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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79화 (376/424)

379화

제73장 저질(4)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달려왔는지 사내의 호흡은 거칠었고 앞머리는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네가 갑자기 왜 여기서 튀어 나오냐? 설마 날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준후가 사내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내의 이름은 레이먼드.

부스트 업 프로그램 동기이자 준후에게 인종차별로 시비를 걸고 또 준후를 향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었다.

“제가 전화했어요.”

다니엘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레이먼드 대신 대답했다.

“네가 왜?”

“혹시 환자 상태가 나빠지면 연락 달라고 하셨거든요. 레이먼드 선생님이 맡은 환자이기도 하고 VIP 환자이기도 해서요.”

다니엘의 말에 준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레이먼드의 사고방식을 알 것도 같았다.

만약 환자가 VIP가 아니었다면.

저렇게 자기 일과를 내팽개쳐가며 달려오지 않았으리라는 뜻이 아닌가.

인종차별만 하는 게 아니라 환자 차별까지 하는 놈인가?

“당직은 나니까 넌 신경 꺼.”

“당직은 너지만 담당은 나거든?”

레이먼드가 다니엘을 밀쳐내고 자리에 앉았다.

미리 들은 다니엘의 노티가 못마땅했는지 환자의 차트를 직접 살폈다.

“환자 체온이 38.7도가 될 때까지 해열제로 땡친 거야?”

레이먼드가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선생님이 PRN(필요시마다) 처방 내린 대로 했을 뿐인데요.”

“하…… 꽉 막힌 놈. 넌 그렇게 융통성이 없냐?”

“해열제 먹고 체온 떨어지다가 1시간 전에 갑자기 올라간 거예요.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하…… 원래 레지던트가 꼬박 꼬박 말대꾸하게 되어 있나?”

“이봐. 적당히 하지?”

잠자코 있던 준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섰다.

레이먼드는 다니엘에게 트집을 잡고 있었다.

괜한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매뉴얼대로 처치했을 뿐, 잘못이 없었다.

“진료 분위기 망칠 거면 나가. 난 너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나도 너 같은 거 필요 없거든. 꼴에 아랫사람 위해주기는.”

“윗사람이면 윗사람답게 행동하든가.”

두 사람의 날 선 눈빛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중간에 낀 다니엘만 어쩔 줄 몰라 했다.

“주말 아침부터 재수 더럽게 없네.”

레이먼드가 먼저 준후의 눈을 피했다.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아까 오더를 내렸던 검사들의 결과가 떠오르고 있었다.

흉부 엑스레이는 음영 없이 정상인데 소변 검사와 피 검사 결과가 불길했다.

말초혈액 백혈구 수가 17,300.

미성숙 백혈구가 전체 백혈구의 20퍼센트를 넘어갔다.

정상범위를 살짝이 아니라 훌쩍 넘어버렸다.

세 사람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이거 대형사고 맞죠?”

다니엘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하…… 씨…… 딱 폐렴 정도만 생각하고 왔는데 미치고 팔짝 뛰겠네.”

레이먼드는 본인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준후는 헛웃음만 흘렸다.

저스틴의 피 검사 결과창에는 Sepsis라고 적혀 있었다.

Sepsis는 패혈증이었다.

신체의 어떤 장기에서 미생물 감염이 일어나 그 감염 증상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사망률은 무려 35퍼센트.

웬만한 고난이도 뇌수술을 뺨치는 수준인데.

저스틴이 뇌수술을 마친 소아 환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심지어 3단계네.”

준후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패혈증에도 분류가 있었다.

1-4단계인데 환자는 3단계인 Sever sepsis(치명적인 패혈증)를 앓고 있었다.

적절한 치료가 없다면 4단계인 패혈성 쇼크가 찾아올 것이다.

그쯤 되면 치료가 아니라.

보호자와 함께 저스틴을 살려달라고 하늘에 기도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준후는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환자가 VIP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준후는 아이를 살리고 싶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비극이 또 일어나는 건 사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아이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슴이 뜨거운 것과는 반대로.

머릿속은 얼음보다 차가워졌다.

준후는 위기일수록 더 빛났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다니엘이 손톱을 뜯어 물며 준후를 응시했다.

“냉정하게 따져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환자의 머리를 열고 수술을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일단 SOFA(장기 기능장애 검사)부터 하자. 패혈증이 어느 장기에서 시작됐는지 확인해야지.”

가만히 있던 레이먼드가 준후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것도 우리가 할 일은 아니야.”

