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368화
제71장 쪽지 시험(3)
“뭐? 그게 사실이야?”
“왜?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헥터의 설명을 다 듣고서 브루스가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준후가 그 잘난 교육생 중에서도 특별히 잘났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격차가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방금 들은 걸 정리해 볼게.”
“얼마든지.”
“그러니까 준후가 일주일 만에 교재 200페이지를 공부한 것도 모자라서 최신 수술 트렌드까지 파악해서 적었다는 거 아니야.”
“바로 그 말이야. 그리고 네가 해답지를 제대로 작성했다면 오늘 같은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테고.”
헥터가 브루스를 꾸짖듯이 말했다.
불안전한 해답지 때문에 준후와 베벌리만 피를 봤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웃기지 마. 나도 피해자거든?”
놀란 감정을 추스른 브루스가 차분하게 말았다.
그는 스스로를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이야, 얼굴에 철판 제대로 깔았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돼?”
“사태 파악이라면 충분히 했어.”
“했는데 어떻게 오리발을 내밀 수 있어?”
“입장 바꿔보자. 네가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 건데?”
브루스가 역으로 헥터에게 물었다.
말뜻을 제대로 이해 못했는지 헥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나였어도 최신 수술 경향까지 해답지에 적었을까? 학생들은 교재 공부도 힘들어했어.”
“…….”
“그런 상황에서 최신 논문을 읽고 그걸 답으로 적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냐고.”
브루스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브루스의 해답지 작성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교재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단지 준후가 돌연변이라서 문제가 생겼을 뿐이었다.
준후의 해답은 교재 바깥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하긴 듣고 보니 네 심정도 이해가 간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손기술에 재능이 쏠린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공부에도 소질이 있네. 준후 녀석.”
“핍지 교종 때로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헥터의 말을 받은 브루스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보통 내기가 아니야. 학과장님이 왜 주목하는지 알겠어.”
“그러게. 이런 괴물은 나도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헥터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오늘부터 ‘그거’ 시작이지?”
“맞아.”
“‘그것’도 잘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것’까지 극복하면 준후는 진짜 완전체 서전이 될지도 모르겠어.”
“그럼 네가 오늘 준후 맡아. 내가 특별히 양보한다.”
“특별히가 아니라 당연히라고. 생사람 잡아 놓고 입 싹 닿으려고 했어?”
말을 마친 브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터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컨퍼런스 룸으로 돌아갔다.
쪽지 시험 문제로 잡음이 있었던 터라.
컨퍼런스 시작 시작이 평소보다 15분 정도 늦었다.
교육생 일부가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컨퍼런스 시작 전에 중요한 공지 사항이 있다.”
“…….”
“오전에 게시했던 쪽지 시험 결과에 일부 오류가 있었다. 정정된 성적을 발표하지.”
교육생들을 훑던 브루스의 눈빛이 준후에게 고정되었다.
“쪽지 시험 1등은 준후다. 준후가 유일하게 만점을 받았어.”
* * *
“대박! 뭐야? 준후 네가 1등이었어? 그것도 만점?”
“어쩐지 아까 표정이 안 좋더니만. 성적이 잘못 나와서 그랬구나.”
맥스웰과 올리버가 준후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1등 탈환을 축하해 주기도 했다.
준후는 적당히 대꾸했다.
골치 아픈 사건이 터졌지만 나름 잘 수습하고 성적도 되찾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후는 새삼 얻었다.
만약 성적이 마음에 안 들었어도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누구도 준후를 변호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준후의 억울함과 진실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채 사건의 저편에 묻혔을 것이다.
아닌 건 아닌 거고.
법정이 아닌 이상, 자신을 변호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되어야 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입을 털어서 시험 성적을 바꿀 수 있다고?”
등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레이먼드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난 되던데? 궁금하면 너도 한번 시도해 봐.”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다.”
레이먼드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패거리와 컨퍼런스 룸을 빠져 나갔다.
