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366화
제71장 쪽지 시험(1)
이튿날 오전.
레이먼드는 4명의 패거리와 함께 병동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4명이 나란히 걷는 와중에 레이먼드만 두 걸음 정도 앞서서 걷고 있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도형 같았다.
“레이먼드! 같이 가자고. 왜 그렇게 바쁜데? 컨퍼런스도 아직 멀었어.”
“너희들이 빨리 걸으면 되잖아.”
“그거야 그렇긴 한데…….”
레이먼드의 차가운 말투에 앤서니가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적거렸다.
이에 잠자코 있던 러셀이 속삭이듯 앤서니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먼드가 왜 저러는 줄 몰라서 그래?”
“몰라. 알면 그랬겠냐? 그러는 너는 왜인 줄 알고?”
“나야 당연히 알지. 누구랑 다르게.”
러셀의 양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면 말해줘.”
“싫은데?”
“휴~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여간 너는 뭐든지 아는 척해서 탈이라니까. 됐다, 네 말은 안 들을 거야.”
“무시하지 말라고! 진짜 알아. 오늘 쪽지 시험 결과 나오는 날이잖아. 레이먼드가 날카로울 수밖에 없지.”
앤서니는 미끼를 던져 기어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냈다.
하지만 의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해결해야 할 물음표가 하나 더 남았다.
“레이먼드야 어차피 점수도 좋을 텐데 왜 저렇게 결과에 안달이지?”
“준후 때문이지.”
“준후?”
“혼자서 1시간 만에 문제 다 풀고 먼저 나갔잖아.”
“아…… 이제 기억난다.”
앤서니가 손뼉을 쳐가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레이먼드는 준후가 자기보다 쪽지시험 결과가 좋을 것 같아서 불안하다는 뜻이구나. 원래 1등만 하던 친구였으니까.”
앤서니가 정리를 하자 러셀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차라리 준후 성적이 더 좋았으면 좋겠어.”
“쉿! 레이먼드 들을라.”
앤서니의 폭탄선언에 러셀이 화들짝 놀랐다.
러셀은 앞서 걷는 레이먼드의 눈치를 보더니 앤서니에게 입 조심하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얘가 못하는 말이 없네?”
“내가 틀린 말 했어? 성격도 좋지, 성적도 좋지. 무엇보다 사람이 됐잖아. 도서관에서 환자들 구한 거 기억 안 나?”
“그래도 레이먼드랑 같이 다니는 게 무조건 더 이득이야. 누구랑 더 오래 일할지 생각해 보라고.”
“알긴 아는데 솔직히 레이먼드 성질머리 맞춰주는 거 짜증나잖아.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앤서니가 레이먼드의 등짝을 흘겨보았다.
레이먼드는 항상 거만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었다. 말로만 친구지 같이 다니는 일행은 사실상 레이먼드의 수족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일까.
앤서니는 요즘 레이먼드가 준후에게 깨지는 모습을 룰루랄라 즐기고 있었다.
소심한 반항이랄까.
잡담을 나누며 도착한 곳은 컨퍼런스 룸 옆 게시판이었다.
게시판 앞에는 벌써 서너 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다.
게시판에는 수술 일정, 학과 일정, 세미나 일정 등등이 붙어 있었는데 개중 눈에 띠는 게시물이 존재했다.
바로 며칠 전 치른 쪽지 시험 결과였다.
앤서니는 긴장한 얼굴로 게시물에 가장 하단부터 훑으며 올라갔다.
“그래도 다들 기본은 하나 보네. 탈락한 사람은 없다.”
앤서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쪽지 시험 커트라인은 60점.
하지만 60점 아래인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앤서니도 63점으로 간신히 과락을 면했다.
안전함을 느낀 앤서니가 좀 더 고개를 들었다. 성적표의 허리부분을 지나 머리 부분을 살폈다.
1등부터 5등 구간을 확인하는 앤서니의 눈이 커졌다.
