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353화
제68장 신입(3)
“아침부터 왜 이리 소란이지?”
낯선 목소리를 듣고서 준후가 고개를 들렸다.
저벅. 저벅.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노 교수가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와 당당한 걸음으로 단상에 올라섰다.
노 교수의 인상은 봄날의 햇살처럼 온화해 보였다.
얼굴이 둥글었으며 눈은 크고 맑았다.
입가에는 잔잔한 물살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가 바로 소아 신경외과 부스트 업 프로그램의 최종 책임자 오스틴이었다.
오스틴이 등장하자 브루스가 옆으로 살짝 비켜나 단상 중앙 자리를 양보했다.
“필기 테스트 이야기를 했더니 교육생들의 원성이 자자해서 그랬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가?”
오스틴이 눈을 가늘게 뜨며 교육생들을 훑었다.
“글쎄요. 거의 대부분이 너무하다는 반응이어서…….”
“이거 날도둑놈들이 따로 없군. 남들은 2-3년 동안 배우는 걸 1년 만에 배우겠다고 달려들었으면서 뭐, 테스트가 너무 어려워?”
“…….”
“너희들 전원, 이 자리에서 바로 낙제시켜 줄까?”
오스틴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그가 단순히 위협을 하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럴 만한 배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한편 오스틴의 박력에 준후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순둥순둥한 외모와 반대로 화끈하게 매운 고추 같은 성격.
비슷한 인물을 무림에서 상대한 적이 있어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누구랑 닮은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준후는 오스틴의 외모에서 기시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왜 그렇게 날 빤히 쳐다보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오스틴이 준후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아닙니다.”
“그럼 뭐야?”
“교수님께 소아 신경외과 전공을 배울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훗. 그래? 그 마음 부디 끝까지 유지하도록. 교육받다가 미쳐서 발광하지 말고.”
오스틴이 냉소적으로 준후의 말을 받아쳤다.
오스틴이 등장하면서.
컨퍼런스 룸의 기강이 군대처럼 각이 잡혔다.
교육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있었다.
어느새 잡담이 쏙 들어갔다.
“브루스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내 교육은 만만치 않다. 아마 앞으로 받을 다른 전공에 비해 가장 고된 과정이 되겠지.”
오스틴이 팔짱을 낀 채 말을 계속했다.
“너희들이 까딱 잘못 놀린 손가락 질 한 번이 한 아이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
“그러니까 항상 긴장하고 항상 공부해라. 아이와 부모 앞에서 부끄러운 의사가 되고 싶지 않으면. 대답 없나?”
“네!”
“네!”
교육생들이 일제히 우렁차게 대답했다.
오스틴은 교육 스케줄을 한 번 더 설명하더니 검지로 준후를 콕 찍었다.
“자네.”
“네. 교수님.”
“오늘부터 시작하는 오전 외래 진료의 첫 타자다. 9시까지 1층 외래 진료실로 오도록.”
준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오스틴이 쌩하니 컨퍼런스 룸을 나가 버렸다.
곧 브루스까지 자리를 비우면서 팽팽했던 컨퍼런스 룸의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준후 너 찍힌 거 아니야? 첫날부터 외래 진료를 시키고?”
올리버가 너무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외래 진료를 시킬 거면 뭐라도 가르쳐주고 시켜야지. 이건 레시피도 안 가르쳐주고 요리시키는 꼴이잖아.”
“괜찮아. 난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준후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낯선 환경에 몸을 던져서 얻는 이득도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자신의 존재감을 오스틴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관심을 받으면 받을수록.
떨어지는 콩고물이 많을 것이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아기 새가 어머 새에게 먹이를 하나라도 더 얻어먹는 것처럼.
‘이 기회에 한국 출신 서전이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면 더 좋을 테고.’
준후에게는 메이유 클리닉에 국뽕(?)을 전하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도 숨어 있었다.
“이 상황에 재미 찾게 생겼어? 코미디 영화도 아니고. 내 생각에 우리 프로그램의 장르는 공포야.”
올리버가 파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준후는 그런 올리버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곱슬머리 금발.
파란 눈동자.
모난 곳이 없는 둥근 얼굴.
그러고 보니 오스틴에게서 느꼈던 기시감의 뿌리가 올리버에게서 비롯된 것 같았다.
“올리버.”
“왜?”
“내가 가만 보니까 너 은근히 오스틴 교수님이랑 닮은 것 같다?”
준후의 지적에 올리버가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뭐랄까, 성격이야 정반대지만 이목구비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올리버가 주변을 훑다가 준후에게 바짝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너 진짜 여러모로 대단하구나. 맞아. 오스틴 교수님이 내 아버지야.”
반쯤 농담 삼아 찔러본 말인데 사실이었을 줄이야.
놀란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이먼드의 뒷배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올리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올리버야말로 진짜 금수저였다.
* * *
올리버와 헤어진 준후는 곧바로 본관 1층으로 내려갔다.
기대를 해서 그런지.
긴장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소아 신경외과 공부는 따로 한 적이 없었다.
뇌종양, 뇌혈관, 경추·요추 파트를 익히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서였다.
소아 신경외과 수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야모야병 어시스트에 몇 번 들어간 게 다였다.
외래 진료 업무도 생소했다.
아니. 생전 처음이었다.
본래 외래 진료는 세부 전공 펠로우까지 마치고 나서야 볼 수 있었으니까.
모든 것이 처음이었지만.
