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제69장 첫 수술(4)
소아 신경외과 컨퍼런스 룸.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제1교수인 브루스와 레이먼드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유망주라고 듣기는 했어도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는데. 기대 이상이야. 첫 수술을 아주 잘해줬어.”
브루스에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에 레이먼드도 미소로 화답했다.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레이먼드는 소아 신경외과에서 첫 수술을 집도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론 교육이나 실습도 없이.
첫날부터 다짜고짜 수술부터 시킨다니?
꼭 무기만 달랑 쥐고 전쟁에 뛰어드는 소년병처럼 황당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전공의 경력은 사탕과 바꿔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어서.
레이먼드는 첫 수술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모야모야병 수술이 위험한 수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수술도 아니지. 이만하면 앞으로 웬만한 뇌혈관 수술은 다 맡겨도 되겠는걸?”
“과찬이십니다.”
“겸손 떨 필요 없어. 반대로 자랑스러워해야지.”
“하하하. 그런가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어지는 대화는 한 사내에 의해서 끊어지고 말았다.
벌컥!
제2교수 헥터가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헥터는 브루스와 레이먼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브루스 옆에 앉았다.
브루스 앞에 놓인 커피를 빼앗아서 거칠게 들이켰다.
헥터의 목젖이 출렁거렸다.
“핍지 교종 수술 있었지? 꽤나 힘들었나 봐.”
“힘들긴 했는데 평소와는 좀 다른 식으로 피곤했지.”
“무슨 뜻인데?”
“수술을 내가 안 했거든.”
“뭐라고? 그걸 네가 안 하면 누가 하는데?”
“준후.”
헥터가 짧게 대답했다.
준후의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레이먼드는 반사적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녀석도 오늘 수술이 있었나?
외래 진료만 보는 게 아니었나?
“이봐, 브로. 농담이 지나치잖아. 교육생이 핍지 교종을 집도하려면 최소 6개월은 더 지나야 한다고.”
브루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상황이 농담 같은 건 나야. 조언을 해준 것도 아니고 중간에 도움을 준 것도 아닌데.”
“…….”
“그냥 알아서 수술을 끝장내 버렸다고. 준후는 몬스터야.”
헥터가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농담하는 거 아니지?”
“내가 코미디언인 줄 알아? 하루 종일 농담만 하게?”
“방금 막 레이먼드가 모야모야 병 수술을 잘 끝내서 칭찬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핍지 교종 수술이라니…….”
헥터가 준후 이야기를 꺼내자.
레이먼드는 졸지에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헥터와 브루스는 준후 이야기만 하기 바빴다.
고의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무시당하고 있다는 불쾌감을 지울 수 없는 레이먼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야모야병 수술을 성공시키면서 교수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준후는 또다시 레이먼드보다 한 발 앞서 나갔다.
레이먼드는 졸지에 준후의 뒤꽁무니만 쳐다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메이유 클리닉 신경외과 부동의 에이스.
모두가 우러러 보는 천재 외과의.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는 소리를 레이먼드는 똑똑히 들었다.
“핍지 교종 수술이 어렵습니까? 성인의 경우에는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심통 난 마음을 감추며.
레이먼드가 차분하게 물었다.
“어렵다마다. 특히 헥터가 맞은 환자는 대후두공 근처에 종양이 있었고. 종양이 뇌에 침윤(invasion)도 많이 되어 있었어.”
“…….”
“소아 종양 수술을 많이 해본 베테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수술이었지.”
브루스의 목소리에 감탄이 섞여 있었다.
덕분에 레이먼드의 속만 배배 꼬였다.
“종양 절제는 잘 하던가? 나중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니야?”
“준후의 수술을 쭉 지켜보고 있었어. 환자한테 문제가 생겼으면 내가 때려서라도 말렸지.”
“하긴 그것도 그렇군.”
“저도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핍지 교종 수술을 해보고 싶습니다.”
레이먼드는 속마음을 냅다 질러버렸다.
수술이 말도 안 되게 어렵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준후가 해냈다면.
자신이라고 못 해낼 이유가 없었다.
“당장은 무리고 나중에 네 실력을 보고 판단하지.”
“나중이 언제입니까?”
“이번 주 안으로 내가 네 집도를 봐줄게. 준후 솜씨를 이미 봤으니 충분히 비교가 될 거야.”
“저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첫 기수라서 그런가? 뜨거운 친구들이 많네.”
헥터가 피식 웃으며 브루스가 남긴 커피를 전부 마셨다.
서준후.
네가 하는 건 나도 한다.
레이먼드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속으로 다짐했다.
* * *
같은 시각 휴게실.
준후는 소파에 앉아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귀가 간지러웠다.
그런데 그게 욕인지, 칭찬인지 분간이 안 갔다.
딸칵!
준후는 자판기에서 뽑은 캔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리고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부스트 업 프로그램 첫 수술을 깔끔하게 마쳤다.
수술 도중 바이탈이 크게 흔들리거나.
CPR을 실시하는 위기는 없었다.
경과는 훌륭한 편이었고.
수술 시간도 평균보다 1시간가량 단축했다고 헥터에게 들었다.
그런데 왜일까.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것은.
한참 고민하던 준후는 해답 비슷한 것을 찾았다.
오랜만에 수술 도중 스스로에게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경막 절개 당시.
그러니까 피의 홍수가 발생했을 때.
준후는 적잖이 당황했다.
