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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63화 (360/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363화

제70장 비극(3)

흔적은 지워지기 마련이었다.

메이유 클리닉 공공 도서관 2층 로비에서 벌어졌던 대참사도 마찬가지였다.

미화 직원들이 다녀가자 빨간 피의 호수가 곳곳에 펼쳐져 있던 바닥이 말끔하게 닦였다.

코를 찌르던 피 비린내는 소독약 냄새로 대체 되었다.

흔적 중에는 천천히 지워지는 것도 있기 마련이었다.

총알의 흔적이 그랬다.

벽면과 기둥은 까맣게 그을렸고 탄환 자국을 따라 가장자리가 조금씩 깨져 있었다.

레이먼드는 벽면에 남은 탄환 자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쪽지 시험을 공부하던 중.

잠깐 바깥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그 눈 깜짝할 사이에 믿을 수 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놀라운 일이 있었으니…….

바로 준후의 치료였다.

레이먼드가 도서관에 복귀했을 때, 준후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시도하고 있었다.

병원도 아니고 도서관에서 한 환자에게 기관 절개술을 시도했던 것이다.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기관 절개술도 엄연한 수술이기에 보통 수술방에서 이루어졌다.

환자가 응급이라면 가뭄에 콩 나듯 응급실이나 병실에서 실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다.

그런데 준후는 그걸 도서관에서 해버렸다.

수술 도구라고는 전혀 없는,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가 산더미처럼 쌓인 도서관에서 말이다.

생각에 잠겼던 레이먼드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매점으로 이동해 커피를 샀다.

계산을 하던 중 계산대 옆에 놓인 빨대통이 눈에 띠었다.

빨대를 보니까 또 준후의 기관절개술이 떠올랐다.

기관에 연결할 튜브가 없자 준후는 과감하게 빨대를 선택했다.

빨대의 허리를 90도로 꺾은 후 환자의 기관에 냅다 꽂아버렸다.

그리고는 빨대 하단부에 손을 갖다 대었다.

호흡이 느껴졌던 걸까.

준후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피어났다.

기관 절개술까지만 보고.

레이먼드는 다시 도서관 바깥으로 나왔다.

자신이 준후의 처치를 지켜봤다는 것.

그리고 지켜보면서 감탄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때마침 사이렌 소리와 함께.

메이유 클리닉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구급차 3대가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구급요원들은 비장하게, 또 다급하게 들 것을 챙겨 도서관으로 돌격했다.

“뒤에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산대 앞에서 돌이 되어버린 레이먼드에게 직원이 한마디 했다.

레이먼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피했다.

야외로 나가서 들이킨 커피가 유난히 썼다.

핍지 교종 수술도 그렇고.

오늘 기관 절개술도 그렇고.

준후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레이먼드가 시험장에서 시비를 걸었을 때도 준후는 침착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래도 질 순 없어. 난 최고가 되어야 해. 최고가 아닌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레이먼드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마시고 캔을 손으로 우그러뜨렸다.

* * *

메이유 클리닉 응급실은 한 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클리닉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터져 버린 것이다.

부상자도 무려 7명이나 된단다.

“당장 흉부외과, 소화기 외과, 신경외과에 전화 돌려. 레지던트 2명씩 미리 내려오라고 해.”

“네. 교수님.”

응급의학과 당직 교수 코비가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응급실 입구 복도로 향했다.

이동하면서 코비는 손바닥을 힘껏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일이 꼬였을 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버릇이었다.

숱한 경험 상 총상 환자가 멀쩡하게 응급실을 찾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여섯 번 던진 주사위가 여섯 번 연속으로 육이 나올 확률과 비슷했다.

총상환자가 멀쩡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간단했다.

총을 맞지 않으면 총상 환자가 아니고 총을 맞으면 총상 환자다.

그런데 총을 맞았다면 가벼운 부상일 수가 없었다.

위이이잉.

자동문이 열리면서 바깥 풍경이 펼쳐졌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사 가운이 휘날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붉은 불빛과 사이렌 소리가 코비에게 달려왔다.

불빛과 소리가 차차 선명해졌다.

가장 먼저 도착한 구급차에서 응급실 팀원들이 내린 뒤 스트레쳐 카에 실린 환자를 응급실 입구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환자를 살피던 코비의 눈썹이 정수리까지 닿을 듯했다.

환자는 이미 응급처치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허벅지 쪽에 옷과 붕대가 감겨져 있었으며 무릎 뒤쪽으로 부목도 대어져 있었다.

피가 번졌던 얼룩의 근원지로 추정했을 때.

총알이 대퇴 동맥을 지나갔을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출혈이 의외로 심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환자는 희미하지만 의식이 있었다.

“너희가 오는 길에 응급처치 했어?”

“아뇨. 도착했을 때 이미 처치가 되어 있더라고요. 덕분에 시간을 크게 벌었습니다. 환자만 이송해 왔거든요.”

“도서관에서 이만한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준후 서라고. 부스트 업 프로그램 교육생이 했답니다.”

충격에 빠졌던 코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급실 들어가면 바이탈 체크하고 혈액팩하고 하트만부터 달아. 환자는 A구역으로 보낸다.”

“네. 교수님.”

코비의 지시를 받은 팀원들이 응급실로 들어갔다.

그 후로도 코비는 응급실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스트레쳐 카에 실려 오는 환자들을 살피고, 오더를 내리고, 환자들을 상태에 따라 분류했다.

총기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

오늘은 과연 몇 명이나 살릴 수 있을까 걱정했건만.

그게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 되어버렸다.

이송 전 응급처치가 예술이었다.

환자들 대부분 의식이 있었고 출혈도 통제가 잘 되어 있었다.

