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73화 (370/424)

373화

제72장 믿음(3)

4층 휴게실.

메이유에 휴게실은 인테리어부터 가구까지 한국의 휴게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급 호텔의 라운지가 떠오를 정도였다.

숲을 형상화한 듯한 푸른 벽지.

헤진 곳 없이 푹신하고 아늑한 소파.

곳곳에 놓인 싱그러운 난초 화분.

하지만 메이유 휴게실에도 피해갈 수 없는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음료 자판기였다.

준후는 캔 커피를 뽑아 올리버와 맥스웰에게 건넸다.

본인 커피도 뽑아 가까운 소파에 앉았다.

엉덩이와 허리를 폭신하게 감싸주는 소파의 감촉이 좋았다.

수술방에서 6시간 내내 서 있다가 앉으니 허리와 엉덩이가 행복에 비명을 질렀다.

전직 무림 고수에게도.

외과 수술은 피곤하고 고된 것이었다.

“준후, 아까 대답을 못 들어.”

“무슨 대답?”

“혈종이 작아질 거란 걸 어떻게 알았냐고.”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교재에서 봤어?”

“아니. 교재에서 봤으면 너희 둘한테 믿어달라고 안 했겠지. 공부한 내용이니까 내 말을 따르면 된다고 했겠지.”

“그럼 네 머리로 생각한 거야?”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딸칵!

캔 커피 뚜껑을 따서 달콤 쌉싸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수술 당시.

준후의 사고방식은 단순했다.

「혈종 제거술을 하는 게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되냐 vs 도움이 안 되냐.」

일단 이 두 가지를 놓고 머리를 싸맸는데 결론은 후자였다.

측두부에 혈종 제거술을 실시한다면 수술 시간이 최소 2시간은 더 길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수술이 길어지면.

환자의 경과가 악화되고 스태프들의 집중력 또한 덩달아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혈종 제거술을 안 하고도 혈종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때부터 준후의 질문은 다소 황당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혈종 제거술을 안 하고 혈종을 제거해야만 수술이 성공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준후는 혈종의 위치가 제3뇌실 근처임을 퍼뜩 떠올렸다.

뇌실이란 뇌척수액이 지나가는 통로인데 환자에게 혈전 용해제를 투여한다면.

혈전 용해제를 머금은 뇌척수액이 혈종을 더 빨리 녹일지 모르겠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가설은 보기 좋게 딱 맞아 떨어졌다.

수술이 끝날 때쯤 혈종의 크기는 절반 가까이 줄었다.

[최고의 검객은 검을 쓰지 않고도 상대를 제압하는 검객이다.]

무림맹주의 말은 과연 옳았다.

비록 외과의사라도 수술을 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사실 나는 준후 네가 무조건 혈종 제거술을 하자고 할 줄 알았거든.”

맥스웰이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초스피드로 혈종 제거술을 할 테니까 올리버에게 직접 재관류 수술을 마무리 지으라고 할 줄 알았지.”

“평소라면 분명 그랬을 거야.”

준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때로는 지름길보다 돌아가는 길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무척 신기한 일인데.

준후조차도 오늘 수술에 있었던 자신의 심경 변화를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동안 수술을 하면서 느꼈던.

자신도 모르게 심어둔 사고의 씨앗이 새싹처럼 피어난 느낌이랄까.

스승 재현에 따르면.

실력이라는 건 대각선으로 상승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알파벳 대문자 L을 옆으로 반전 시킨 형태로 상승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계속 바닥을 기다가.

임계점을 만나면 수직 상승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준후는 생각했다.

오늘 수술을 통해서 답보상태였던 수술 실력이 다른 차원으로 상승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툭!

준후의 설명이 끝나자 올리버가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쨌거나 준후 네 덕분에 2번이나 살았다.”

“…….”

“네가 믿어준 덕분에 직접 재관류 수술도 잘 끝냈고 괜한 혈종 제거술도 피했고. 정말 고마워.”

