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356화
제69장 첫 수술(1)
헥터와 함께 준후는 소아 신경외과 병동으로 이동했다.
뜻밖의 행선지였다.
준후가 기억하기로는 헥터가 식사 후 바로 수술실로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뭐 놓고 온 거라도 있나요? 갑자기 병동은 왜…….”
궁금함을 참지 못해 준후가 물었다.
“놓고 온 게 있지. 제일 중요한 게.”
준후를 응시하는 헥터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주 오는 스태프들의 인사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703호 병실이었다.
병실은 1인실이었다.
미국 병원은 기본이 1인실이고 많아 봐야 2인실을 운용했다.
한국의 6인실에 들어가면.
닭장처럼 답답한 느낌이 자주 들었다.
말만 6인실이지 상주하는 보호자를 감안하면 12인실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미국 병실은 그 답답함이 없어서 좋았다.
이게 다 돈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의미로 가슴이 답답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보호자가 헥터에게 아는 척을 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아이는 손을 흔들어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 했다.
준후도 인사말을 건넸다.
“이제 곧 수술이군요. 많이 긴장되시겠습니다.”
“밤새 한숨도 못 잤네요.”
보호자가 힘없이 웃었다.
보호자의 얼굴이 푸석푸석해 보였고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에이미를 수술해 줄 집도의 선생님입니다.”
“반가워요. 제인이라고 해요.”
“준후 서라고 합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준후는 퍽 놀랐다.
느닷없이 준후가 수술을 맡게 되었는데도 보호자는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대체 왜일까.
메이유 클리닉의 이름값을 믿는 것일까.
그래서 누가 수술을 하던 잘해줄 거라는 신뢰가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아이가 무사히 회복될 거라는 기대를 아예 꺾어버린 걸까.
준후로서는 보호자의 숨겨진 속을 알 길이 없었다.
“에이미는 컨디션이 어때?”
“별로예요. 배가 너무 고파요. 힘이 없고요. 무서워요.”
8살 환자 에이미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메시지에는 감정이 잔뜩 묻어났지만 메신저에는 감정이 하나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후자가 진짜 같았다.
준후는 알고 있었다.
고통이 반복되고 반복되다 보면 결국 사람의 가슴은 화석으로 굳어버린다는 사실을.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죽으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괴로운 사람은 보통 자신의 몸을 죽이거나 자신의 마음을 죽이곤 했다.
준후도 자신의 마음을 죽여본 적이 있어서 알았다.
무림의 아버지가 적일도에게 목숨을 잃었을 때 똑같은 경험을 해봤다.
“수술 받고 건강해져서 친구들이랑 뛰어 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야지.”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에이미가 ‘I hope so’라고 대답했다.
친구들과 뛰어 놀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 에이미에게는 ‘hope’였던 것이다.
남들이 이미 다 가진 것을 바라는, 에이미의 소박한 희망에 준후는 가슴이 찢어질 아팠다.
“조금 있다 보자꾸나.”
헥터가 에이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병실 나들이는 끝났다.
준후와 헥터가 병실을 떠나 다시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 전에 최소한 환자와 보호자의 얼굴은 보여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서 데려왔다.”
“정말 그 이유뿐입니까?”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
“제가 수술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데려온 거 아닙니까?”
눈치 빠른 준후가 헥터의 진심을 간파해 냈다.
네가 수술해야 하는 아이가 바로 이 아이다. 네 수술이 실패하면 이 아이가 죽거나 더 고통 받는다.
헥터는 아마 그런 속내를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준후에게 수술에 대한 부담감과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준후.”
“네. 교수님.”
“놀랍군. 텔레파시라도 사용할 줄 아나? 어떻게 알아챘지?”
헥터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답이 되었다.
“제가 헥터 교수님이라면 저를 어떻게 설득할까, 교수님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뿐입니다.”
“어떤 부모인들 자식이 소중하지 않겠냐만은…….”
