못된 것 같아. 이건 말이 안 돼.”

“어떤 점에서?”

“첫 수련 과정이 소아신경외과 파트잖아. 소아신경외과면 저기 뒤로 빼둬야 맞는 거 아니냐고.”

올리버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소아 신경외과.

말 그대로 성인이 아닌 소아들의 뇌 및 척추 질환을 치료하는 세부 전공이었다.

“아이들은 바이탈 관리도 힘들고 수술이 잘못되면 평생 후유증을 앓고 살아가야 해. 왜 처음부터 부담을 팍팍 주는지 모르겠다.”

“힘든 일을 먼저 하고 나면 다른 일이 쉬워져서 그런 거 아닐까?”

“속 편한 생각이네. 아니면 수석이라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올리버가 준후를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맞을 매면 빨리 맞는 게 낫지.”

준후의 두 눈이 캄캄한 하늘을 향했다.

소아 신경외과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미국은 어떤지 몰라도.

국내 소아 신경외과의 형편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현재 활동 중인 소아 신경외과의의 숫자는 고작 50명밖에 되지 않았다.

매년 발생하는 소아 신경외과 환자가 수천 명인데 그걸 50명이 나눠서 보고 있는 것이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소아 신경외과 수련이 가장 먼저라는 사실이 오히려 반가웠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통해.

소아 신경외과 치료에 터를 닦고.

남은 시간 꾸준히 경험과 실력을 쌓아 올릴 수 있을 테니까.

“너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낙제가 있는 건 알아?”

“낙제?”

준후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직 오리엔테이션 메일을 읽지 못했다.

“중간 평가랑 최종 평가가 있는데 그걸 통과하지 못하면 수련 시간이 1년 더 늘어나는 거야.”

“…….”

“말만 부스트 업이지, 재수가 없으면 일반 세부 전공을 하는 것보다 수련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평가를 잘 보면 되잖아?”

“휴~ 됐다. 말을 말자.”

올리버가 질렸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소아 신경외과 지도 교수님은 누군데?”

“오스틴 교수님이라고 소아 신경외과에서는 전설이지. 우리한테는 악몽이 될 거고.”

지도 교수에 관한 정보라면 놓칠 수가 없었다.

준후는 재빨리 휴대폰으로 오스틴을 검색해 보았다.

기사에 따르면 오스틴은 신경외과계의 Godfather(대부)로 불렸다.

수술 성공률이 무려 80퍼센트에 달했다.

그렇다고 쉬운 수술을 골라서 한 것도 아니었다.

뉴스에 소개될 만한 굵직굵직한 수술, 이를 테면 ‘쌍둥이 머리 분리 수술’ 같은 고난이도 수술까지 소화했다.

오스틴은 스승 재현과 같이 ‘진짜’처럼 보였다.

하긴 ‘가짜’라면 감히 메이유에서 이름을 날릴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올리버와 잡담을 나누며 걷기를 30분.

준후는 5층 기숙사로 돌아왔다.

우연인지 올리버도 기숙사를 사용했는데 준후 맞은편에 방이 있었다.

“그럼 푹 쉬고 내일 보자.”

“너도.”

작별인사를 하고 준후는 곧바로 방에 돌아왔다.

기숙사에 있을 건 다 있어도 컴퓨터는 없었다.

그래서 미리 챙겨온 노트북에 인터넷 선을 연결해서 오리엔테이션 메일을 확인했다.

일정을 훑는 준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교육 프로그램이 확실히 만만치 않았다.

조별 활동도 있었고.

진료 활동도 있었고.

무엇보다 일주일 차에 곧바로 수술 실습도 있었다.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더라도 소아 신경외과 수술은 다들 처음일 텐데 바로 수술 일정을 잡아버린 것이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이 원래 빡센 건지.

아니면 오스틴이 호랑이 같은 교수라서 그런 건지.

준후는 아직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의사생활은 지금부터 시작이구나.’

준후가 천장을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온몸이 찌르르 울려왔다.

가시밭길을 택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선택이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필요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수고’를 하지 않으면 ‘고수’가 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7년 후의 준후는 분명 지금의 준후와는 완전히 다른 서전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공 수련에 앞서 준후는 뉴튜브 영상을 촬영하기로 했다.

[선생님. 지난 일주일 동안 영상 한 편도 안 보내주신 거 아시죠? 영상 기다리다가 제 목이 빠지겠어요. 짧아도 좋으니까 일주일에 2편은 꼭 부탁드려요!!!!]

올리버와 산책하던 도중.

MCM 담당자의 문자를 받았다.

채널이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있었던 만큼 촬영에 소홀할 수는 없었다.

준후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셀카 모드로 바꾸었다.

외롭게 혼자 떠들며 메이유의 기숙사 방을 소개하는 영상을 기록했다.

내친 김에 준후는 기숙사 복도로 나갔다.

기숙사 외부와 내부.

더불어 메이유 클리닉의 주변 풍경을 죄다 찍기로 결심했다.

오랜만에 담당자에게 큰 소리를 떵떵 치기 위해서였다.

준후의 손에 들린 휴대폰 카메라가 복도의 전경을 담았다.

복도 끝에 있는 창가에서 보이는 야경의 풍경도 담았다.

터벅. 터벅.

준후는 거침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복도 절반 쯤 왔을 때.

복도 끝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둘 다 아는 목소리였다.

준후의 상식으로는 만나서는 안 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준후는 잠시 촬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기척을 죽인 채 살금살금 복도를 가로 질렀다.

복도 끝에 도달했을 때.

준후는 복도 모퉁이 너머로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창가 쪽에서 익숙한 얼굴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을 확인한 순간.

준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준후를 일방적으로 라이벌이라 여기는 레이먼드.

그리고 오늘 막 따끈따끈하게 친구가 된 올리버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 야밤에 시꺼먼 남정네 둘이 나눌 대화가 뭐가 있을까.

준후의 귀가 두 사람의 대화를 향해 자연스레 기울어졌다.

“그 동양인 놈하고 대화를 나눠 보니까 좀 어때?”

레이먼드가 팔짱을 낀 채 올리버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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