올리버가 벅찬 목소리와 눈빛으로 말했다.

준후가 잠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사실 오늘 수술의 주인공은 올리버였다.

아버지 앞에서 수술을 하느라 얼마나 떨렸을까.

그 긴장과 부담감을 잘 이겨내고 올리버는 수술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나야 살짝 거들었을 뿐이지. 진짜 고생한 거 너야.”

“아니, 네가 곁에 없었으면 난 첫 번째 시도에서 포기했을 거야. 그 때 난 내가 정말 형편없는 놈이라고 생각했거든.”

올리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좌절한 적 많아. 그때마다 동료들에 도움을 받았고.”

“준후 너도?”

“왜? 난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내 피는 파란색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준후의 농담에 올리버가 웃었다.

맥스웰도 따라 웃었다.

친분을 쌓는 와중에 팀 수술까지 마친 덕분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무언가가 세 사람을 이어주고 있었다.

“너도 지키고 환자도 지켜. 난 준후가 그 말할 때 드라마 의사인 줄 알았다.”

“야, 그 말은 제발 잊어주라.”

맥스웰의 지적에 준후는 본인의 낯 뜨거웠던 대사를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

“그나저나 다음 팀 수술은 맥스웰 차례인가?”

준후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어떤 수술인지 봐서. 괜찮은 거면 내가 하고.”

“요리하는 것도 아닌데 집도에 왜 그렇게 간을 봐?”

“그러게. 맥스웰 너는 너무 집도를 빼는 경향이 있다?”

준후와 올리버의 지적에 맥스웰이 멋쩍게 웃었다.

고개를 내리 깐 채 손에 쥔 커피 캔을 주물럭거렸다.

맥스웰은 외과의이면서도 수술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감춰놓은 사연이 있어 보였다.

올리버의 트라우마는 아버지 오스틴이었고.

준후의 트라우마는 무림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했던 것인데.

과연 맥스웰의 트라우마는 무엇일까.

무엇이 맥스웰을 소극적으로 만들었을까.

준후는 궁금했지만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타인의 상처는 함부로 후벼 파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 농구 좋아하지?”

맥스웰이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했다.

“두 말하면 잔소리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가 농구야.”

“준후 너는?”

“나도 좋아하는 편.”

“그럼 주말에 시간 비워놔. 내가 잊을 수 없는 추억 만들어줄 테니까.”

맥스웰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어렸다.

* * *

그날 저녁.

일과가 끝난 뒤 올리버는 곧장 중환자실을 찾았다.

오늘 오전에 집도했던 맥시의 침상 옆에 섰다.

아이는 아직 의식이 없었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정수리와 이마 사이에 생리식염수에 젖은 거즈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뇌압이 정상보다 조금 더 높았고 혈종이 완전히 제거 되지 않아서 두개골을 닫지 않았다.

혈종이 사라지는 대로.

두개골 성형술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두개골 성형술의 난이도는 모야모야병 수술과 비교하면 한참 저 밑바닥이었다.

추가 수술에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환자 바이탈은 좀 어때요?”

올리버가 뒤따라온 간호사에게 물었다.

“37.9로 미열만 계속되고 있어요. 호흡이나 혈압, 맥박은 정상이고요. 심전도하고 산소 포화도도 문제없어요.”

“천만다행이네요.”

올리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을 잘 끝내고도 머릿속에서 걱정이 떠나지를 않았다.

수술 후 각종 감염증으로 세상을 떠나는 환자가 제법 많아서였다.

서전이 진짜 안심하려면 환자가 퇴원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레지던트 말고 바로 저한테 노티해 주세요.”

“네. 선생님.”

베드를 떠난 올리버가 스테이션으로 이동했다.

수술 후 3시간 뒤에 촬영한 Brain CT 영상을 살폈다.

혈종의 크기는 수술 직후 촬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아져 있었다.

처음에 비하면 절반의 절반 수준이었다.

