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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77화 (374/424)

377화

제73장 저질(2)

후루루룩.

“크으으. 이거지!”

NBA 관람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준후는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꼬들꼬들한 라면을 씹어 주고.

얼큰한 국물로 목을 적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동안 느끼한 기숙사 음식으로 받은 스트레스가 쑥 내려갔다.

한국을 향한 향수병도 옅어진 듯했다.

라면을 먹으면서 준후는 싱크대 옆에 놓인 냉장고를 응시했다.

냉장고 위에 컵라면 박스 3개가 3층으로 쌓여 있었다.

든든한 예비 식량이었다.

복귀하는 길에 대형 마트에 들러서 구입한 것들이었다.

냉장고 냉동실에서는 무려 김치만두도 들어 있었다.

잘 몰랐는데.

K-pop뿐만 아니라 K-food도 미국에서 꽤 유행이라고 한다. 게다가 유행의 선두주자는 다름 아닌 만두였다.

중국 덤플링과 차별화하고 현지인의 입맛까지 사로잡으면서 인기가 폭발이라고 한다.

맥스웰의 설명에 따르면.

국내 만두 브랜드 ‘비비고’가 NBA 명문 구단 LA 레이커스의 스폰서라고도 했다.

처음에 준후는 농담하지 말라고 했다.

NBA 최고의 선수 르브론 제임스의 가슴팍에 비비고 마크가 붙어 있다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이미지였다.

반신반의하며 사진을 찾아 봤는데 놀랍게도 상상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맥스웰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LA 레이커스 선수들 가슴에 비비고 마크가 선명했다.

보통 뉴스에서 전하는 한류 열풍이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과장되기 마련이거늘…….

이번만큼은 허풍이 아닌 듯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라면을 막 다 섭취했을 때.

곁에 놓아둔 휴대폰이 몸을 떨어댔다.

모르는 번호지만 일단 받았다.

-선생님. 저 앤드류라고 합니다. 몇 시간 전 경기에서 선생님이 어깨를 치료해 준 그 선수요.

“아. 네. 반갑습니다.”

준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팀 닥터와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그 때 준후의 연락처를 알아냈을까.

아니면 맥스웰에게 물었을까.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감사 인사도 못 드리고 락카룸으로 들어갔잖아요?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런 건 신경 안 씁니다. 지금 병원이죠?”

-네. 저희 팀이 지정한 병원에서 검사도 받고 방금 진료도 마쳤어요.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준후가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물었다.

준후는 앤드류에게서 습관성 어깨 탈구의 징조를 보았다.

정밀 검사에서 병이 깊어질 징조가 보인다면 수술과 재활 때문에 선수로서의 황금기가 송두리째 날아갈 수도 있었다.

-수술은 아니고 간단한 시술을 받고 한 달만 쉬어보자고 하네요. 걱정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좋다면서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근데 선생님 진짜 팀 닥터 해볼 생각 없으세요?

앤드류가 화제를 돌렸다.

준후는 피식 웃었다.

기존 팀 닥터도 모자라서 이제는 앤드류까지 준후를 팀 닥터로 모셔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선생님이 제 어깨를 만져주고 정복해 주면서 상태가 확 좋아졌잖아요. 다들 마술 같다면서 신기해하더라고요.

“마음만 받을게요. 저는 외과의로 충실하고 싶거든요. 앤드류가 NBA 최고의 디펜더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면 뭐라고 붙잡지도 못하잖아요. 세게 한 방 먹었네.

앤드류의 목소리에 유쾌함이 묻어났다.

비록 직종은 달랐지만.

거대한 목표.

그것을 이루기 위한 집념과 끈기.

이 두 가지를 준후와 앤드류는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후회 없는 경기를 펼칠 수 있었어요.

“끝까지 멋진 경기 보여줘서 고마워요. 오늘 승리도 축하하고요.”

-네. 선생님. 푹 쉬세요.

앤드류와의 통화가 끝났음에도 준후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경기의 하이라이트.

마지막 장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 마리의 새처럼 날아오르던 스테픈 커리.

