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제73장 저질(3)
‘하…… 시X. 쥐방울만 한 게 졸라게 까부네.’
레비는 준후를 노려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저 낯짝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벌써 징계가 2개나 쌓여 있었다.
거기에 하나가 또 더해지면 메이유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문득 다니엘과 눈을 마주치니 다니엘이 휘휘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 제스쳐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제발, 싸우지 마세요.
레비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너희 둘 연애하니? 나만 빼고 뭔 눈길을 주고받는 거야?”
준후가 농담조로 말했다.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리고 다니엘 넌 나가 있으라고 했잖아. 내 말 안 들려?”
“병동 콜이나 응급실 콜이 올 수도 있고…… 제가 자리를 비우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요.”
“세 번 말하게 하지마.”
“……알겠습니다.”
다니엘이 불안한 눈동자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당직실을 나갔다.
이제 당직실에는 레비와 준후밖에 없었다.
팽팽한 침묵이 두 사람을 휘어 감았다.
침묵이 풍선처럼 부풀어 언제라도 펑 터질 듯했다.
“전 선생님하고 할 말 없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세요.”
“난 너랑 할 말 많은데?”
“무슨 말입니까?”
“네 형편없는 근무 태도에 관해서 말이야. 구린내가 폴폴 나더라고.”
“끄으으윽.”
레비가 의도치 않게 속트림을 하고서 얼굴을 붉혔다.
“흠흠. 아침이 좀 거북했나?”
“거북했겠지. 술을 그렇게 쳐 마셔댔으니.”
“……!”
준후의 지적에 레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던 말인가.
양치질과 가글을 하고.
향수도 듬뿍 뿌려 놓았다.
심지어 레비는 술을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어제 새벽까지 술 마셨다는 사실을 준후가 어떻게 알아차렸단 말인가.
“무슨 수를 썼는지 궁금하지?”
궁금했지만 순순히 ‘네’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레비였다.
음주를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까.
“아뇨. 생사람 잡지 마세요. 전 술 안 마셨습니다.”
“자신 있으면 피 뽑자. 혈중 알콜 농도 확인해 보면 되잖아.”
“싫은데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웃기는 놈이네.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걸 피한다고? 그건 네가 범인이라는 소리밖에 더 되나?”
준후의 추궁에 레비는 뒷목이 서늘해졌다. 사냥꾼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음주도 징계 대상에 포함됐다.
“저…… 전 바늘을 무서워해요.”
“변명이 너무 조잡한데? 그동안 네가 사용한 주사바늘이 서운해 하겠어.”
“바늘로 남을 찌를 수는 있는데 바늘이 제 몸에 들어오는 건 싫다는 소리입니다.”
“지랄 말고. 넌 채혈하기 전까지 당직실에서 못 나가.”
준후가 살벌한 눈빛을 쏘아냈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이제 레비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순순히 채혈을 받은 다음 3징계로 메이유에서 쫓겨나거나.
다른 하나는 준후에게 무릎 꿇고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다.
둘 중에는 그나마 후자가 현실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후자를 선택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저 얄미운 동양인에게 왜 허리를 숙이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 저 새끼 입만 막으면 돼. 입만.’
불안에 떨던 레비의 눈동자에 독기가 차올랐다.
레지던트 1년 차 때부터 갓 2년 차가 된 지금까지 레비는 총 두 번의 징계를 받았다.
사유는 전부 폭행이었다.
자신에게 일을 못한다고 지적했던 동기를 때렸던 게 한 번.
처치에 불만을 품었던 환자의 보호자를 때렸던 게 또 한 번.
피해자와 징계 위원회 앞에서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척 연기를 했을 뿐.
그건 진짜 속내가 아니었다.
때린 놈은 때린 이유가 있고.
맞은 놈은 맞을 이유가 있는 법 아니겠는가.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지.”
