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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64화 (361/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364화

제70장 비극(4)

다음 날 오전, 기숙사 1층 식당.

준후는 어제부터 삼총사로 활약하고 있는 올리버, 맥스웰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속이 안 좋아? 왜 그렇게 깨작깨작 거려?”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어제는 잘 먹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가 착각했겠지. 난 뭔가를 맛있게 먹은 적이 없어.”

준후가 힘없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기숙사에 들어온 지는 3일밖에 안 지났지만 미국에 온 지는 벌써 30일이 지났다.

테스트 전까지 하렘가 근처에 머물렀으니까.

고향과 고향 사람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은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시대가 좋아지지 않았던가.

일반 전화나 영상 통화를 하고 나면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 나갔다.

문제는 음식이었다.

입맛만큼은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었다.

적어도 준후가 느끼기에 미국 음식은 너무 무겁고, 짜고, 기름졌다.

언제 날을 잡아서 마트에서 한식을 잔뜩 사오거나.

부대찌개가 1인당 2만 원에 육박하는 미친 가격의 한식당이라도 찾아야할 판국이었다.

“이거 원 음식을 제대로 먹는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

툴툴거리던 올리버가 맥스웰에게 시선을 돌리고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맥스웰은 준후보다 한 술 더 떴다.

준후의 가르침을 따라 식사에 젓가락을 사용 중이었다.

처음 쓰는 젓가락에 맥스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샐러드 야채조차 제대로 집지 못했다.

젓가락을 쓰는 맥스웰의 손짓은 꼭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 것처럼 어설퍼보였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남은 왼손으로 맥스웰은 쇄지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엄지에 나머지 손가락을 붙였다가 떼어내는 수련 말이다.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떠나는 사람 몇몇이 맥스웰에 기행을 힐끔 훔쳐보고 뭔가 틀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 훈련은 할 만해?”

준후가 맥스웰에게 물었다.

맥스웰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젓가락으로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네가 멀쩡한 사람 하나 망친 건 아닌지 걱정이다.”

“보기에는 안 좋아도 효과는 확실해. 저것만 꾸준히 해도 손기술은 빨리 늘 거야.”

“이젠 말싸움하기도 지친다. 그냥 그렇다고 치자.”

올리버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준후라고 올리버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서전의 수련이란 건 반드시 수술방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준후만 해도 수술보다는 호월십이수라는 무공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손과 손목을 움직이면서 손기술을 단련해 왔다.

“그나저나, 너 어제 사고 한 번 거하게 쳤더라?”

“나도 어제 뉴스 봤어. 우리 도서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던데. 거기서 범인을 제압하고 치료까지 한 게 준후 너라면서?”

맥스웰도 모처럼 대화에 껴들었다.

“CCTV 영상 보니까. 와…… 맨손으로 총 든 사람한테 달려들던데 무슨 깡다구야?”

‘안 맞을 자신이 있었으니까’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준후는 적당히 둘러댔다.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봐. 그 사람을 빨리 제압하고 다친 사람들을 구했어야 하니까.”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 네 몸이 제일 중요해.”

“왜? 난 멋있기만 하던데.”

“멋있는 건 좋은데 멋에 목숨을 걸지는 말자는 말이지.”

준후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의 걱정은 따뜻한 걱정이었다. 타국에서 느끼는 온기가 소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곧바로 소아 신경외과 병동을 찾았다.

컨퍼런스 룸에서 잡답을 나누는데 동료 교육생들 몇몇이 준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제 활약상을 보며 살신성인하는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준후는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뉴스도 그렇고.

동료들도 그렇고.

어제 사건에 대한 준후 평가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것처럼 보였다.

“조용!”

컨퍼런스 룸에 들어온 제1교수 브루스가 단상에 서서 외쳤다.

그는 교육생을 훑더니 오늘의 일정을 발표했다.

교육생들 대부분이 오전에 수술 스케줄이 잡혔는데 준후만 없었다.

뒤통수가 서늘한 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교수님. 저만 스케줄이 없습니다.”

“자네는 오늘 수술 열외야. 일과 끝나고 응급 수술이 잡히면 따로 연락하지.”

“이유가 뭡니까?”

“이유라면 본인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브루스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 좋은 쪽으로도.

또는 나쁜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애매한 미소였다.

“자네는 컨퍼런스 끝나면 오스틴 교수님 집무실로 가 봐. 교수님이 찾으시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다음 주에 있을 쪽지 시험 범위가 정해졌다.”

브루스가 기쁜 듯 말했고.

교육생들은 우울한 듯한 표정으로 들었다.

“시험 범위는 1페이지부터 200페이지까지다. 주관식과 객관식을 섞어서 총 50문제가 출제될 거야.”

“…….”

“저번에 한 경고는 잊지 않았겠지? 쪽지 시험에 탈락하면 부스트 업 프로그램 자체에서 탈락하는 거다. 처음부터 개망신 당하기 싫으면 열심히 공부해.”

할 말을 마친 브루스가 단상에서 내려와 컨퍼런스 룸을 나갔다.

교육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푸념을 한 바가지 늘어놓았다.

“200페이지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용도 더럽게 어렵던데.”

“말이 200페이지 사실 400페이지잖아. 글씨가 얼마나 깨알 같은데 말이야.”

“이제 일과 시간에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

교육생들의 한탄을 듣고 준후는 그냥 웃고 말았다.

준후가 어제 도서관에서 공부한 양이 딱 200페이지였다.

* * *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가 집무실로 들어갔다.