반 박자 느리게 커리를 덮쳤던 앤드류.

앤드류가 최후에 펼친 블록슛은.

수비를 포기하지 않고 내뻗은 팔은.

기어이 공을 쳐냈다.

어깨를 다쳤던 팔로 블록슛에 성공했다는 점이 더 그림 같았고 영화 같았다.

“와아아아아!”

관중석에서 거대한 함성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그때 앤드류는 울었고 준후는 울컥했다.

고난을 통해 얻은 승리는 항상 사람을 뭉클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어쨌거나 앤드류의 활약을 통해 준후는 대리만족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앤드류처럼.

후회는 할지언정 미련을 남기는 삶은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후회는 ‘이미 저지른 일’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이다.

아프지만 배울 점이 있었다.

후회는 흉터와 닮은 점도 많았다.

어떤 때는 교훈이 되고 어떤 때는 훈장이 된다.

하지만 미련이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미련은 ‘하지 않은 일’을 바보처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인데 ‘하지 않은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후회가 흉터와 닮았다면.

미련은 환상통과 닮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파하는 것이다. 다친 곳이 없으므로 치료할 방법조차 찾기 어렵다.

외과의로 살아가면서.

앞으로 내가 남길지도 모르는 후회와 미련은 무엇일까.

준후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 * *

다음 날 오전.

의사 가운을 걸친 준후가 소아 신경외과 병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복도 분위기는 고요하고 아늑했다. 스태프들 또는 환자나 보호자를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넓은 복도를 전세 낸 기분이었다.

주말이 평온한 건 메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산드라, 좋은 아침.”

스테이션을 지나칠 때 준후가 산드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흑인 여성 간호사 산드라는 준후를 힐끔 쳐다보고 말았다.

원래 저렇게 성격이 쌀쌀 맞은 걸까.

아니면 일이 바쁜 걸까.

당직 근무는 처음이라서 준후는 산드라가 왜 인사를 받지 않았는지 알기 힘들었다.

병동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준후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미국 병동과 한국 병동에 가장 큰 차이라면 당연히 병실이었다.

한국은 6인실이 기본인 반면 미국은 1인실이 기본이고, 극히 드물게 3인실을 쓰곤 했다.

병실 환경만 놓고 보면 미국이 압승이었다.

한국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다들 동의할 것이다.

닭장처럼 비좁은 6인실의 악몽을.

종이만큼 얄팍한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다른 입원 환자와 보호자의 말소리, 음식 쩝쩝대는 소리, 코 고는 소리의 끔찍함을.

그렇다고 미국 병실을 꼭 찬양할 이유는 없었다.

왜냐고?

천문학적인 입원비 때문에!

그러니까 한국과 미국의 병실 생활이란…….

천국과 지옥 중 무엇을 먼저 경험하고 무엇을 나중에 경험하느냐에 차이만 있을 따름이었다.

드르르륵.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병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바깥으로 나왔다.

“케리, 뭐 해요?”

준후가 간호사 케리에게 물었다.

병실을 나온 케리의 손에 콜라 페트병 몇 개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어요.”

케리가 푹 한숨 쉬며 대답했다.

“잔심부름이라면 뭐요?”

“콜라 배달이요.”

“간호사가 왜 콜라 배달을 해요?”

준후의 눈이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졌다.

“한국에서는 안 그러나 보죠?”

오히려 케리가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저희는 물 배달도 하고 술 배달도 해요. 환자나 보호자가 뭘 달라고 하면 웬만한 건 다 챙겨줘야 해요.”

“그건 간호사의 업무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먹고 싶으면 환자나 보호자가 직접 가져다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준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메이유의 가치가 ‘환자를 최우선으로’라고는 해도 이건 선을 넘었다.

이 정도면 간호사가 아니라 하인 아닌가.

환자가 손톱이나 발톱을 깎아달라면 그것도 해줄 생각인가.

“간호사 업무는 제가 아니라 병원이 정해주는 거죠.”

