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제72장 믿음(5)
‘젠장. 하필이면 이런 때 부상을 당하다니!’
벤치에 앉은 앤드류가 입술을 깨물었다.
신경질을 부리며 발바닥으로 코트를 쿵 밟아댔다.
앤드류는 요즘 들어 출전 시간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성실하게 땀을 흘리다보니 실력이 성장했고 이를 감독과 코치진이 어여쁘게 봐주기 시작했다.
만약 오늘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친다면 어떨까.
동료들과 스태프들의 시선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내년에 있을 연봉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고.
잘하면 주전으로 뽑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뜬금없이 부상을 당하게 됐단 말인가.
앤드류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열심히 사는 것도 죄란 말인가.
“앤드류, 팔을 앞으로 쭉 펴 봐.”
팀 닥터의 지시에 앤드류가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누군가 식칼로 어깨를 쑤셔대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정작 앤드류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순진하게 아픈 티를 낼 수 없었다.
경기에 계속 출전하고 싶다면.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잠깐 쉬어졌더니 금방 좋아졌잖아요.”
“이번에는 팔을 위로 들어 봐.”
‘이런 시발!’이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앤드류는 간신히 견뎌냈다.
팔을 위로 들자 목공용 드릴이 피부와 뼈를 파고드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앤드류의 미간이 좁아지며.
이마에는 지렁이 주름이 잡혔다.
“지금도 괜찮아?”
닥터가 가느다란 눈으로 앤드류를 쳐다보았다.
“네. 충분합니다.”
“그럼 어깨를 한 바퀴 돌려볼래?”
“닥터는 속고만 살았어요?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요?”
“의심하는 것도 일이라서 그러지. 빨리 어깨 돌려 봐. 제대로 돌리면 출전해도 되니까.”
“똑똑히 보세요. 부상이 얼마나 별거 아닌…… 아아아악!”
팔을 120도 정도 돌렸을 때 앤드류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가 워낙 크고 날카로워 동료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쯧쯧쯧. 느낌이 안 좋더니 이럴 것 같더라. 내가 팀 닥터 생활이 10년째야. 그동안 부상 숨기는 선수들, 한 두 명 본 줄 알아?”
왜 이렇게 눈치가 좋고 지랄이란 말인가.
앤드류는 처음으로 닥터가 얄미웠다.
“남은 시간 2분이에요. 그래도 2분 정도는 버틸 수 있어요.”
“2분 먼저 가려다가 2년을 날려 버리는 수가 있어. 머저리처럼 굴지 마.”
“존. 앤드류 상태가 대체 어떤 거야?”
잠자코 있던 감독이 닥터에게 물었다.
앤드류도 궁금했다.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어떤 상태가 대체 왜 아픈지.
“혹시 최근에 훈련하면서 어깨 빠진 적 있어?”
“한 달 사이에 2번 정도요. 제가 알아서 막 움직이다보니 알아서 맞춰지던데요?”
“하…… 곤란해.”
닥터가 바닥에 떨어뜨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습관성 어깨 탈구가 시작된 것 같아. 처음 빠졌을 때 나한테 말했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습관성 어깨 탈구라는 말에 벤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동료들과 스태프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습관성 어깨 탈구.
이는 말 그대로 어깨뼈가 습관처럼 빠지는 질환이었다.
완치가 힘든 편이라.
어깨 탈구가 올 바엔 차라리 어깨 골절을 당하는 게 낫다는 말도 공공연하게 퍼졌다.
“그래도 발견이 빨라서 경과가 좋을 수도 있어.”
“정말요?”
“대신 오늘 경기는 무조건 빠져야지. 경기 끝나는 대로 검사도 받아보고.”
“딱 2분도 안 됩니까? 팔을 180도로 돌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블록슛은 할 수 있어요.”
앤드류가 언성을 높였다.
바닥에 놓인 스프레이 파스를 다친 오른쪽 어깨에 치이익 하고 뿌려댔다.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건 충분히 알았다.
그렇다고 경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골드 스테이트의 막강한 화력을 감당하려면.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려면.