준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난 너 같은 부류, 산더미처럼 상대해 봤거든. 자기밖에 모르고, 화를 참을 줄 모르고, 문제가 생기면 일단 힘으로 해결하려는 스타일 말이야.”
“…….”
“근데 참 희한하단 말이지.”
“뭡니까?”
“너 같은 부류도 메이유에서 서전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야. 하는 짓만 봐서는 동네 건달이나 갱스터가 딱인데.”
“난 이해가 가는데요? 왜냐면 당신도 나랑 마찬가지거든.”
레비가 낄낄 웃으며 반박했다.
“당신은 눈치 없고 주제파악을 못하잖아.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으면 다니엘을 내보냈으면 안 됐지.”
레비는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숙취가 아직 심했지만 저 쬐깐한 동양인을 으깨주는 데 지장은 없었다.
멍은 안 들도록.
어디가 깨지지는 않도록.
복부나 옆구리를 흠씬 두들겨주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할 것이다.
레비가 발을 쿵쿵 구르며 준후에게 다가갔다.
준후는 처음처럼 무표정이었다.
아마 필사적으로 겁을 참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당직실에서 주먹질을 하겠어?’ 하고 안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레비는 일단 두 팔을 뻗어 준후의 양 허리를 붙들었다.
비실비실한 몸뚱이를 번쩍 들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웬걸?
“으으으윽!”
안간힘을 써도 준후가 들리지 않았다.
준후의 발바닥이 지면에 달라붙은 것 같기도 했고 철근처럼 단단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래선 안 되는 건데?
당황하며 준후를 쳐다보는 순간, 준후의 머리통이 레비를 향해 날아들었다.
빠아아악!
전등을 끈 것처럼 순식간에 머릿속이 까매졌다.
* * *
소아 신경외과 숙직실.
준후는 다니엘과 함께 1층 침대에 누운 레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비의 오른쪽 팔뚝에 밴드가 붙어 있었다.
방금 막 채혈을 끝낸 상황이었다.
“갑자기 채혈은 왜 하라고 하셨어요?”
다니엘이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다니엘의 손에는 채혈통이 들려 있었다.
“얘, 진탕 술 퍼마셨거든. 술 마시고 당직 근무라니 말도 안 되지.”
“진짜요? 전 몰랐는데요? 그냥 조금 피곤해 하는 줄로만 알았어요.”
“모를 수도 있어. 작정하고 숨겼으니까.”
준후가 쓰게 웃었다.
준후의 후각은 일반인에 비해 몇 배는 더 날카롭고 예민했다.
그래서 레비에게서 나는 술 냄새를 어렵지 않게 포착했다.
레비 본인 딴에는 양치나 가글, 향수로 냄새를 숨긴 모양인데 준후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무공으로 증폭한 준후의 후각은 개의 후각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레비, 근무 태도도 엉망이지?”
“말도 마세요. 오늘도 차트 업무랑 라운딩은 저한테 다 떠넘겼어요. 손발이 없는 줄 알았다니까요.”
다니엘이 참았던 울분을 토해냈다.
한국이 됐든, 미국이 됐든 인성이 글러먹은 의사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누가 옆에서 싫은 소리를 살짝만 해도요. 눈을 부라리면서 위협적으로 군다고요. 깡패가 다름없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다.”
준후가 다니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얄미운 미꾸라지를 잡았으니 앞으로 의국물이 흐려지는 일은 없으리라.
“근데 선생님.”
“응. 왜?”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없어. 보다시피.”
“어떻게 레비 선배를 혼자 상대하고도 멀쩡하세요? 저 사실 걱정 많았거든요. 선생님이 선배한테 끔찍한 꼴을 당할까봐.”
“다 방법이 있지. 채혈통 Lab으로 내려 보내고 당직실로 가봐.”
“네. 고생하셨습니다.”
다니엘이 떠나면서 숙직실에는 준후와 레비만 남았다.
순간 준후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야, 눈 떠. 깨어 있는 거 다 아니까.”
