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367화
제71장 쪽지 시험(2)
준후는 절충안을 말하고 팔짱을 꼈다.
베벌리는 그런 준후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걸 들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두 갈래로 나뉜 길 중 어느 곳을 선택해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럼 작성한 답안지를 보여주세요. 그걸 확인하면 별말 없이 물러나겠습니다.
방금 준후가 했던 제안이 귓가에 메아리로 울렸다.
솔직히 답안지를 보여주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답안지는 책상 서랍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 쉬운 일이 선뜻 끌리지 않는 이유는.
한편 심사가 뒤틀려 있는 건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준후는 베벌리가 고의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는 의심까지 하고 있었다.
답안지를 보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단 말인가.
그리고 답안지만 보여주면 서로 답답하게 실랑이를 할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설마 답안지를 바꿔치기 했나?
아니면 적당히 조작한 후 없애 버렸나?
한 번 생겨난 의심이 바이러스처럼 급속도로 증식해 나갔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숨기는 거라도 있나 보죠?”
준후가 베벌리를 슬쩍 찔렀다.
“숨기는 거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죠. 그 의미가 뭔지는 누구보다 베벌리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난 그딴 거 몰라.”
베벌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답안지를 보여 달라는 제안은 거절하지.”
“저랑 계속 싸우자는 겁니까?”
준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넌 지금 메이유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어. 클리닉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고.”
“…….”
“이런 식으로 클리닉 업무에 일일이 꼬투리를 잡으면 될 일도 안 돼.”
“…….”
“음모론을 좋아하나 본데. 그건 사무실 말고 엑스 파일 애독자들한테 가서 하라고.”
베벌리가 준후를 신랄하게 까댔다. 순간 준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시험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게 왜 음모론이란 말인가.
내가 아니라 나와 꼭 닮은 외계인이 시험을 쳤다. 그래서 시험을 다시 봐야겠다.
……라고 준후가 주장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쯤 되면 베벌리가 이번 시험을 조작한 범인이라고 확신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상세한 방법과 이유는 차차 밝혀야 할 숙제일 것이다.
“답안지 보여주기 전까지는 사무실에서 안 나갈 겁니다.”
“너 정말 일 크게 만들 거야?”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제가 아니라 베벌리 당신이라고요.”
“하…… 계속 무례하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래. 어디 사무실에 계속 붙어 있어봐. 내가 답안지를 주는지.”
“걱정 말아요. 안 주면 천년만년 기다려서라도 괴롭혀줄 테니까.”
두 사람 다 언성을 높였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사무실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벌컥!
때마침 문이 열리고 제2교수 헥터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헥터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혀를 찼다.
“뭐야? 당장 주먹다툼이라도 할 분위기인데? 대체 왜 그래?”
“준후가 생떼를 부리고 있습니다.”
“베벌리가 답안지를 안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자기 할 말만 했다.
어리둥절해 하던 헥터는 이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로 들어보고 턱을 쓸어내렸다.
헥터가 판단하기에는 두 사람의 말 모두 일리가 있었다.
베벌리 입장에서 보면 메이유의 시스템을 못 믿는 준후가 못 마땅했을 테고.
준후 입장에서 보면 시험 결과가 잘못 나온 것 같은데 확인을 안 시켜주니 답답했을 테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말입니까?”
“일단 준후한테 시험지를 보여줘.”
“안 됩니다. 이런 거 일일이 받아주면 버릇됩니다. 자기 맘대로 안 되면 무조건 오늘처럼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 텐데요.”
베벌리가 따지듯 말했다.
“준후.”
헥터가 베벌리의 항의에 대꾸하지 않고 준후를 쳐다보았다.
“네. 교수님.”
“답안지를 보여줬는데 아무 이상 없으면 앞으로 이런 일로 사무실 찾아오면 안 된다. 어때?”
“문제만 없다면 사무실 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도 자신만만한데?”
“전 잘못한 게 없으니까요.”
결국 제3자인 헥터에 최종 중재안이 통과되었다.
베벌리는 못 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랍장에 있던 준후의 답안지를 꺼내 준후에게 건넸다.
‘드디어 무죄를 증명할 수 있겠구나. 베벌리, 당신 큰 실수한 거야. 난 그렇게 만만한 인간이 아니라고.’
준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답안지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답안지를 훑는 준후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고개는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어라?
분명 내 답안지가 맞는데?
왜 만점이 안 나왔지?
두 번째 충격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준후를 덮쳤다.
* * *
‘그럴 줄 알았지. 하여간 의심은 많아 가지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준후의 표정을 읽으며 베벌리는 고소하다는 미소를 머금었다.
베벌리는 시험문제를 조작한 적이 없었다.
조작할 생각조차 없었다.
어차피 연구를 쉬는 동안 임시로 맡은 사무직이었다.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었고.
잘 보일 사람도 없었다.
준후는 그저 본인 기대한 만큼 성적이 안 나오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결국 준후의 입에서 얼빠진 혼잣말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는 베벌리의 명백한 승전보였다.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채점에 문제는 없었다고. 설마 네가 네 답안지로 장난쳤다고 생각한 거야?”
“…….”
“음모론자 맞네. 크크크.”
베벌리의 도발에도 준후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버럭버럭 대들던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헥터가 베벌리를 응시했다. 베벌리의 판정승을 인정하는 눈빛이었다.