“저거 저거 또 열등감 폭발했네. 저게 사람이야? 아니면 화산이야?”
맥스웰이 빈정거렸다.
“엘리트 의식 있는 사람은 남한테 뒤처지는 거 못 참아. 레이먼드처럼 레지던트 내내 수석하던 애라면 더 그렇겠지.”
올리버가 한마디 보탰다.
올리버는 메이유 출신이라서 레이먼드의 성격을 잘 알았다.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남보다 잘나고 싶다는 거. 그거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게 의미가 있나?”
“쟤한테는 의미가 있나 보지.”
올리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준후가 친구들의 잡담을 듣고 있는데.
잠깐 컨퍼런스 룸을 나갔던 부르스가 돌아와 단상 앞에 섰다.
다른 교육생이 다 빠져 나가면서.
컨퍼런스 룸에는 준후 일행과 부르스만 있었다.
“교수님. 저희들만 따로 남긴 이유가 있나요?”
맥스웰이 살짝 손을 들고 질문했다.
컨퍼런스 말미에 부르스는 준후 일행만 콕 찍어서 남아 있으라고 당부했다.
“물론이지. 오늘부터 재밌는 수업이 하나 추가되거든.”
“그게 뭔가요?”
“뭐일 것 같아? 너희들이 직접 맞춰 봐.”
부르스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셋 중 누구도 대답을 못했다.
부스트 업 교육 과정은 워낙 독특하고 변칙이 많았다. 예상을 한다고 해도 예상이 맞아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감이 안 오는 모양이구나. 그럼 설명을 해줘야지.”
준후 일행을 훑던 부르스가 빔 프로젝터로 뇌혈관 조영술 영상을 띄웠다.
환자의 중대뇌동맥에 위치한 뇌혈관들이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희뿌옜다.
목에서 시작되는 내경동맥이 진한 검은 빛을 띠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우선 이 환자의 질병명을 맞춰 봐.”
“모야모야병입니다.”
준후가 단박에 대답했다.
모야모야병은 혈관이 좁아지거나 혈관에 피가 통하지 않아서 생기는 질환으로 CT나 MRI 영상만 판독해도 쉽게 진단할 수 있었다.
영상에서 드러나는 특징이 워낙 뚜렷하기 때문이다.
“맞아. 이 환자는 12세고 3시간 뒤에 재관류 수술이 예정되어 있지.”
부르스가 팔짱을 낀 채 말을 계속했다.
“이 환자를 너희‘들’이 집도한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팀 수술 미션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부르스의 선언이 메아리처럼 컨퍼런스 룸에 퍼졌다.
준후도, 맥스웰도, 올리버도.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꼭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팀 수술이라…….’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팀 수술 자체는 사실 색다를 게 없었다.
애초에 수술을 혼자 할 수 없는데다가 호흡이 잘 맞는 팀을 꾸려야 수술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팀원 구성이었다.
준후와 맥스웰, 올리버.
이 셋은 이제 막 소아 신경외과 파트에 걸음마를 뗀 단계였다.
각자 집도는 3차례 해봤지만.
서로 역할을 분담하고 궁합을 맞춰본 적은 없었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초보 파티가 레이드 사냥을 나가는 꼴이었다.
“교수님이 수술방에 들어오시나요?”
준후가 물었다.
“아니. 수술은 너희 셋만의 힘으로 진행한다.”
“그럼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잠자코 있던 맥스웰이 물었다.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수술은 없어. 그리고 처음은 원래 더 위험해.”
“…….”
“어린 새가 둥지를 떠나 날갯짓을 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어떤 녀석은 비행에 성공해서 둥지를 떠나겠지만, 어떤 녀석은 겁먹은 나머지 날갯짓을 못해서 추락하며 죽고 말겠지.”
부르스의 목소리가 제법 비장했다.
어린 새를 둥지 바깥으로 억지로 떠미는 어미 새처럼.
준후도 부르스의 비유에 동의했다.