준후의 경고에 레비가 슬며시 눈을 떴다.
차마 준후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는 못하고 시선을 살짝 빗겨냈다.
“선생님. 아까는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레비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혈을 당한 이상.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
“이미 늦었어. 용서는 덤벼들기 전에 구했어야지.”
“제가 욱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랬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앞으로는 진짜 잘하겠습니다.”
“진짜 잘할 수 있어?”
“네. 선생님.”
“그럼 잘해봐. 다른 병원에서.”
준후는 쌀쌀맞게 대답하고 숙직실을 나왔다.
뒤에서 레비가 뭐라뭐라 지껄였지만 귀를 닫아버렸다.
죄인의 핑계와 변명에 왜 자신의 고막을 오염시켜야 한단 말인가.
무림에서도.
현대에서도.
준후는 악인들에 한해서는 자비가 없었다.
악인들이란 실수나 부주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인간들이었다.
악인이란…….
남을 때리면 남이 아플 것을 알고 주먹질을 하는 인간이고.
남의 돈을 빼앗으면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궁핍할 걸 알고도 강도짓을 하는 인간이었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줘놓고 본인은 용서를 구한 뒤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겠다?
실로 뻔뻔한, 짐승만도 못한 태도였다.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애초에 용서를 구할 일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
준후는 그런 사고방식도 가지고 있었다.
드르르륵.
준후가 당직실로 복귀했을 때, 다니엘은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네.”
“……?”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 있어?”
수화기를 내려놓는 다니엘에게 준후가 물었다. 통화를 하는 내내 다니엘의 표정이 어두웠던 것이다.
“입원 환자 한 명이 상태가 안 좋아서요.”
“차트 띄우고 노티 해봐.”
“네. 선생님.”
준후가 다니엘이 앉은 책상 곁에 섰다.
이어지는 노티.
환자는 10세 아동으로 일주일 전 레이먼드가 모야모야병 수술을 집도한 환자다.
수술기록지상으로 수술에 문제는 없었다.
다만 환자의 체온이 오늘 새벽부터 심상치 않았다.
37.3도에서 시작한 체온이 슬금슬금 오르다가 급기야 현재는 38.7도까지 치솟고 말았다.
“해열제 처방을 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계속 오르네요…….”
다니엘이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깨물며 말을 계속했다.
“게다가 이 환자요…… 저희 병원을 후원하는 자선 단체장의 자제분이거든요. 혹시라도 잘못되면 큰일 나는데.”
“일단 병실로 가보자.”
준후는 다니엘을 데리고 황급히 병실로 이동했다.
보호자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며 아이는 ‘으으’ 하는 신음을 흘리기 바빴다.
아이의 양 뺨이 홍시처럼 붉었다.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선생님…… 저희 아이가 왜 이러는 거죠?”
“문진도 하고, 진찰도 하고, 검사도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저스틴, 어디가 제일 불편하니?”
“몸이…… 춥고…… 뜨거워요…… 너무 아파요…….”
아파서 그런지 저스틴은 말도 제대로 못했다.
준후가 저스틴의 이마에 살짝 손을 대어보니 이마가 불덩이였다.
“피 검사랑 흉부 엑스레이 오더 내고 아이스 팩, 피록시캄(진통제) IM(근육주사) 1amp injection 하자.”
“네. 선생님.”
발 빠르게 오더를 내린 준후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수술이 필요한 것도 아닐뿐더러 고열 환자에게는 준후라도 딱히 무공이나 내공으로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잠시 후 다니엘이 비운 자리를 간호사가 채웠다.
간호사는 아이스 팩들을 아이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넣고 머리에도 올려주었다.
채혈을 하고.
엉덩이에 근육 주사도 놓았다.
필요한 처치가 끝나자 병동 보호사가 아이를 데리고 병실을 떠났다.
준후는 당직실로 돌아와 다니엘과 함께 초조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그저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