“준후. 답안지에 문제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
헥터의 질문에 준후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그런데 답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참 나. 이 친구, 선 넘네. 답안지 핑계가 안 먹히니까 이제 해답에 태클을 달겠다?”
베벌리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적당히 해. 준후. 더 이상 학과를 모욕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
헥터가 얼굴을 찌푸리며 준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준후는 눈썹 한 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교수님. 드디어 알았습니다. 베벌리와 제가 왜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오해? 오해는 준후 너 혼자 하고 있었겠지.”
“마지막으로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아니, 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줬어. 그리고 그 기회를 발로 차버린 건 너야.”
헥터는 내심 준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다소 무모함 감은 있었지만.
핍지 교종 수술을 완벽하게 집도했으며 교육 태도 또한 모범이 될 정도로 훌륭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준후를 향한 기대감과 신뢰도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쳐버렸다.
시험 성적이 뜻대로 안 나왔으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확인 결과 문제가 없다면 그걸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억지를 두 번이나 받아줄 만큼 헥터는 나긋나긋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 말이 다 핑계로 들리시나 보군요.”
“지금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겠지.”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딱 한마디만 더 보태겠습니다. 그 말에 문제가 있다면 제가 제 발로 메이유를 나가겠습니다. 이 정도 패널티를 걸면 제 말을 들어주실 건가요?”
준후의 선언이 폭탄으로 사무실에서 떨어졌다.
베벌리도 경악하고 헥터도 경악했다.
배짱도 이런 배짱이 없었다.
“기분에 휩쓸려서 경솔하게 굴지 마. 넌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여기서 제일 침착한 사람은 저 같은데요?”
준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설령 메이유를 떠난다고 해도 제 주관은 지키고 싶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주시죠.”
“센 척하는 거라면 당장 그만 둬. 계속 이러면 난 진짜 네 교육을 취소할 작정이니까.”
“저도 진짜 떠날 각오로 말하는 겁니다.”
준후와 헥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후진이나 커브를 모르는 오로지 직진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좋아. 네가 교육까지 걸었다면 이야기를 안 들어줄 이유가 없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말을 하기에 앞서 준후는 깊게 숨을 골랐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줄이야.’
준후와 베벌리가 서로를 오해한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이었다.
진실은 깨달은 지금은 이 상황이 그저 우스울 따름인 준후였다.
준후가 헥터에게 답안지를 내밀었다.
“일단 답안지부터 봐주세요. 모야모야병 수술에 관한 3번 주관식 문제입니다.”
헥터는 입을 다문 채 묵묵하게 답안지를 훑었다.
베벌리가 혹시 자신이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초조해하는 반면.
준후는 여전히 태연했다.
애초에 누구도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잘못을 만들어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 뭐야? 이런 거였어?”
헥터가 고개를 들어 준후를 바라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전공 교수답게 이해가 빨랐다.
“혹시 다른 문제도 다 이런 식으로 틀렸던 거니?”
“네.”
“이거 우리 꼴이 우습게 됐는걸?”
헥터는 준후의 오답만을 골라서 읽다가 베벌리에게 다가가 준후의 답안지를 내밀었다.
“준후, 만점 처리하세요.”
“네? 갑자기요?”
놀란 베벌리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했다.
“안심해요. 베벌리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 실수는 부르스가 했어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세요.”
“쉽게 설명을 드리면 답안지도, 채점에도 문제가 없었어요. 해답지에 문제가 있었지.”
준후의 설명이 이어졌다.
쪽지 시험에서 준후는 교재에 있는 내용에 최신 논문 내용을 덧붙였다.
소아 모야모야병을 예로 들면.
최근 소아 모야모야병 수술에서는 중대뇌동맥 재관류 수술뿐만 아니라 전대뇌동맥 재관류 수술도 한다는 답을 적었다.
소아 모야모야병 환자의 경우 IQ는 정상이지만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져 전대뇌동맥에도 재관류 수술을 하는 게 트렌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답들은 전부 오답 처리를 받았다.
해답지에 최신 수술 트렌드가 반영이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베벌리야 해답대로 채점을 했으니 죄가 없었고.
“정말 오해가 있었구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헥터가 민망한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가 교수님이라도 제가 괘씸해 보였을 겁니다. 누가 봐도 성적을 인정 못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뭐,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만. 하여간 부르스 녀석이 해답지를 고지식하게 적는 바람에 애꿎은 너랑 베벌리가 싸웠구나. 부르스랑은 내가 다시 이야기 해보마.”
“네. 교수님.”
“그런 그렇고 준후 너, 최신 집도 트레드도 빠삭한 걸? 따로 공부했니?”
“틈틈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준후는 ‘뇌신경 점혈 자극술’로 교재를 이미 독파했고 최근 논문까지 살피는 중이었다.
의술이란 진화하고 발전하는 생물과 같았다.
쫓아가지 못하면 뒤쳐질 뿐이었다.
“마스터 칭호를 받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죠.”
준후는 당당하게 포부를 밝혔다.
7개의 신경외과 세부 전공을 졸업할 때마다 받는 마스터 칭호.
준후는 모든 과에서 마스터 칭호를 획득해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문제의 부르스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뭐야? 준후 넌 컨퍼런스 룸에 안 있고 왜 여기 있어?”
“너 때문이잖아! 너 때문에!”
성질이 난 헥터가 부르스를 향해 검지를 까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