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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71화 (368/424)

371화

제72장 믿음(1)

준후의 말은 분명 고맙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올리버는 그 말에 큰 울림은 받지 못했다.

응원은 어디까지나 응원일 뿐.

없는 힘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후반전에 경기는 3분 남은 시점이고 6-1로 팀이 지고 있다면 패배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 지고 있는 팀이 역전을 꿈꾸며 힘을 낼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주변에서 격려해 준다고 해서 할 수 없는 일을 갑자기 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올리버가 보기에…….

자신의 한계는 딱 여기까지였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본인의 실력을 증명하겠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불순하고 바보 같았던 건 아닐까.

그래서 하늘이 벌을 내린 건 아닐까.

올리버는 조심스럽게.

손에 쥐고 있던 니들홀더와 포셉을 드레싱 카트에 위에 내려놓았다.

참관실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오스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을 모습은 선명하게 그려졌다.

“수술 도구는 왜 내려놓는데?”

“아무래도 준후 네가 집도하는 게 최선인 것 같다. 엑스트라는 여기서 빠져야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너도, 환자도.”

올리버의 좌절이 답답했는지 준후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네가 할 수 없는 집도였으면 처음부터 내가 맡아서 했을 거야. 이해가 안 가?”

“네가 날 과대평가한 거지. 그래도 고맙다. 덕분에 여기까지 와서.”

짧은 대화가 끝나고 긴 정적이 흘렀다.

삐이이. 삐이이.

환자 감시 장치에서 흐르는 기계음만 규칙적으로 번져 나갔다.

침묵의 덩치가 커지면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준후가 고개를 들며 올리버를 쳐다보았다.

이제 슬슬 집도할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

그런데 왜일까.

준후의 눈동자가 한 순간 호수처럼 파란 빛을 띤 것처럼 보인 것은.

준후와 눈을 마주친 순간.

다양한 생각들과 감정들이 올리버의 머리와 가슴에 밀물로 쏟아지는 것은.

이 자리를 피하고 도망치는 걸로 정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

그걸로 난 정말 만족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내 목표는 뭐였지?

맞아.

아버지만큼 훌륭한 서전이 되는 거였어. 그래서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거였어.

만약 목표에 진심이라면.

만약 목표를 꼭 이루고 싶다면, 여기서 등을 보여선 안 돼.

세상에 싸우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한 번 싸워 보자.

설령 수술을 망친다고 해도 부딪치고 깨지자.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멋있는 게 아니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사람이 멋있는 거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올리버는 자신의 몸과 가슴을 지배하고 있던 어둠이 물러가는 것을 느꼈다.

잠깐 파란 빛을 띠었던 준후의 눈과 마주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았다.

올리버는 내려놓았던 니들홀더와 포셉을 다시 쥐었다.

“정말 괜찮겠어? 멘탈이 이미 많이 나간 것 같은데?”

맥스웰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다행히 외출했던 멘탈이 방금 돌아왔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

“맥스웰.”

“어. 왜?”

“네가 날 못 믿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끝까지 잘 도와주라. 난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

“고맙다. 그리고 준후.”

올리버의 시선이 준후에게 머물렀다.

준후의 눈동자는 다시 검정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약속 꼭 지켜. 나랑 환자를 지켜주는 거야. 난 너만 믿고 달린다?”

준후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재관류 수술 다시 시작합니다.”

올리버의 목소리가 수술방에 청명하게 퍼져 나갔다.

* * *

‘결국 여기까지인가?’

참관실에서 올리버의 수술을 지켜보던 오스틴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번 수술은 올리버의 수준에서 간당간당하게 감당할 만했다.

직접 수술이 어렵긴 하지만.

환자의 나이가 12세였다.

소아 중에서도 비교적 나이가 차서 뇌혈관이 꽤 굵고 탄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올리버의 결정적인 단점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올리버의 결정적인 단점.

그것은 자신의 앞에서 유독 힘을 못 쓰는 것이었다.

동경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100퍼센트 발휘하기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증명에 대한 묵직한 부담감 때문에.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그 힘 때문에 손이 둔해지기 마련이었다.

올리버 딴에는 자기 단점을 알고 극복해 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가상한 노력도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나 싶었다.

오스틴은 그런 아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수술을 속행하려나 봅니다.”

“그래?”

상념에서 퍼뜩 깨어난 오스틴이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런데 웬걸?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도 집도의 위치에는 여전히 올리버가 서 있었다.

‘뭐야? 그대로 간다고?’

얼굴을 찌푸린 오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관실 정면 창에 위치한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에 놓여 있는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집도의 교체, 안 하나?”

-네. 교수님. 이대로 쭉 진행합니다.

전화를 받은 준후가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은 요골 동맥은 하나 뿐이야. 그런데 심지어 수술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어. 집도는 준후 자네가 하는 게 맞아.”

-아니요. 올리버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망친 혈관을 보고도 그런 태평한 소리가 나오나?”

오스틴이 얼굴을 찌푸렸다.

피할 수 없는 재앙이라면 모를까 피할 수 있는 재앙이라면 피해야 했다.

준후가 집도를 맡는다면 파국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 수술에 실패한다.

올리버는 수술 트라우마에 걸리고, 보호자에게 의료 소송까지 당한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오스틴은 벌써 지옥에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계속 실패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환자의 목숨이 여러 개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환자도, 올리버도 문제없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자신감도 과하면 만용이야.”