팀의 방패인 자신이 꼭 필요했다.
벤치에 앉아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일 순 없었다.
“부상 달고 뛰는 선수가 어디 저 뿐인가요? 습관성 어깨 탈구면 러브도 마찬가지잖아요.”
“…….”
“러브도 잘 이겨냈잖아요.”
앤드류가 팀 동료 러브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러브는 아무 말 없이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제발 귀 좀 뚫어 놔. 치료나 재활에 안 좋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응?”
“…….”
“네가 괜찮으면 내가 왜 허락을 안 하겠냐고.”
“감독님. 저 내보내주세요. 무리 안하는 선에서 열심히 뛸 게요.”
앤드류는 작전을 바꿔 감독에게 애절한 눈빛을 쏘아냈다.
“일단 다시 뛰어보고 상태가 나빠지면 그때 교체해도 되잖아요.”
“해리슨, 절대 안 돼. 동정심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야. 냉철해지라고.”
앤드류와 닥터.
그리고 팀 선수들까지 감독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감독은 이 상황이 곤란하고 난처하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만 연신 문질러댔다.
조명을 받은 감독의 이마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 *
“잘 나가다가 이게 무슨 꼴이냐?”
친척 동생의 비보에 맥스웰이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맥스웰은 알고 있었다.
앤드류가 어렸을 때부터 농구를 얼마나 사랑했고.
또 NBA에 입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
그 노력이 배신당하는 참혹한 모습을 설마 경기장에서 직관하게 될 줄이야.
위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속이 쓰라려왔다.
“얼핏 듣기로는 습관성 어깨 탈구라는데 그럼 출전은 고사하고 치료부터 받아야하는 거 아니야?”
올리버가 말했다.
“아파도 쉽게 포기할 수가 없는 거겠지. 기회라는 게 자주 오지는 않으니까.”
준후가 대꾸했다.
“에이, 그래도 멀리 바라보면 무조건 쉬는 게 맞지.”
“정말 위급한 순간에는 숲이 안 보일 때도 있어.”
“뭔가 뼈가 담긴 말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나 본데?”
“있어. 비슷한 경험.”
준후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때는 바야흐로 무림맹에 입관한지 1달이 지난 시점.
준후가 아직 새파란 애송이였을 때였다.
당시 무림맹에서 무림맹에 갓 입관한 후기지수들을 모아놓고 비무 대회를 개최했다.
우승자는 무려 무림맹주에게 일대일로 무공 수련을 받을 수 있었다.
정파 최고봉이자.
정파 역사 중 다섯 번째로 현경의 경지에 오른 맹주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다들 눈이 새빨개져서 비무 대회에 참가했다.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준후는 파죽지세로 준결승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당시 준후는 발목을 다친 상태였다. 이전 비무에서 상대의 목검에 발뒤꿈치를 세게 얻어맞은 것이다.
보법을 밟은 것은 고사하고.
걷는 것만으로도 발목이 시큰 아파왔다.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게 좋겠구나. 여기서 무리를 했다간 평생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단다.
무림맹 의원이 조언을 했고.
고민하던 준후는 결국 비무 대회를 포기했다.
아버지의 원수 적일도에게 복수 하려면 몸이 온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의 포기를 두고두고 후회하는 준후였다.
더 노력했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비무 대회에서 우승했다면.
어렸을 때부터 무림맹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면.
오히려 복수가 더 빠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의원이 오진을 했던 건 아닐까.
목검에 심하게 맞긴 했지만 그걸로 평생 후유증이 남는다는 건 이치에 안 맞는 것 아닐까.
가보고 싶었지만.
끝내 가보지 못한 길에 준후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지금 앤드류가 어떤 마음일지 알 것도 같았다.
앤드류가 만약 오늘 경기에서 벤치를 지켜야 한다면 오늘 일은 앤드류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미련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 일을 회상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올 것이다.
“너 뭐 해? 갑자기 왜 일어나?”
“선수 벤치 쪽으로 가보게.”
“왜?”
맥스웰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네 친척 동생 상태를 보고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려고.”