“뭐야? 뚜껑 열어보니까 별거 없잖아?”
“난 레이먼드가 잘해낼 줄 알았어. 메이유 레지던트 수석이잖아. 준후 따위랑은 비교도 할 수 없지.”
동료 몇 명이 레이먼드 곁으로 다가가 달달한 아부를 시작했다.
이번 쪽지 시험에 1등은 바로…….
레이먼드였다.
그런데 아랫배가 찌르르 아픈 건 왜일까.
“앤서니.”
레이먼드가 팔짱을 낀 채 앤서니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응? 왜?”
긴장한 앤서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기대에 부응 못해서 미안하다. 1등이 준후가 아니라 나라서.”
앤서니는 차마 대꾸를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까 러셀과 한 이야기를 다 들었던 모양이었다.
레이먼드의 비꼬는 말에 앤서니도 속이 불편하게 꼬였다.
저 뒤끝 있는 놈한테 찍히고 말았다.
당분간 편하게 지내기는 글렀다.
* * *
“야, 시험 성적 벌써 나왔나 보다. 오후는 되어야 나올 줄 알았는데.”
맥스웰이 게시판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쪽에 교육생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과락만 면했으면 좋겠는데.”
“나도 그 이상은 안 바란다.”
맥스웰의 말에 올리버가 맞장구를 쳤다.
초조해 하는 두 사람과 달리 준후는 여유가 넘쳤다.
쪽지 시험 당시.
준후는 1시간 만에 모든 문제를 풀고 컨퍼런스 룸을 나왔다.
주변에서 시험을 포기한 거 아니냐는 의심이 쏟아졌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다 아는 문제라서 빨리 풀었을 따름이었다.
“준후는 오늘도 자신감이 넘치는구만.”
“좀 재수 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험 잘 쳤거든.”
“재수 없는 거 맞네.”
맥스웰이 양 손으로 쇄지공을 수련하며 대답했다.
쇄지공.
엄지에 나머지 손가락을 차례대로 붙였다가 떼는 단련법 말이다.
맥스웰이 시도 때도 없이 쇄지공을 익혔으므로 최근 주변 사람들은 맥스웰을 ‘크레이지 핑거’라 부르고는 했다.
준후 일행이 복도를 가로질러 게시판에 도착했다.
레이먼드가 인사도 없이 준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의 눈빛에서 거만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기분 좋은 일 있나 봐?”
“물론이지. 누구한테 주제 파악을 시켜줄 수 있게 됐거든.”
“네 이야기야?”
“아니. 너.”
레이먼드가 턱 짓으로 게시판에 붙은 성적표를 가리켰다.
당연히 준후는 1등부터 살폈다.
그런데 웬걸?
예상치 못한 이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레이먼드 83점.
1등은 준후가 아니라 레이먼드였다.
황당해서 눈을 비비고 다시 성적을 살폈지만 변한 건 없었다.
“까불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넌 내 발 밑이니까.”
레이먼드가 비웃음을 날린 뒤 일행과 자리를 떠났다.
그때까지도 준후는 충격을 받아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준후의 풀이는 완벽했다.
교재를 달달 외워서 적어냈고 일부 문제는 최신 수술 트렌드를 반영하기도 했다.
물구나무를 서서 보든.
뒤구르기를 하면서 보든.
준후는 반드시 만점을 받았어야 했다.
“왜 이렇게 충격을 받았어? 3등이면 엄청 잘한 거 아닌가? 문제도 혼자서 1시간 만에 풀고 나왔잖아.”
맥스웰이 위로하듯 준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나저나 올리버, 난 너한테 실망했다.”
맥스웰의 시선이 올리버에게 옮겨졌다.
맥스웰과 눈을 마주친 올리버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제대로 설명해 보실까?”
맥스웰이 검지로 성적표를 가리켰다. 놀랍게도 쪽지 시험 2등이 올리버였다.
