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360화
제69장 첫 수술(5)
오후 컨퍼런스가 끝나면서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첫날 교육 일정도 끝났다.
준후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훑었다.
교육생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었다.
“공과 사가 칼 같아서 좋네.”
“무슨 뜻이야?”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교육 시간이 끝나니까 바로 흩어지잖아.”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미국에서는 당연해도 한국에서는 안 당연해.”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한국 외과의에게는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이라는 개념이 없다시피 했다.
일이 없을 때까지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 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만약 지금 한국에 있었다면.
준후는 펠로우 과정(세부 전공)을 밟고 있었을 텐데.
일과가 끝나도 퇴근을 못하고 병원에 남아서 논문 자료 준비, 논문작성, 레지던트 교육을 했을 것이다.
응급실에 응급 환자가 찾아오면 수술하는 일은 필수였고.
오죽하면 ‘펠로우’를 ‘펠노예’라고 부르겠는가.
미국처럼 외과의 연봉이 5억대라면.
일과를 완벽하게 보장한다면.
한국에서도 외과를 지원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미국 외과의의 근무 환경이 부럽기도 하고.
한국 외과의의 근무 환경에 분통이 터지기도 했다.
과연 스승 재현의 말은 옳았다.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말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까.
외과의 개개인의 정의감과 희생정신으로 가혹한 근무 환경을 버텨내는 게.
“그나저나 이제부터 라이벌이네?”
“응? 라이벌?”
“준후 너도 마스터 칭호를 노리는 거 아니야. 아까 눈이 반짝반짝 하던데?”
올리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딱히 노리는 건 아니고…….”
“노리는 게 아니면?”
“이미 내 거라고 해야 하나? 벌써 침 발라 놨거든.”
“으…… 더러워!”
준후와 올리버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하호호 웃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을 때.
올리버가 맥스웰을 응시했다.
원래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준후를 다리로 삼아 통성명을 나누고 이야기도 섞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준후, 올리버가, 맥스웰이 삼총사로 모여 다녔다.
“쟤는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일정이 빡세서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심했는지.
올리버가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준후는 알 것도 같았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지금 맥스웰이 하는 짓이 기행으로 보일 테니까.
오후 컨퍼런스가 끝나기 무섭게.
맥스웰은 오른손을 희한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엄지에 검지를 붙이고.
엄지에 중지를 붙이고.
엄지에 약지를 붙이고.
엄지에 소지를 붙이고.
이 과정을 빠르게 연속해서 수행하고 있었다.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만드는 행동이긴 했다.
“무슨 말 하는지 다 듣고 있거든? 들리는 데서 희롱하지 말아줄래?”
“아니, 누가 봐도 이상한 짓을 하고 있잖아.”
“준후가 이렇게 하면 강해질 수 있다고 했어.”
“네가 범인이었냐?”
올리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준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라이벌들을 아주 신박하게 제거하는 재주가 있구나.”
“장난치는 거 아니야. 저렇게 오래 훈련하면 손을 잘 쓸 수 있어.”
“저딴 식으로?”
“저딴 식으로.”
준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맥스웰이 익히고 있는 무공은 소림의 72기예 중 하나였다.
쇄지공(鎖指功)이라 불리는 무공이었다.
쇄지공은 손가락을 단련하는 무공 중 하나인데 엄지에 다른 네 손가락을 붙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손목이 아니라 손등에 힘을 주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손목 관절을 좀 더 부드럽게 쓸 수 있게 된다.
손가락 움직임이 빨라지는 것은 서비스였다.
쇄지공은 손놀림을 향상시키는 초급 코스였다.
익히기 쉬웠고 그 성과도 빨리 드러나는 편이었다.
“저딴 식으로 실력이 좋아졌다는 서전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
“듣게 될 거야. 주인공은 당연히 맥스웰이고.”
준후의 시선이 열심히 수련 중인 맥스웰에게 옮겨졌다.
“어때? 수련은 할 만해?”
“이 정도면 판타스틱이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잖아?”
맥스웰도 준후를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솔직히 매커니즘은 듣고도 잘 이해가 안 되지만. 뭐, 준후 네가 이렇게 강해졌다니까 믿고 간다.”
“걱정 마. 성과가 없으면 내가 책임져.”
준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졸지에서 미국에서 제자(?)를 거두게 되었고 그 제자는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수련에 몰두하는 맥스웰이 보기 좋았다.
보통은 맥스웰처럼 못했다.
쇄지공을 훈련하는 모습이 흉하므로 몰래 숨어서 수련한다거나.
아니면 안 하면서 하는 척을 한다거나.
일반적인 선택은 둘 중 하나일 텐데 맥스웰은 제3의 길, 최선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맥스웰의 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슬슬 일어나자. 저녁부터 같이 먹을까?”
“좋지.”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올리버가 맞장구를 쳤다.
“난 당직 근무거든? 당직실에서 알아서 시켜 먹을게.”
맥스웰은 따로 빠진다는 의사를 전했다.
교육생에게도 근무 스케줄이 있긴 했다. 주간 당직 근무와 야간 당직 근무가 그것이었다.
10명이서 돌아가니 주 당 1.4회 당직 근무를 서는 셈이었다.
이 역시 한국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심지어 당직 수당까지 따로 챙겨주니까.
맥스웰과 헤어진 후 준후는 올리버와 함께 지하 1층 식당가로 향했다.
외래 진료 시간이 끝났음에도 식당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병원이 워낙 커서 생긴 해프닝일 것이다.
“저녁 스케줄은 어떻게 돼?”
준후가 올리버에게 물었다.
