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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52화 (349/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352화

제68장 신입(2)

똑. 똑. 똑.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준후는 젖은 머리를 말리던 드라이기를 탁자에 내려놓고 현관문으로 이동했다.

문을 열자 벌써 의사 가운을 걸친 올리버가 서 있었다.

“좋은 아침.”

올리버의 입가에 아침햇살처럼 산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야?”

“이따가 설명해 줄게.”

“일단 들어와.”

준후가 피식 웃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말리고 있던 머리를 마저 말려 나갔다.

그러면서 방을 신기하게 훑던 올리버를 힐끔 쳐다보았다.

준후의 눈빛이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방이 엄청 썰렁하다? 짐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최대한 가볍게 움직이는 주의라서. 짐이 많아 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그래도 인간미가 너무 없잖아?”

“내 인간미는 환자 치료할 때 보면 알 거다.”

머리를 다 말린 준후도 곧바로 출근 복장을 갖췄다. 어제 받은 파란 수술복을 입고 그 위로 의사 가운을 걸쳤다.

거울에 비친 가운 가슴에 메이유 클리닉의 로고와 이름이 박혀 있었다.

소속감이 물씬 풍겼다.

대망의 부스트 업 프로그램이 드디어 시작이구나.

여기서 무엇들을 배울까.

7년 뒤의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설렘과 기대가 가슴 속에서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했다.

“내가 안 자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준후가 올리버를 응시하며 물었다.

올리버는 무례한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준후가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왔을 것이다.

“그냥 말해주면 재미없으니까 네가 맞춰봐.”

“아침부터 퀴즈를?”

“맞아.”

준후는 턱을 쓸어내리면서 몇 가지 추론을 해보았다.

환자를 진찰할 때 의심 가는 질환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소거법을 사용했다.

“내 생각에는…….”

“네 생각에는?”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했나 보네. 실내운동은 아니고 밖에서 런닝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

“운동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다가 내 방에 불이 켜진 걸 봤던 거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다시 한번 기회를 줄게.”

“필요 없어.”

“으음…….”

올리버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준후를 향해 치켜든 엄지를 내밀었다.

“뭐야? 셜록 홈즈야? 하나도 안 틀리고 정확하게 맞췄는데?”

올리버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쯤이야.”

준후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림에서도.

현대에서도.

준후는 머리가 비상한 편이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추측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아마 외과의가 아닌 내과의를 선택했더라도 독보적인 활약을 했을 것이다.

“슬슬 나가자.”

“오케이.”

준후는 기숙사를 복도를 올리버와 함께 걸었다.

곧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1층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또 퀴즈 낼 생각은 말고.”

“칫. 들켰네. 대단한 건 아니고 클리닉 투어 좀 시켜주려고. 넌 메이유 출신이 아니라서 지리가 낯설 거 아니야.”

올리버의 배려에 준후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 녀석,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녀석이네.’

준후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머릿속으로 시간을 되돌려 어제 저녁에 있었던 사건을 되짚었다.

준후가 뉴튜브 촬영을 위해 야밤에 복도로 나왔을 때.

복도 끝 통로에서 레이먼드와 올리버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동양인 놈하고 대화를 나눠 보니까 좀 어때?”

레이먼드가 물었다.

자신이 질문 받은 것도 아닌데 준후가 괜히 더 긴장했다.

예감이 불길했다.

자신을 챙겨주던 올리버가 사실은 레이먼드가 심어 놓은 끄나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을 보라.

의심하기 딱 좋은 환경이 아닌가.

기숙사에서 쉬고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야심한 시각에 단둘이 대화를 나눈다?

수상한 냄새가 풍기다 못해 진동하는 수준이었다.

“그 친구 이름은 준후야. 동양인이 아니라고.”

“얼씨구. 잠깐 붙어 다닌 사이에 돈독한 우정이라도 쌓았다는 건가?”

레이먼드가 한껏 빈정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고작 이딴 걸 물어보려고 날 불렀냐?”

“뭐? 이딴 거?”

“자기보다 잘난 사람, 눈 뜨고 못 보는 건 여전하구나. 준후한테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물어봐. 치사하게 다른 사람한테 캐물을 생각하지 말고.”

“준후랑 같이 다니면 너도 나한테 찍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올리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레이먼드를 빤히 쳐다보다가 레이먼드를 향해 중지를 치켜들었다.

모욕감을 느꼈는지 레이먼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터벅. 터벅.

올리버가 레이먼드에게 등을 돌리고 준후가 숨은 복도로 다가왔다.

현장에 있었다는 걸 들켜선 안 되었기에 준후는 발소리를 죽인 채 달려 기숙사로 돌아왔다.

우려와 달리 올리버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그저 레이먼드에게 일방적으로 불려 갔을 따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올리버의 질문에 준후는 퍼뜩 회상의 나래를 접고 현실로 돌아왔다.

“식당 김치가 영 적응이 안 돼서 말이야. 넌 이거 먹고 어디서 김치 먹었다는 소리 하지 마.”

준후가 멋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 * *

출근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나와서 준후는 올리버와 함께 본관을 돌아다녔다.

병원이 워낙 넓고 복잡했기에 1시간으로도 병원 투어가 부족했다.

투어를 하면서 준후가 인상 깊었던 점은.

메이유 클리닉의 부서 배치가 환자의 동선과 안성맞춤이었다는 점이었다.

신원대학교만 해도 검사실이나 치료실이 산만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환자는 층과 건물까지 바꿔 가면서 피곤하게 발품을 팔아야 했다.

하지만 메이유 클리닉은 달랐다.

2층과 3층을 검사실로 통합해서 환자의 동선을 최소화했다.

치료실은 4층에 집중되었다.

환자를 최우선으로.