외래 진료실로 향하는 준후의 발걸음은 당당했다.
환자와 보호자 앞에서 주눅 들어 있을 수는 없었다.
서전이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환자와 보호자는 기댈 곳이 없어질 것이다.
현재 시각은 오전 8시 50분.
아직 외래 진료 시작 전이었지만 진료실에는 이미 환자와 보호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다수가 예약 환자 또는 재진 환자일 것이다.
걷는 동안 준후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환자들을 훑었다.
외모부터 복장까지.
환자들 대부분이 여유로워 보였다.
미국의 살인적인 치료비를 생각하면 메이유를 찾는 환자들 대다수는 부유층이리라.
‘여긴가?’
준후의 발이 소아 신경외과 제1진료실 앞에 멈춰 섰다.
진료 데스크 앞 전광판에.
팔짱을 낀 오스틴의 상반신 사진이 드러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외래 진료를 보러 온 준후 서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선생님.”
진료 데스크 앞에 서 있던 간호사가 반갑게 웃으며 준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목걸이 명찰에 제니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초면에 이런 이야기 하긴 좀 그런데요.”
제니퍼가 진료실 문 쪽을 힐끔 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각오 단단히 해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왜요?”
“오스틴 교수님 성격이 워낙 괄괄하셔야죠. 오죽 하면 별명이 파이어 맨이겠어요. 혹시 ‘F’ 워드를 남발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너무 겁주는 거 아닙니까?”
준후의 말에 제니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니퍼와 대화를 마친 후 준후가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들어오라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준후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스틴은 창가 쪽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이리 와봐.”
“네. 교수님.”
준후가 오스틴을 마주보고 서자 오스틴이 준후의 몸을 요리조리 살폈다.
“평소 운동을 좀 하나 보지? 몸이 제법 탄탄한걸?”
“몸 관리는 평소 잘 하는 편입니다. 수술도 체력이 받쳐줘야 할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 정신머리는 있는 녀석이군. 서전도 엄연히 육체노동자인데 몸을 함부로 굴리는 놈이 너무 많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오스틴은 나이에 비해 탄탄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군살이 없었으며 어깨가 떡 벌어졌고 가슴 근육이 볼록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 지금까지 철저하게 몸 관리를 하는 오스틴에게 준후는 퍽 감동했다.
비록 성격은 괴팍할지라도.
환자를 향한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준후가 오스틴과 통할 접점은 충분했다.
“아직 시간이 있는데 스쿼트나 50개씩 해볼까?”
“좋습니다.”
오스틴의 뜬금없는 제안을 준후는 냅다 받아들였다.
오스틴은 스쿼트를 하면서도 준후의 자세를 유심히 살폈다.
“자세도 좋고 속도도 좋아. 간만에 마음에 드는 녀석이 나타났군.”
오스틴이 씨익 웃었고.
준후도 씨익 웃어 주었다.
솔직히 스쿼트가 뭔지만 알고 스쿼트를 직접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준후가 무림에서 권을 익힐 때는 기마 자세를 한 시간씩 유지하곤 했다.
그에 비하면 스쿼트는 껌이었다.
과연 스쿼트가 끝났을 때, 준후는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스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벅지가 팽팽한 게 오늘도 활력이 넘치는 군. 자네. 체력은 마음에 쏙 들었지만…….”
오스틴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진료를 개판으로 보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귀에서 피가 나도록 잔소리를 퍼부어주겠어.”
“두고 보시면 알겠죠.”
준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진료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준후는 위기일 때 더욱 냉정해지는 편이었다.
이는 무림의 원수 적일도에게 목숨을 잃어가며 배운 것이었다.
진료 시간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준후가 진료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오스틴이 앉아 있었다.
딸칵. 딸칵.
준후는 첫 환자의 차트를 꼼꼼하게 살피려고 했지만 시작부터 난관을 맞닥뜨렸다.
하필이면…….
초진 환자였던 것이다.
차트를 통해 준후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환자가 2개월 된 아이이며 이름이 크리스틴이라는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골 때리는 환자를 보게 생겼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오스틴이 준후를 쳐다보며 킬킬 웃어댔다.
하지만 그래서 더 오기가 생긴 준후였다.
준후의 눈동자에 어느새 독기가 차올랐다.
한국에서 준후를 무시한 사람은 단연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준후를 시기·질투하거나 견제하는 사람만 있었을 뿐.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스틴의 도발이 준후의 전투력을 더욱 돋우어 주었다.
째깍!
벽시계가 시침이 정확히 9시에 도착한 순간, 노크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환자분 들여보내도 될까요?”
“네. 보내주세요.”
준후가 대답하기 무섭게 아이를 안은 보호자가 준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보호자는 준후를 빤히 쳐다보다가 오스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오스틴 선생님, 진료를 보러 왔는데요. 이분은 누구신가요?”
“제 교육을 받는 제자입니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니고요. 전공의 자격증도 있습니다.”
“…….”
“이 친구가 먼저 진료를 보고 제가 확인을 할 테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스틴이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보호자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졸지에 미운 오리 새끼가 되었지만 준후는 차분함을 유지했다.
보호자를 원망할 이유는 없었다.
준후가 보호자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보호자의 신뢰를 사는 방법.
그것은 성심성의껏, 그리고 정확하게 진료를 하는 것이리라.
“아이에게 어떤 증상이 있어서 찾아오셨죠?”
준후의 첫 문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