“적어도 여기서 우리는 관중이지 의사가 아니야. 팀 닥터도 있는데 껴드는 건 오버야.”
“팀 닥터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닐걸?”
“그건 아는데. 그래도 우리보단 낫겠지. 그 사람은 정형외과 전공일 거 아니야. 우리는 신경외과 전공이고. 우린 어깨 치료는 공부 안하잖아.”
“의견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 최소한 설득은 해볼 수 있는 거고.”
“준후, 제발 이러지 마. 이러면 티켓 구해준 내 동생만 난처해진다.”
“소란 안 피울 거니까 걱정 마.”
준후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벤치 쪽으로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은 까맣게 모르지만.
사실 준후의 의술이 가장 빛나는 곳은 병원이 아닌 다른 장소였다.
오로지 병원에서만 할 수 있는 검사 및 치료들을 준후는 내공과 무공을 통해 현장에서 소화할 수 있었다.
만약 앤드류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 구원자는 준후 말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이봐요. 당신 뭔데 벤치로 와요?”
선수 중 한 명이 준후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준후의 앞을 가로 막고 섰다.
NBA 선수답게 신장과 덩치가 무시무시했다.
“여기 가드 좀 불러…….”
“잠시만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면 왜 벤치로 난입하는데요?”
“다친 분이 있는 것 같아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참고로 저는 메이유 클리닉 신경외과 전문의입니다.”
준후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병원 명찰을 꺼내 선수에게 내밀었다.
환타(?)답게.
바깥에서도 환자를 워낙 자주 치료하는 준후였다.
그래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일부러 명찰을 가지고 다니곤 했다.
“의사는 맞는 것 같은데.”
선수가 고개를 숙여 준후의 명찰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준후와 눈을 마주쳤다.
“그쪽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우리한테는 팀 닥터가 있으니까.”
“팀 닥터도 고전하는 모양인데요?”
준후가 엄지로 측면에 있는 팀 닥터 쪽을 가리켰다.
마침 팀 닥터는 앤드류에 빠진 어깨를 정복(reduction, 뼈를 다시 맞추는 일)하고 있었다.
“크으으윽!”
앤드류가 괴로운 신음을 흘렸고.
팀 닥터는 붉어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깨를 쉽게 정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앤드류는 단순한 습관성 어깨 탈구만 있는 게 아닌 듯 했다.
이제 준후는 시간과도 싸워야 했다.
작전 타임 시간이 한참 지나자 심판도 벤치 쪽으로 와서 진행 사항을 묻기 시작했다.
작전 타임을 하나 더 쓰던가.
아니면 선수를 락커룸으로 보내라고 재촉하는 게 분명하리라.
“이 정도면 제가 필요한 상황 아닙니까?”
준후와 마주 선 선수는 쉽사리 대답을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따라오라는 고갯짓을 했다.
“저기요. VIP석에 있던 메이유 클리닉 신경외과 의사라는데요. 자기가 앤드류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선수의 말에 선수들과 코치진의 시선이 단 번에 준후에게 쏠렸다.
하지만 그 눈빛들은 결코 준후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웬 거지같은 게 굴러 들어왔냐는 불만의 눈빛들이었다.
“감히 당신이 낄 자리가 아닙니다. 빨리 관중석으로 돌아가세요. 앞으로 평생 경기장에 출입 금지 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팀 닥터가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하지만 준후는 눈썹 한 번 까딱거리지 않았다.
이들로서는 준후를 달가워하지 않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준후의 목적은 단 하나.
가급적이면 앤드류를 치료해 경기에 내보내는 것이었다.
앤드류가 경기에 다시 나간다면.
적어도 앤드류만큼은.
과거 준후가 무림맹 비무 대회를 포기하면서 가졌던 가슴 아픈 미련을 가지지 않게 될 테니까.
‘미련’을 남기는 일이 ‘미련’한 짓이라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그렇게 미련하지 않으려면 미련을 가질만한 일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됐다.
준후는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엄지 검지 중지를 활짝 펼쳤다.
딱 한마디만 했다.
“저한테 딱 30초만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