처음은 언제나 두렵고 떨린다.
일반직이 아닌 환자의 목숨을 다루는 서전이라면 그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에서 메스를 놓을 수는 없었다.
물을 두려워하면 수영선수가 될 수 없고. 축구공을 무서워하면 축구선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수술방에 들어가진 않지만 참관은 할 거야. 나도 참관을 할 거고 팀 수술의 첫 집도는 학과장님도 참관하신다.”
“…….”
“제3자는 여기서 빠지지. 그럼 행운을 빈다.”
부르스가 떠나면서 컨퍼런스 룸이 더 휑해졌다. 묵직한 공기가 준후 일행을 짓눌렀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3시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 * *
준후 일행은 우선 차트와 검사 영상을 살피며 치료 계획부터 세웠다.
환자의 이름은 맥시인데.
모야모야병의 진행 정도가 일반적인 케이스보다 심각했다.
보통 환자의 경우.
허헐된 혈관 면적이 손바닥 절반 정도 크기라면, 맥시의 허혈된 혈관 면적은 손바닥 전체 크기였다.
무려 2배에 육박했다.
그래서 MRI를 보고 있으면 환자의 뇌에 안개 숲이 깔린 것 같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환자의 뇌에 집어 넣어놓은 듯했다.
“이거, 엿 먹으라고 작정한 것 같은데? 처음부터 너무 어렵잖아.”
맥스웰이 MRI 영상을 살피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준후가 있어서 일부러 어려운 수술을 준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핍지 교종 수술도 해냈으니까 밸런스를 맞춘다고 그랬을지도.”
올리버와 맥스웰이 수술 난이도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앓는 소리 그만하고 수술 방향부터 확정하자. 시간이 많지 않아.”
준후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로 벌써 황금 같은 30분을 까먹었다.
“재관류 수술 어떻게 할 거야? 직접 아니면 간접?”
“당연한 걸 뭐 하러 물어? 당연히 간접이지. 소아 모야모야병 수술은 간접이 원칙인데.”
간접 수술이란.
비정상 혈관에 정상 혈관을 연결해 주는 대신 혈관이 자라날 수 있도록 비정상혈관 주변에 세포와 신경들을 이식해 주는 수술이었다.
이를 테면 씨앗을 심는 수술이었다.
아이들은 몸뿐만 아니라 뇌혈관도 빠르게 성장했다.
그래서 성장할 혈관 세포를 씨처럼 뿌려두면 그 씨앗이 자라 허헐된 혈관을 대체하게 된다.
“간접 수술도 좋은데 간접 수술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인데?”
올리버의 지적에 맥스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혈된 혈관 면적이 너무 넓어. 이식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어. 내가 봤을 때는 직접 수술도 병행해야 돼.”
직접 수술은 정상 혈관과 비정상 활관을 직접 연결해 주는 수술이었다.
소아보다는 성인에게 주로 사용되며.
간접 수술에 비해 난이도와 위험성이 높았다.
단 혈류 개통 효과가 뚜렷하고 빠르다는 장점도 있었다.
“우리 수준에서 직접 수술은 오버야. 봉합하다가 혈관 터지면 감당 못 해.”
“위험한 건 아는데 간접 수술만 하면 환자가 여러 번 재수술을 받아야할 수도 있어. 그것도 문제라고.”
올리버와 맥스웰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안전하지만 기대 효과가 다소 낮은 수술 VS 위험하지만 기대 효과가 다소 높은 수술.
수술 계획에 두 사람의 평소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다.
성격 차이에 답이 없듯.
수술 방향에 관해서도 정답은 없었다.
“일대일이면 준후가 선택하는 쪽으로 진행하자. 그럼 너도 불만 없지?”
“좋아. 그렇게 하자.”
입을 맞춘 올리버와 맥스웰의 시선이 동시에 준후에게 쏠렸다.
두 사람의 시선을 눈빛을 의식한 준후가 입을 뗐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