미국 최고의 소아 신경외과 서전.

부스트 업 프로그램 소아 신경외과 전공에 학과장인 오스틴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소파 앞 테이블에 펼쳐놓은 신문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준후를 응시했다.

“드디어 문제아가 왔구만. 거기 앉아.”

“네. 학과장님.”

준후가 오스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오스틴과 눈을 마주쳤다.

오스틴의 눈빛과 표정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노련한 준후도 감정과 생각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자네는 사람을 여러 번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더군.”

오스틴이 다리를 꼬며 말을 계속했다.

“핍지 교종 수술을 기어이 집도했다고 헥터에게 전해 들었지. 그것도 모자라 어제는 총기 사건에도 휘말렸고.”

“그래서 저를 문제아라고 하셨습니까?”

오스틴의 말에서 뾰족한 가시를 느낀 준후가 되물었다.

“문제아라는 건 말이야.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한테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야. 문제를 끌고 다니는 사람에게도 사용하는 단어지.”

오스틴이 무릎에 양쪽 팔꿈치를 대고 양손을 포개면서 삼각형을 만들었다.

그 삼각형의 꼭짓점에 본인의 턱을 얹었다.

꼭 마피아 조직의 보스 같은 포즈였다.

“왜? 내 정의에 동의를 못하겠나?”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보다 저를 왜 호출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성질 한 번 급하군. 어련히 설명을 할까.”

“…….”

“오전에 징계 위원회에 다녀왔지.”

징계라는 단어에 준후가 허리를 곧추 세웠다.

역시 무모해 보였던 기관 절개술이 문제였던 걸까.

이대로 메이유에서 쫓겨나는 걸까.

하지만 준후는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부병원장 라인이 자네 행동을 신랄하게 비난하더군. 총을 든 사람에게 맨몸으로 달려들었던 것하며, 도서관에서 기관 절개술을 한 것까지.”

“최선이라고 믿었던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불행하게도 윗대가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단 말이지.”

오스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클리닉은 의외로 과정을 중요시해. 결과가 좋더라도 과정이 나빴다면 그걸 바로 잡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어.”

“그분들은 현장에 없었습니다. 책상머리에서 대체 뭘 보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준후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받아쳤다.

준후가 범인을 제압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총을 보유한 다른 도서관 이용자가 범인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더 큰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기관 절개술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섣불리 나서지 말고 구급팀이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코미디 같은 소리에 불과했다.

환자 이송 시간.

그리고 처치 시간을 계산하면 호흡 곤란으로 환자의 뇌에 비가역적인 대미지가 가해졌을 것이다.

물론 준후도 알긴 했다.

자신의 행동이 용감을 넘어서 경솔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쯤은.

하지만 그게 징계를 받을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훈계면 모를까.

“그래서 저는 클리닉에서 쫓겨나는 겁니까?”

“아니. 자네는 그냥 평소처럼 교육을 받으면 돼.”

“네? 그럼 지금까지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셨습니까?”

뜻밖의 결정에 놀란 준후가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정말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간다고?

“응급의학과 코비 교수를 어떻게 구워삶아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가 자네를 아주 열렬히 지지하더군.”

오스틴이 피식 웃었다.

“부병원 라인하고 혼자서 전쟁을 벌였다니까.”

“사실 학과장님도 도와주신 거 아닙니까?”

“내가? 자네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단 코비 교수님 혼자 힘으로 저를 지켜주실 수 없었을 것 같다는 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준후가 차분하게 설명에 나섰다.

-자네 기관 절개술이 위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나올 거거든. 최악의 경우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수도 있어.

-의사가 아니라 장군을 했어도 될 재목이군. 일단 알고만 있으라고. 나와 ‘그 사람’이 자네를 든든하게 봐줄 테니까.

어제 기숙사로 복귀하면서.

코비의 말을 곱씹어봤는데 준후 편을 들어줄 사람은 오스틴밖에 없었다.

준후 인맥이라고는 오스틴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녀석 쓸데없는 소리를…… 입이 방정맞은 건 여전하군.”

“감사합니다, 학과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할 필요 없어. 딱히 자네를 감싸려는 의도는 없었으니까.”

오스틴이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럼 왜 도와주셨습니까?”

“간단해. 내가 자네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거든. 총을 든 범인에게 달려들지는 못했겠지만 기관 절개술이라면 나라도 할 것 같았지.”

오스틴의 말에서 준후는 느꼈다.

오스틴이 자신과 꼭 닮은 부류라는 것을.

환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불태우는 화끈한 사람이라는 걸.

설마 외국에서 동류를 만날 줄이야.

이런 게 인연이라는 걸까.

“어쨌거나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 자네도 알아둘 필요가 있지. 그리고 앞으로 윗선에서 자네를 더 유심히 지켜볼 거야. 흠집 잡힐 일은 최대한 삼가도록 해.”

“…….”

“그때는 제아무리 나라도 막아줄 수 없을 테니까.”

“네. 학과장님.”

오스틴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오늘 준후의 수술 스케줄이 없었던 건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 일정이 잡혔기 때문이라고.

질문지는 따로 없으니 인터뷰 전에 할 말을 미리 생각해두는 게 좋겠다고.

“아, 참.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군.”

“네. 얼마든지.”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오스틴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어제와 같은 일이 나중에 또 벌어진다면 어떻게 할 건가? 그때는 아까 말한 것처럼 내가 도와줄 수도 없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준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분명 학과장님이 하실 만한 행동을 똑같이 따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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