뜸을 들이다가 헥터가 말을 이었다.
“보호자에게 에이미는 특히 더 각별하지.”
“이유가 있습니까?”
“임신이 잘 안 돼서 시험관을 통해 얻은 아이가 바로 에이미야. 시험관도 수정이 잘 안 돼서 열 번을 넘게 시도했다고 하더군.”
말을 하는 헥터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아무래도 헥터 역시 준후와 마찬가지로 ‘머리’파 서전이 아니라 ‘가슴’파 서전인 듯 했다.
“처음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
“살짝 변했습니다.”
“오~ 그래?”
기뻐하는 듯한 기색을 보인 헥터가 금방 눈살을 찌푸렸다.
“사연을 듣고 나니 에이미를 꼭 제 손으로 건강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휴우…… 좋다 말았군. 이제 됐어. 이 이야기는 앞으로 다시는 꺼내지 않을 테니까.”
설득에 실패한 헥터가 입을 꼭 다물었다.
수술실로 향하는 15분 동안.
두 사람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 * *
덩치가 산만 한 흑인 남성이 4층 수술실 앞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준후가 미국에서 와서 느낀 것인데, 타국 사람들의 얼굴은 구별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웬만한 특징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그 사람이 그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 앞에 있는 사람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덩치.
스님처럼 파르라니 깎은 머리.
저 사람의 이름은 맥스웰이었다.
준후와 같이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받는 교육생 중 한 명이었다.
이윽고 준후와 헥터가 맥스웰을 마주했다.
“둘이 인사는 나눈 적 있나?”
“아직 없습니다.”
준후와 맥스웰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스크럽하고 수술방이나 구경하고 있어. 나는 볼일 좀 보고 합류할 테니까.”
헥터가 자리를 비우면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나선 쪽은 준후였다.
“일단 스크럽부터 할까?”
“그러지.”
준후는 힘찬 발걸음으로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훑었다.
수술실의 구조와 인테리어, 기구 배치만 다를 뿐이지 신원대 병원의 수술실과 메이유 클리닉의 수술실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계수대에 선 준후는 소독용 솔에 소독액을 묻혀 손가락과 손가락 틈, 팔과 팔뚝을 힘껏 문질렀다.
솔이 주는 억센 촉감.
주홍빛으로 보글보글 일어나는 거품이 반가웠다.
하렘가에서 야매 수술했던 때를 제외한다면.
무려 한 달만의 수술이었다.
서전으로서의 일상이 시작됐다는 사실에 준후의 가슴이 설레었다.
검객은 검을 손에 쥐었을 때.
서전은 메스를 손에 쥐었을 때 가장 빛나는 법이었다.
“이봐. 준후라고 했지?”
곁에서 스크럽을 하던 맥스웰이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어. 왜?”
“이번 수술, 제1어시스트는 내가 맡지. 난 양보할 생각 없으니까 포기할 거면 네가 포기해라.”
“1어시스트를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맥스웰의 목소리가 너무 비장해서 그랬다.
“1어시스트가 가장 배울 게 많으니까. 집도의의 맞은편에 서서 호흡을 맞추는 것도 그렇고, 사용하는 수술 도구도 더 다양하고.”
“그래. 네가 1어시스트 해.”
준후가 순순히 양보할 줄은 몰랐는지 놀란 멕스웰이 눈썹을 이마 높이까지 치켜떴다.
“으음…… 아직 1어시스트가 부담되는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 건 아니고. 1어시스트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래.”
“사정? 무슨 사정?”
“이번 수술 집도의가 나거든.”
준후의 충격적인 발언에 맥스웰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석화 마법이라도 걸린 듯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맥스웰이 언성을 높였다.
목에 핏줄까지 서 있었다.
“제 정신이야? 핍지 교종 수술을 교수님이 아니라 네가 한다고? 말도 안 돼!”