눈앞이 깜깜하고 거대한 성벽에 진로를 막힌 듯한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전공의 자격증을 따고 난 후.
늘 자신감이 넘쳐흘렀는데.
그 자신감이 한순간에 메말라 버린 것이다.
소아 신경외과 파트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아.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오늘부터 교재를 달달 외운다.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준후는 공부욕심으로 승화시켰다.
무슨 일이든지 안다고 생각하면 더 배울 수가 없다.
알면 왜 더 배우겠는가.
게다가 스승 재현도 아직까지 세계의 논문을 뒤지고 있는데.
그보다 한참 모자란 준후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르르륵.
상념이 끝나 갈 무렵, 휴게실 문이 열렸다.
저벅 저벅 걸어와 준후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은 맥스웰이었다.
맥스웰은 한동안 말없이 준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슨 할 말 있어?”
“살다 살다 너 같이 당돌한 애는 처음 봐서.”
맥스웰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첫 수술에 핍지 교종을 절제하고 교수님 조언까지 뿌리치면서 혼자 해결하고. 넌 심장이 두 개라도 되냐?”
맥스웰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맥스웰은 준후처럼 나대는 인간을 싫어했다.
말썽과 소란의 근원지에는 항상 나대는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후는 조금 달랐다.
나대기는 하는데 나대도 괜찮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맥스웰이 특히 준후에게 감동받은 순간은 준후가 전기 메스를 사용한 순간이었다.
준후의 손놀림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담백한 듯하면서 화려했고.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강건했다.
그리고 마침내 곡반에 떨어진 반듯한 종양을 확인했을 때.
맥스웰은 전율마저 느꼈다.
그것은 외과의가 빚어낸 하나에 작품이었다.
“남들보다 고집이 더 셀 뿐이지. 그러는 너도 어시스트 잘하던데? 덕분에 수술 시간이 많이 단축됐어.”
“서전이면 결국 집도를 잘해야지. 어시스트는 결국 한계가 있어.”
맥스웰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 사연이 있는 듯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준후가 곧바로 물었다.
“레지던트 때 불행한 사건이 있었어. 지금 설명하긴 좀 그렇고.”
“그럼 나중에는 말해줄 거야?”
“네가 하는 거 봐서. 그건 그렇고.”
맥스웰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비법을 좀 알려줘.”
“무슨 비법?”
“나도 너처럼 섬세하고 손을 싶어. 더 성장하지 않으면 언젠가 벽에 막혀 버릴 거야.”
맥스웰의 목소리가 사뭇 비장했다.
준후가 이번 수술에서 부족함을 느꼈던 것처럼.
맥스웰도 스스로에게 부족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준후는 즉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본인도 배우는 입장이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쑥스럽긴 했다.
후학을 양성하는 일은…….
솔직히 앞으로 15년에서 20년은 지나야 가능하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말이다.
지금부터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이를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뭐를 가르쳐줘야 잘 가르쳐줬다고 소문이 날까.
준후는 일반적인 수련보다는 일상에서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무공들을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었다.
“뭐야?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거야?”
맥스웰이 토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준후의 침묵을 거절로 받아들인 듯 했다.
“오해하지 마. 방법을 생각 중이었으니까.”
“그냥 네가 익힌 방법을 알려주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가르치는 것도 환경이나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른 법이야. 마침 괜찮은 게 떠올랐다.”
“정말?”
준후의 말에 맥스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단 가르쳐주는데 조건이 있어.”
“뭔데?”
“하나는 매일 꾸준히 30분 이상 익힐 것. 나머지 하나는 남들 눈에 바보처럼 보인다고 해서 중간에 포기하지 말 것.”
“바보처럼 보인다는 건 무슨 뜻인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맥스웰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지금부터 잘 봐.”
준후는 피식 웃으며 허공에 오른손을 뻗었다.
* * *
컨퍼런스 룸 창가에서 노란 석양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첫날 일정을 무사히 마친 10명의 교육생들이 컨퍼런스 룸에 모두 모여 있었다.
“다들 피로에 찌든 표정이군.”
제1교수 브루스가 교육생들을 훑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마치 교육생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되는 것처럼.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 앞으로는 일정이 더 팍팍해질 거다. 수술 건수도 늘어나고 논문 작성도 해야겠지.”
“…….”
“오늘 일정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놀 생각 따위는 집어 치워. 당장 다음 주에 교재 쪽지 시험이 있으니까.”
브루스는 쪽지 시험에서 떨어지면 부스트 업 프로그램도 탈락이라고 엄포를 덧붙였다.
“아침에 빼먹은 설명이 있어서 한 가지 추가하겠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는 각 전공이 끝날 때마다 마스터 칭호를 수여한다.”
“마스터 칭호가 뭡니까?”
준후 옆에 앉은 올리버가 손을 들고 물었다.
“성질도 급하긴. 마스터 칭호란 말이다.”
브루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스터 칭호.
이는 부스트 업 프로그램 최고의 교육생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그 자체로 어떤 혜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칭호가 주는 명예는 어마어마했다.
“마스터 칭호를 받은 서전은 메이유 클리닉 홈페이지와 앱 페이지 명예의 전당에 얼굴이 실린다.”
“…….”
“쉽게 말해서 여러분들이 어느 나라에 어느 병원에서 근무를 하던지 간에 본인 실력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브루스의 설명을 듣고 준후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금방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