-사람을 살리는 만용이라면 얼마든지 환영 아닐까요?

“자네는 어째 학과장 앞에서도 어째 한마디도 안 지는 군.”

오스틴이 쓰게 웃었다.

젊었을 때의 오스틴도 준후만큼 배짱이 있지는 않았다.

“자네는 대체 왜 그렇게 올리버를 신용하지? 올리버에 대해서 뭘 안다고?”

오스틴이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준후는 환자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그런 준후라면 올리버 대신 본인이 집도를 하겠다고 나서야 하는 거 아닐까.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

-믿음의 힘이 얼마나 큰지 직접 보여드리죠.”

준후가 먼저 통화를 끊었고.

오스틴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고막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준후의 마지막 말을 음미했다.

넌 대체 무슨 생각이니.

* * *

수술실 입구 벽에 걸려 있던 전화기를 내려놓고서 준후가 수술대로 복귀했다.

“학과장님이 뭐라고 하셔?”

올리버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냥 열심히 잘 해보라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절대 그런 말을 할 양반이 아닌데?”

“수술 끝나면 직접 물어보던가.”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수술 계속 하자. 어영부영 10분이나 까먹었다.”

“오케이.”

직접 재관류 수술의 2막이 올랐다.

준후는 양손에 쥔 포셉으로 문합해야 할 두 개의 혈관을 단단히 고정했다.

양수호박기술.

10성을 달성한 호월십이수.

이 두 가지 덕분에 준후의 손은 떨림이 없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으므로.

포셉도 떨리지 않았고.

포셉이 떨리지 않았으므로 혈관도 떨리지 않았다.

준후의 손끝에서 집도의가 문합하기 좋은 최상의 환경이 만들어졌다.

딸칵!

올리버가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잡은 후 운침을 시작했다.

낚시 바늘처럼 구부러진 봉합침이 혈관을 꿰뚫었다.

시작이 좋았다.

바늘의 깊이가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았다.

혈관을 통과한 바늘이 이식 혈관으로도 파고들었다.

올리버가 봉합사를 잡아당기자 두 혈관 사이에 팽팽한 장력이 발생했다.

이윽고 올리버의 왼손이 허공에서 화려하게 움직였다.

봉합 매듭을 짓는 동작이었다.

실이 꼬이지 않은 깔끔한 매듭이 두 혈관을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그렇지. 이거지!’

준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올리버가 각성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다.

이전과 달리 손놀림이 침착하고 정교한 쪽으로 변했던 것이다.

“뭐야?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는데?”

불신에 가득 찼던 맥스웰이 놀라서 한마디 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그랬냐?”

“몰라.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지더라고.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도 들고.”

올리버가 두 번째 봉합을 위해 봉합침을 사용했다.

긴장이 다 풀리지는 않았을까.

혈관을 파고드는 봉합침이 얕았다.

이에 준후는 포셉으로 고정하고 있는 혈관을 살짝 위로 들어올렸다.

준후가 혈관을 들어준 덕분에.

봉합침이 혈관 표면을 깔끔하게 꿰뚫었다.

“준후 너도 미쳤다. 어떻게 이런 사소한 거에도 일일이 다 반응하니?”

올리버가 감탄조로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환자 말고 너도 지키겠다고.”

“든든하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준후는 그 뒤로도 올리버와 호흡을 맞췄다. 올리버가 자잘한 실수를 할 때마다 커버에 나섰다.

단순히 혈관을 고정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올리버의 손동작과 손에 실린 힘을 미리 계산해서 혈관을 들어주거나 내려주면서.

올리버가 최적화된 운침을 하도록 도왔다.

무림에서 단련한 안력(眼力).

검객 특유의 세심한 손놀림.

이 두 가지가 어시스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수술에 최고 수훈장이라면 역시 정안(正眼)을 빼놓을 수 없었다.

정안(正眼).

이는 내공에 올바른 생각을 담아 상대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안공이었다.

눈으로 펼치는 무공이었다.

과거 뇌 각성 수술을 당시.

수술의 부담을 견디지 못했던 피아니스트에게 사용하고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무공인데.

그것이 모처럼 진가를 발휘하는 중이었다.

준후는 올리버를 응원하는 생각들을 담아 올리버에게 내공을 분출했고, 이로 인해 올리버는 용기를 되찾았던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지 멘탈은 중요했다.

내가 흔들리면 멀쩡한 세상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므로 정안은 내면의 중심을 잡아주는 무공이었다.

아마 후학을 가르치게 되면 정안을 사용하는 빈도도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용기를 되찾으면서.

준후의 빈틈없는 어시스트를 받으면서.

올리버는 차근차근 문합술을 격파해나갔다.

잠깐 사이에 혈관 문합에 80퍼센트가 진행되었다.

간접 재관류 수술은.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았으므로.

준후 일행의 첫 팀 수술을 무난하게 종료되는 것처럼 보였다.

맥스웰이 비보를 전하기 전까지는.

“잠깐, 문합 스톱.”

“뭐야? 리듬 깨지게?”

막 매듭을 다 지은 올리버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환자 뇌압이 35mmHg야. 근데도 출혈점이 안 보여.”

“설마?”

“빌어먹을. 그 설마가 맞는 것 같다. 시야 밖에서 혈관이 터졌나 봐. 어떻게 하지?”

환자 감시 장치를 살피는 맥스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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