“말은 돼. 이따가 헥터 교수님한테 자세히 물어봐.”
때마침 볼일을 마친 헥터가 계수대로 합류했다.
“수술하기도 전부터 왜 다툼이니?”
“교수님. 준후가 집도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맥스웰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미 결정 났어. 오스틴 교수님까지 허락하셨다.”
“메이유는 원래 이런 식입니까?”
이 질문을 통해 준후는 맥스웰이 메이유 출신이 아닌 다른 의대 병원 출신임을 알았다.
“전혀 아니지. 소아 신경외과만 이래. 오스틴 교수님이 어디 보통 괴짜여야지.”
“그럼 수술이 잘못 되면 누가 책임집니까?”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나지.”
준후가 모처럼 대화에 껴들었다.
그 당당함에 맥스웰이 할 말을 잃었다.
준후로 인해 촉발되었던 분란은 금세 잠잠해졌다.
방아쇠는 이미 당겨졌고 발사된 총알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다만 맥스웰은 수술 복장을 갖추고 3번 수술방에 들어갈 때까지 뭐라뭐라 불만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바빴다.
“수술방은 처음이니까 간단히 오리엔테이션을 해줄게.”
헥터가 수술방을 돌아다니며 수술 도구들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준후와 맥스웰은 그 뒤를 병아리처럼 총총 따랐다.
수술방 역시 수술실과 마찬가지로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수술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파란 천막이 처진 공간이 있었다.
마취의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저 천막 뒤에서 마취의는 환자의 바이탈을 집중 관리했다.
입구 왼쪽에는 수술 도구와 소모품을 보관하는 보관실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 각종 주사제와 약품을 보관하는 철제 보관함이 놓여 있었다.
수술방 투어는 20분가량 꼼꼼하게 진행되었다.
그사이 어쩌면 오늘 수술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에이미가 수술방에 도착했다.
준후는 에이미에게 다가가 타임아웃을 했다.
타임아웃이란 환자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준후는 에이미의 손목에 걸린 환자 인식 띠를 확인하고 에이미에게 물었다.
“이름은 에이미 맞니?”
“네.”
“8살이고?”
“네.”
“머리에 종양이 있어서 수술 받으러 왔지?”
“네.”
에이미의 대답은 전부 짧았다.
그 모습은 긴장한 모습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모습이었다.
8살짜리 아이가 갖춰야 할 덕목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에이미에게 건강을 되찾아주고 싶었고 생기를 잃은 눈동자에 생기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인생은 힘들었다.
눈물이 나오고 욕이 나올 만큼 힘들었다.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분통이 터지고.
때로는 두려울 만큼 잔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에는 그런 고통을 상회할 만한 가치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준후는 에이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비록 너는 들을 수 없겠지만.
약속할게.
이번 수술을 완벽하게 집도하겠다고.
앞으로 네가 앞으로 원하는 것들은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혼자만의 약속이 끝났을 때 마침.
전신 마취와 더불어 수술 도구 세팅이 끝났다.
준후는 아이의 왼쪽 편에 자리를 잡았다.
집도의 위치였다.
준후 맞은편에는 제1어시스트 맥스웰과 소독 간호사가 서 있었다.
준후 곁에는 제2어시스트로 전락한 헥터가 서 있었다.
본래라면 헥터가 제1어시스트여야 맞았지만 준후를 옆에서 직접 감시할 목적으로 일부러 옆을 택한 것 같았다.
본격적인 수술에 앞서 준후는 스태프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준후만 따돌리고 약속을 한 것처럼 스태프들 전원이 준후를 향해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모두가 함께 있었지만 준후는 혼자라서 외로웠다.
누구도 준후를 믿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태프들을 탓할 건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억울하면 증명하면 되겠지.
내 솜씨를.
각오를 마친 준후의 눈동자에서 독기가 흘러 넘쳤다.
“지금부터 핍지 교종의 완전 제거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