“공부를 못했다는 둥, 큰 실수를 했다는 둥, 시간이 모자랐다는 둥. 아주 쌩쇼를 하더니 2등을 해버렸네?”
“우…… 운이 좋았나?”
“시험 문제가 어디 운으로 풀 수 있는 거냐? 내 주먹에 다운당하고 싶어?”
배신감을 느낀 맥스웰이 허공에 붕붕 주먹질을 했다.
“진정해. 준후가 마사지를 해준 덕분에 실력보다 잘 본 거야. 근데 준후 괜찮아?”
올리버도 뒤늦게 준후를 걱정했다.
준후가 평소와 달리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어.”
“아직 정신 못 차렸나 본데?”
“너희 둘이 먼저 컨퍼런스 룸에 가 있어. 난 성적 처리에 대해서 물어보고 올게.”
준후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복도 끝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메이유 클리닉에서는 각 과마다 환자 관리. 의사관리를 전문적으로 사무실이 따로 있었다.
* * *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는 거침없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직원 베벌리가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베벌리.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응? 뭔데?”
“쪽지 시험 채점, 제대로 된 것 맞나요?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준후가 흥분한 목소리로 따졌다.
채점에 실수가 있었거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외압이 있지 않고서는 성적이 저렇게 나올 수가 없었다.
준후는 반드시 1등이어야 했다.
“답안지대로 채점한 건데? 누구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했어.”
베벌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사무 업무를 보고는 있지만 베벌리도 엄연히 의사 면허를 가진 의사였다.
이비인후과 출신에 연구원으로 잠시 연구에서 손을 떼고 휴식기를 가지는 중이었다.
“채점이 잘못 됐을 가능성은 없나요?”
“없어.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봤거든. 너 성적이 마음에 안 드는구나?”
준후의 속내를 파악한 베벌리가 피식 웃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제 점수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낮아요.”
준후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객관식 문제는 여러 번 답을 확인했고.
주관식 문제는 특성 상 실수를 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오류나 문제가 있다면 바로 잡아야 했다.
“준후. 잠깐 내 이야기 좀 들어 봐.”
“무슨 이야기요?”
“난 말이야 네 심정 충분히 이해해. 당장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네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
“하지만 부스트 업 프로그램은 잘난 사람 중에서 더 잘난 사람들을 모아놓은 곳이야. 거기서도 최고가 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
베벌리가 아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준후가 자존심 때문에 시험 결과를 못 받아들인다고 착각한 듯 했다.
하지만 준후는 그게 아니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건 준후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건 레이먼드처럼 자기애가 강한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펼치는 방어막이었다.
준후는 열려 있었다.
방어막 따위는 치지 않았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그들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하는 게 준후였다.
그래서 지금 준후가 원하는 건 단지 진실이었다.
만점이야 할 성적이 왜 77점으로 떨어졌는지 밝히는 것이었다.
연기를 잘하는 거야?
아니면 진심인 거야?
베벌리의 위로 아닌 위로를 들으며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험 성적이 잘못됐다면 범인은 베벌리일 확률이 높았다.
채점을 한 사람이 베벌리였으니까 말이다.
점수가 조작된 이유.
그것을 짐작하자면 베벌리가 레이먼드와 친하거나 아니면 인종 차별을 하는 부류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왜일까.
베벌리가 딱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사건은 점점 안개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3등도 충분히 잘한 거야.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라고.”
“아뇨. 전 1등이 맞아요.”
“하…… 답답하게 구네.”
베벌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메이유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커닝도 안 되고 시험 성적도 철저히 관리한단 말이지.”
“…….”
“생떼 그만 부리고 제발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패배의식에 찌들어 살래?”
베벌리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준후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정말 찌질한 인간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다.
무엇보다 바를 정(正)자를 쓰는 정파인으로 몸담았던 만큼 이런 부조리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베벌리가 뭐라고 해도 전 순순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그럼 뭘 어쩔 건데?”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 방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