‘진짜 경이롭네. 경이로워.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

준후의 탁월했던 판단을 떠올리며 올리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누가 봐도 혈종 제거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준후는 혈종의 해부학적 위치를 고려해서 메스를 대지 않고 혈종을 녹여냈다.

메이유 신경외과 레지던트 수석 레이먼드도 분명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준후는 조만간 아버지조차 따라잡지 않을까.

올리버는 문득 그런 발칙한 상상까지 했다.

터벅. 터벅.

올리버의 발걸음이 중환자실을 떠나 병동으로 향했다.

병동 복도를 가로지르며 수많은 환자들을 스쳐 지나가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발걸음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올리버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이윽고 두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을 휘어 감았다.

올리버가 마주선 상대는 소아 신경외과의 권위자이자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학과장이자 올리버의 아버지인 오스틴이었다.

나이는 오스틴이 한참 많은데도.

오스틴의 체구에서 풍기는 위압감과 카리스마를 올리버가 쫓아갈 수는 없었다.

올리버에게 오스틴이란 항상 곁에 있어도 항상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병동엔 무슨 일이니?”

오스틴이 먼저 물었다.

“오늘 당직 근무라서요.”

“그래? 꽤 바쁠지도 모르겠구나. 일기 예보를 보니 이따가 비가 한바탕 쏟아진다던데.”

“교통사고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이 근방 도로가 어둡고 험하기로 유명하니까.”

오스틴와의 대화가 겉도는 것 같아서 올리버는 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갔다.

올리버는 오스틴에게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오늘 제 수술 보셨죠?”

“그래. 봤지.”

“어떻게 보셨어요? 아들 말고 서전으로서요.”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니?”

“가짜로 말해달라고 해도 안 그러실 분이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오스틴이 피식 웃으며 한참 뜸을 들였다.

덕분에 대답을 기다리는 올리버만 애가 탔다.

올리버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인정에 목이 말라 있었다.

올리버가 의대에 입학했을 때도.

메이유에서 신경외과 레지던트를 마쳤을 때도.

심지어 바늘구멍처럼 좁은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합격했을 때도.

아버지는 성의 없이 축하한다고만 했다.

올리버를 전혀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것이 올리버는 실망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해야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지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이라면.

비록 수술 초반에 크게 헤맸지만.

준후의 도움을 받았지만.

비교적 어려운 수술을 잘 끝냈다고 자부했다.

이 정도면 아버지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대답이 없으시네요. 제가 아직도 성에 안 차세요?”

참다못해 올리버가 먼저 물었다.

“레이먼드, 아니, 준후보다 더 잘나면 그때야 인정받을 수 있는 건가요?”

“뭔가를 아주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보구나.”

“제가요? 착각은 학과장님이 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

“나는 그저…….”

오스틴이 올리버의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이었다.

“부끄러웠단다.”

“네? 부끄러웠다고요?”

뜻밖에 대답에 올리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너도 알겠지만 난 애정표현이 익숙하지 않단다. 내가 네 엄마한테 하는 걸 봐서 알겠지만.”

“그건 알지만 그래도…….”

“몹쓸 병이지. 남을 칭찬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작 가족이나 애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칭찬이 인색하니 말이야.”

“…….”

“뭐랄까, 진심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구나.”

“저는…… 몰랐어요.”

“나도 몰랐단다. 방금까지만 해도.”

“방금 전이요?”

“오는 길에 준후를 마주쳤는데 한 소리 들었지 뭐니. 네가 나한테 인정을 못 받아서 섭섭해 한다고. 나는 항상 올리버 너를 인정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

“서전으로서 오늘 네 수술에 대해 평하자면 훌륭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거라.”

오스틴이 수줍어하며 달아나듯이 올리버를 스쳐 지나갔다.

올리버는 멀어지는 오스틴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올리버는 두 번 놀랐다.

아버지가 자신을 오래 전부터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버지가 준후의 조언에 영향을 받고 진심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에.

아무래도…….

준후는 사람 사이에 벌어진 마음을 봉합하는 솜씨도 탁월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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