“허…….”

코비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음성이 흘렀다.

철옹성 같았던 코비의 평정심을 마지막 환자가 깨버리고 말았다.

환자의 목에 기관 절개술이 펼쳐져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기관 절개술은 도서관에서 할 만큼 녹녹한 수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로로 벌어진 환자의 목에 90도 꺾인 빨대가 꽂혀 있었다.

살색 반창고가 빨대를 고정하고 있었다.

빨대 끝에 손바닥을 대어보니 숨결이 느껴졌다.

“가관이야. 가관.”

“이 환자는 어떻게 할까요?”

팀원이 코비에게 물었다.

“일단 빨대는 빼지 말고 그대로 유지해. 이비인후과 콜하면 내시경으로 이물질을 제거해 줄 거다. B구역으로.”

“네. 교수님.”

마지막 환자를 응급실로 보내면서 코비는 제 역할을 다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팔 다리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코비의 시선은 곧 무질서하게 늘어선 구급차를 향했다.

한 청년이 코비를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훤칠한 키에 동양인 친구였다.

청년이 코비를 마주하고 섰을 때.

코비가 먼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자네가 준후 서인가?”

* * *

응급실 주차장에 딸린 야외 휴게실.

준후는 응급의학과 교수 코비와 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한참 설명하느라 목이 말랐다.

“그러니까 자네가 현장에서 총기범을 제압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응급처치를 했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신경외과 출신 치고는 응급 환자 보는 솜씨가 제법이잖아? 리더십도 있고.”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해봤습니다.”

준후가 멋쩍게 웃으며 검지로 볼을 긁었다.

응급 환자 치료 경험은 외상센터로 지정된 대전 신원대병원에서 충분히 쌓았다.

리더십이라면…….

무림에서 얻어온 것이었다.

화경에 경지에 이른 뒤 청룡단에 단주로서 100여 명을 이끌어 봤으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도 되는 거야?”

코비가 농담조로 말했다.

준후는 대답 대신 웃고 말았다.

처음 현장에 있었을 땐 많이 당황하고, 겁도 나고, 자신감도 없었지만.

의학 지식과 내공과 무공을 버무려 멋지게 응급처치에 성공했다.

중요한 건 언제나 마음이었다.

설령 태풍이 분다고 해도 마음만은 꺾을 수 없을 테니까.

환자를 살리고 싶다는 준후의 마음이 꺾이지 않았기 때문에 환자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뭐가 말씀입니까?”

“전부 다 대단했는데 기관 절개술이 특히 대단했어. 거의 정신 나간 수준이던데?”

코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기관 절개술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나?”

“환자가 구토를 한 뒤 상기도 폐쇄에 걸렸습니다. 하임리히법을 해도 이물질이 안 나오더라고요.”

“저런.”

“기관 절개술 말고는 답이 없어서 과감하게 저질렀습니다.”

“자네가 기관절개술을 안 했으면 환자가 어땠을까. 구급팀이 도착했으니까 죽지는 않았겠지만 산소를 제 때 공급받지 못해 뇌 기능 일부가 죽었겠지.”

“저도 그런 걱정 때문에 기관 절개술을 했습니다.”

“환자 걱정은 하고 자네 걱정은 안 했나? 졸지에 살인마가 될 뻔했는데.”

코비의 질문에 준후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때 당시의 마음가짐을 되짚어 보았다.

“저 말고 환자에게 무엇이 최선일까. 그것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무섭네요.”

준후는 말을 마치고 남은 캔 커피를 전부 들이켰다.

텅!

무심하게 던진 빈 캔이 재활용 분리수거 통에 골인 되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뭐가? 자네? 자네에 관해서라면 응급의학과로 납치하고 싶을 만큼 탐이 나는데?”

“제가 아니라 환자들 말입니다.”

자화자찬하는 게 민망했지만 응급처치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들 목숨이 100퍼센트 보장 받았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수술방은 전쟁터였고.

전쟁터의 전황은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준후는 아직도 편히 쉬지 못했다.

혹시 신경외과가 맡은 총상 환자에게 문제가 생길까봐.

혹시라도 자신이 대타를 뛰어야 할 상황이 올 까봐.

“자네 생각에는 어떨 것 같아?”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응급실에서 진료한 총상 환자만 500명이 넘어갈 정도야. 나름 빅 데이터가 쌓여 있는 셈이지.”

코비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환자 상태를 보면 딱 감이 와. 이 환자는 수술방에 들어가도 힘들겠구나, 하고.”

“감질나게 하지 마시고 대답부터 해주시면 안 됩니까?”

이에 코비가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준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장담하는데 오늘 온 환자들은 전부 살아. 자네는 두 다리 뻗고 자도 될 거야.”

“정말입니까?”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코비가 웃으며 말했고 준후도 그제야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한 손으로 건강 팔찌를 쓰다듬기도 했다.

성호 형이 자신을 굽어봐 준 것만 같아서.

“그건 그렇고 당분간 잡음이 있긴 있을 거야.”

“잡음이라면…….”

“자네 기관 절개술이 위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나올 거거든. 최악의 경우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수도 있어.”

“거기까지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준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준후가 두려운 것은 환자가 죽거나 다치는 것이었다. 자신의 안위는 한 번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의사가 아니라 장군을 했어도 될 재목이군. 일단 알고만 있으라고. 나와 그 사람이 자네를 든든하게 봐줄 테니까.”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네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 정도로만 설명해두지. 피곤할 테니까 그만 들어가 봐.”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코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준후는 기숙사로 발길을 돌렸다.

코비가 언급한 그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하면서.

또 미국에서 수련하면 총상에 관해서라면 한국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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