“교수님이 쪽지 시험 떨어지면 교육 자격을 박탈한다고 엄포를 놨잖아. 일단 죽어라 공부해야지. 준후, 너는?”
“나는…….”
준후가 턱을 쓸어내리며 뜸을 들였다.
* * *
그날 저녁.
준후는 미국 최고의 소아 신경외과의 오스틴이 직접 편찬했다는 600페이지 교재를 옆구리에 끼고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메이유에서 첫날을 보낸 소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좋았다.
함께 하는 동료들도 실력이 좋았고 교수진도 마음에 들었다.
교육 환경과 프로그램은 더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준후가 관찰한 바로.
한국 펠로우는 교수가 시킨 일을 한다.
또는 교수에게 충성심을 보여 나중에 교수 자리를 얻어야 한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미국은 정말 교육생들을 훈련시킨다는 느낌이 강했다.
“좋긴 좋네.”
걸음을 멈춘 준후가 정면에 있는 건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건물은 도서관이었다.
밤 갈색 벽돌로 지은 3층짜리 도서관은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메이유 클리닉은 지역 사회 복지에도 관심이 많았다.
지역 의료 봉사도 자주 나간다고 들었다.
다시 걷기 시작한 준후의 눈에 한 사내의 뒷모습이 잡혔다.
사내의 허리춤이 볼록했다.
지갑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과한 볼륨감.
사내는 아마 허리에 총을 차고 있을 것이다.
준후는 새삼 미국이 총기 소유에 자유롭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뭐야? 너도 도서관에 왔냐?”
도서관 입구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빈정거리며 말을 걸었다.
레이먼드였다.
도서관 입구에 놓인 자판기 앞에 레이먼드 일행이 서 있었다.
“더 할 말 없으면 간다?”
“너 오늘 핍지 교종 수술했다며?”
질문하는 레이먼드의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것은 좋은 뜨거움이 아니라 나쁜 뜨거움이었다.
저런 뜨거움은 자기 자신을 태우고 종국에는 다른 사람마저 태워 버리는 뜨거움이었다.
준후도 무림에서 저런 눈빛으로 살아봐서 잘 알았다.
“그게 뭐 어때서?”
“운도 좋았네. 감히 너 따위가 성공시킬 수술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운이 계속되지는 않을 거다.”
“운이라…… 그럼 내 운이 얼마나 가는지 한 번 지켜봐.”
“두고 봐. 마스터 칭호를 따는 건 내가 될 테니까. 넌 분명 내 들러리가 되겠지.”
레이먼드는 자기 할 말만 한 뒤 일행을 데리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는 놈이었다.
저런 부류는 천동설도, 지동설도 믿지 않고 ‘나’동설을 믿는 부류였다.
세상이 본인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 못된 망아지는 언제쯤 정신을 차리려나.’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레이먼드가 준후에게 뜨거운 것과 달리 준후는 레이먼드에게 차가웠다.
만약 시험장에서처럼 또 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도서관에서 들어가서 준후는 2층 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공부하는 사람들을 대충 훑어본 바에 따르면.
도서관에 의대생이나 의사보다는 지역 주민이 더 많아 보였다.
팟! 팟! 팟!
본격적인 공부에 앞서 준후는 검지로 전전두엽과 측두부를 점혈했다.
언어를 관장하는 브로니카 영역.
장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영역에 내공을 불어넣은 것이다.
내공으로 신경을 자극하자 수백 개의 전구가 들어온 것처럼 머릿속이 환해졌다.
준후는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굳이 내용을 곱씹을 필요가 없었다.
문장과 문단이 초코 칩처럼 머릿속에 콕콕 박히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사서가 존재해서.
준후가 읽은 정보를 알아서 척척 분류해 주는 기분이었다.
공부하던 도중.
꺼림칙한 시선이 느껴져 준후가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여성이 넋 나간 얼굴로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책 넘기는 소리가 시끄러웠나요?”
준후가 미안해하며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왜…….”
“공부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머리에 남는 게 없어요. 글을 적거나 밑줄을 치든가, 그게 아니면 최소한 천천히 탐독을 해야죠.”
여성의 공부 훈수에 준후는 그저 웃었다.
하긴 의료 전공 서적을 동화책 보듯이 보고 있으니 저 사람 입장에서는 황당하긴 할 거다.
“시끄러운 건 아니죠?”
“네. 전혀요.”
“그럼 됐습니다.”
준후는 여성에게 신경을 끄고 다시 교재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준후는 무림에서부터 독해에 강한 편이었다.
그 와중에 내공 신경 자극술까지 사용했으니 공부 효율이 하늘을 꿰뚫을 듯했다.
준후는 단 두 시간 만에 교재의 5분의 1을 독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게 공부 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많았다.
개중에는 오늘 수술한 핍지 교종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대후두공에 위치한 경막을 절개할 때는 대량 출혈에 주의하라는.
이걸 미리 알고 있었으면 개고생을 안 하고 수술 시간도 단축할 수 있었는데…….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적어도 의료계에서는 그런 속담이 통하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는 아는 게 힘이었다.
병명이나 병의 진행 사항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히 소아 수술이 성인 수술보다 섬세해야 하는구나.
수술 부위 접근법이나.
절제술, 봉합술의 종류도 더 다양해.
앞으로 갈 길이 험난했지만 준후는 그래서 더 좋았다.
소아 신경외과 전공을 정복하고 서 내려다 본 풍경이 아름다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먼 훗날에…….
소아 환자들을 치료하지 못해 무기력감을 느끼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숨을 고르고 다시 페이지를 넘기려는 그때!
탕! 탕! 탕! 탕!
똑똑히 들었지만 귀를 의심하고 싶은 굉음이 고막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