“윗선에 따지면 안 됩니까? 넌센스잖아요.”

“어쩌겠어요. 메이유도 결국 영리 병원이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데. 혹시 인형에 대한 건 아시나요?

“알죠. 소아 환자를 안정시키려고 제공하잖아요.”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처음 소아 환자가 입원하면 간호사들은 입원 설명을 하면서 소아 환자에게 인형을 건네준다.

“그거 유료예요.”

“네? 인형을 돈 받고 줘요? 심지어 유료라고 설명하는 것도 못 본 것 같은데요?”

몰랐던 진실을 깨달은 준후가 기겁했다.

“그냥 슬쩍슬쩍 집어넣는 거죠. 참고로 인형 대여비는 20만원이에요.”

“…….”

“제가 지금 하는 음료 배달도 서비스 비용으로 나중에 환자한테 청구 되고요.”

“이쯤 되면 환자가 최우선이 아니라 돈이 최우선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선생님도 혹시 콜라 한 병 드실래요?”

케리가 장난스럽게 준후에게 페트병을 내밀었다. 준후는 질렸다는 듯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드르르륵.

병동을 가로지르던 준후가 도착한 곳은 레지던트 당직실이었다.

1년 차 다니엘은 책상에 앉아서 차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2년 차 레비는 두 다리를 책상에 올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피서지라도 방문한 것처럼 퍼져 있었다.

“준후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다니엘이 준후를 먼저 알아보고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준후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레비는 준후를 향해 고개만 돌리며 건성으로 인사했다.

준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신이 꼰대가 되어서 레비가 못 마땅한 걸까.

아니면 레비가 정말 선을 넘고 있는 걸까.

그 경계를 확인하고자 준후는 맥스웰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답장은 의외로 빨리 왔다.

[나 오늘 당직이잖아. 레비가 책상에 다리 올려놓고 빈둥거리고 있는데 이거 아메리칸 스타일이야? 아니면 그냥 얘가 태만한 거야?]

[걔 좀 뺀질뺀질하고 게으른 걸로 유명해. 윗사람 말도 잘 안 듣고.]

[오케이. 고맙다.]

휴대폰을 가운 주머니에 넣은 준후의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잠깐 애기 좀 할까?”

준후가 레비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때까지도 레비는 책상에 두 발을 올린 상태였다.

“무슨 말이요?”

“근무 태도가 너무 형편없잖아. 일단 책상에서 다리부터 내려.”

“싫은데요?”

“대여섯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싫으면 다인가?”

“싫은 걸 싫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레비가 따지듯이 물었다.

문답무용.

준후는 손날로 레비의 정강이 부분을 내리쳤다.

그제야 레비의 다리가 내려갔다.

“아야! 뭐 하는 거예요?”

레비가 얼굴을 찌푸리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난 눈빛으로 준후를 내려다보았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레비는 키가 19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장신이었다.

운동을 좋아하는지 어깨가 떡 벌어졌다.

“별 같지도 않은 게 아침부터 짜증나게 하네. 네가 날 쳤어? 진짜 힘으로 한번 해볼래요?”

“두…… 두 분 다 진정하세요! 기분 좋은 아침부터 싸우면 안 되죠. 좋게좋게 말로 해결해요…….”

1년 차 다니엘이 준후와 레비 사이에 껴들었다.

“부스트 업 교육생이면 레지던트를 함부로 쳐도 됩니까?”

레비의 언성이 올라갔다.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럼 근무를 똑바로 하든가. 당직실이 네 집 안 방인가?”

“그렇다고 칠 필요는 없잖아요.”

“짐승도 아니고 말로 해도 못 알아듣는데 다른 방법이 있어?”

“X만한 게 말도 개같이 하네. 진짜!”

F워드를 마구 섞는 레비의 화법에 준후가 얼굴을 구겼다.

그런데 거슬렸던 건 의외로 욕지거리가 아니었다. 입에서 은근하게 퍼져 나오는 악취였다.

“다니엘 넌 잠깐 나가 있어. 레비와 단 둘이 할 말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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