병원의 캐치프레이즈가 허울 좋은 말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가 우리가 1년 동안 지낼 소아 신경외과 병동이다.”

소아신경외과 병동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올리버가 말했다.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유의 소아 신경외과 병동은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벽지는 원색들로 알록달록했고 각종 캐릭터 스티커들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한 병실에서는 아침부터 쨍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안타깝게도 병동에 장식된 슈퍼 히어로들조차 아이들의 고통을 달래주기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준후는 복도 끝에 있는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갔다.

준후와 올리버는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준후가 찬찬히 뒤를 돌아 컨퍼런스 룸을 살폈다.

교육 첫날인데도 벌써 알게 모르게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레이먼드 일행이 가장 뒷자리.

준후와 올리버는 맨 앞자리.

나머지 2명의 동료는 서로 떨어진 채 중간 자리에 앉았다.

컨퍼런스 룸을 훑던 도중 준후는 문득 레이먼드와 눈이 맞았다.

준후를 향한 레이먼드의 눈빛이 뜨거웠다. 사랑이 아닌 증오에 가까운 뜨거움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교육생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안경을 낀 사내가 단상에 올라서서 교육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쭉 찢어진 눈매와 날카로운 턱이 인상적이었다.

“자, 집중.”

사내가 박수를 짝 치며 관심을 환기했다.

“내 이름은 브루스입니다. 소아 신경외과 외래 교수로 활동하고 있어요. 앞으로 오스틴 지도 교수님을 도와 여러분을 교육하게 될 겁니다.”

브루스가 교육생들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메일을 봐서 알겠지만 우리 교육 프로그램은 절대 만만치 않아요. 왜일 것 같습니까? 대답할 수 있는 사람?”

브루스의 질문에 교육생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갑자기 질문을 던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이에 준후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자네가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준후군. 앞으로를 기대하겠어요. 그래서 대답은?”

브루스가 기대와 호기심이 섞인 눈동자로 준후를 응시했다.

다른 교육생들의 이목도 준후에게 집중되었다.

“본래 신경외과 세부 전공은 2-3년 동안 수련해야 합니다. 하지만 부스트 업 프로그램은 고작 세부 전공 별로 1년만 운영됩니다.”

“그래서요?”

“2-3년짜리 교육을 1년으로 압축했는데 그게 쉽다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분야가 소아 신경외과라면 더더욱.”

준후의 대답이 깔끔했음에도 브루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컨퍼런스 룸에 내려앉는 묵직한 공기.

이에 뒷자리에 있던 레이먼드 일행이 깔깔거리며 준후를 비웃었다.

“거기, 조용!”

“죄송합니다.”

“용감하게 나선 건 좋았는데…… 대답은 더 훌륭하군요. 준후의 말이 옳아요.”

브루스가 흡족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반대로 레이먼드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배우려면 응당 그만한 희생을 치러야 해요. 부스트 업 교육 과정은 레지던트 수련 때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큰 코 다칠 거예요.”

“…….”

“준후, 대답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준후는 습관적으로 목례를 하려다가 말았다.

이곳은 미국이었으니까.

브루스가 30분 정도 교육 과정을 추가로 설명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제의 ‘물건’이 등장했다.

레지던트 몇 명이 끙끙거리며 컨퍼런스 룸에 들어와 교육생들 앞에 ‘그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 물건’을 확인한 교육생들은 눈을 깜빡거리기 바빴다.

“설마…… 이게 교재입니까?”

레이먼드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랬다.

물건의 정체는 무려 800페이지에 달하는 소아 신경외과 교재였다.

“맞아요. 앞으로 한 달 동안 공부할 교재이자 매주 테스트를 치러야 할 교재이기도 하죠.”

“…….”

“오스틴 교수님이 직접 편찬하신 교재로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겁니다. 소중하게 다루세요.”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이걸 한 달 안에 마스터 하라고?”

곁에 있던 올리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교재를 몇 장 넘겼다.

그러다가 이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준후도 호기심이 생겨 교제를 뒤적거렸다.

개인이 만든 교재라서 그럴까.

교재에는 그림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텍스트만이 밀림처럼 빽빽했다.

하지만 내용은 꽤 알차 보였다.

실제 치료 사례 중심으로 소아 신경외과 환자들의 질환과 치료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꼭 스승 재현의 비법 노트를 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정점을 찍은 외과의들은 자기만의 노하우를 정리하는 습관이 있는 듯했다.

“혹시 필기 테스트에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올리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 번은 봐주는데 두 번은 없어요. 그 즉시 부스트 업 프로그램 자격을 박탈하겠습니다.”

“그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고작 필기에 떨어졌다고 자격을 박탈하다니요.”

올리버가 평소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다른 교육생들도 올리버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뽑은 사람을 고작 필기 테스트 낙제로 떨어뜨리면 병원 입장에서도 막대한 손해 아닙니까?”

“올리버.”

브루스가 피식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부스트 업 프로그램은 초 엘리트 코스입니다. 여러분이 곧 메이유의 얼굴을 대표하게 될 거고요.”

“…….”

“세계 최고의 병원 얼굴이 지저분해서야 되겠습니까? 자신이 없으면 지금 떠나도 좋습니다.”

브루스의 태도는 단호했다.

바늘구멍만 한 협상의 여지도 없었다.

이를 눈치챘는지 교육생들은 감히 대꾸는 못하고 불만 섞인 혼잣말을 투덜거렸다.

“하…… 심하네. 수술에, 수술 어시스트에, 병동 관리에, 외래진료까지 하면서 이걸 무슨 수로 한 달 만에 달달 외우냐. 우리 엿 된 거 맞지?”

올리버가 동의를 구하듯 준후를 쳐다보며 물었고.

준후는 애매하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걸 보는데 한 달이나 걸려……?

일주일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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