“환자라면 환장하는 놈이 왜 그래?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준후의 미지근한 태도에 레이먼드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당장 준후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럼 학과장님이나 교수님께 연락드리는 건 어떨까요? 경험 많은 분들이니까 가이드라인이 있을 것 같은데.”

“오! 그거 괜찮네. 짜식, 좀 하잖아!”

다니엘의 의견에 레이먼드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죽 웃으며 다니엘의 어깨를 격려하듯 팡팡 두들겼다.

하지만 준후가 다시 찬물을 끼얹었다.

“너희 둘 다 아직까지 본질을 놓치고 있어. 윗분들한테 전화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사람 속 터지게 하네. 그래서 뭘 어쩌라고. 뜸 들이지 말고 속 시원하게 방법을 말해봐.”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 * *

중환자실 입구와 가까운 베드.

준후와 레이먼드, 그리고 한 여성이 침상에 누운 저스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 사람의 눈빛에 근심이 가득했다.

패혈증 진단을 받은 직후.

저스틴의 바이탈이 절벽에서 추락하듯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어버리고.

수축기 혈압이 100mmHg로 급감했으며.

산소포화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산소마스크까지 씌워야 할 지경이 되었다.

“선생님. 환자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레이먼드가 여성에게 물었다.

여성의 목걸이 명찰에는 감염내과 클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일단 어떤 세균이 몸에 퍼졌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혈액배양검사 오더 내놨어요.”

“…….”

“배양하는데 이틀에서 나흘은 걸리겠지만.”

“그때까지 손 놓고 있는 건 아니죠?”

“지금으로서는 생리식염수에 AMC 계열에 광범위 항생제를 믹스해서 투여하는 게 최선이에요.”

“광범위 항생제에 효과는 확실한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임시방편이에요.”

클라라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혈액 배양 검사로 원인균을 찾아낼 때까지 환자가 버텨주길 바라는 거죠.”

클라라의 솔직한 대답에 레이먼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레이먼드에게 저스틴은 여러모로 각별했다.

처음으로 집도한 환자이자 VIP 환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저스틴이 죽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레이먼드에게 화살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수술 중 감염 관리를 못해서 패혈증이 생긴 것 아니냐.

수술만 끝나면 다냐.

수술 후 환자 관리는 제대로 안 하냐 등등.

만년 우등생인 그에게 주변의 질책과 질타는 반드시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수술로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런 케이스는 아주 드물어요. 더군다나 뇌수술 쪽과는 관련이 없고요.”

클라라가 선을 그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으므로 레이먼드가 입을 꼭 다물었다.

“이 환자는 저희 과로 전원시킬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클라라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라가 떠났음에도.

레이먼드와 준후는 그 자리에 남아서 하염없이 저스틴을 내려다보았다.

의식을 잃은 아이는 여전히 고통스러워보였다.

구겨진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착용하고 있는 산소마스크에 뿌연 김이 서려 있었다.

뚝. 뚝. 뚝.

수액 점적통에서는 광범위 항생제가 섞인 수액 방울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 녀석 덕을 볼 때도 있잖아?’

레이먼드는 준후를 힐끔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스틴이 패혈증 확진 판정을 받았는데도 준후는 밍기적거리는 태도만 보여주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놈이 예전 일로 나한테 복수를 하는구나.

환자를 치료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구나.

하지만 착각이었다.

준후는 의외로 감염 내과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패혈증을 외과인 우리가 왜 치료하냐는 논리였다.

물론 외과에서 패혈증 치료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내과.

그중에서도 패혈증을 전문으로 보는 감염 내과의 도움을 받겠다는 선택은 탁월했다.

다니엘도, 레이먼드도 그 단순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환자 상태가 심각하다 보니 당황했고 정신이 없었다.

또 신경외과 환자다 보니 자체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만약 자체적으로 치료를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환자의 상태는 분명 더 악화됐을 것이다.

만약 교수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다들 레이먼드를 비웃었을 것이다.

준후가 했던 것처럼 감염내과 협진을 받으라는 조언을 남겼을 것이다.

레이먼드는 준후의 냉철한 판단에 감탄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준후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먼드라는 인간의 정체성은 ‘내가 제일 잘 났어’라는 토대 위에 만들어졌다.

그 토대가 무너지면 레이먼드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우리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은데 안 가냐?”

“난 좀 더 지켜보다 간다.”

“좋을 대로.”

레이먼드가 떠나자 준후는 침상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실 신경외과의가 패혈증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서전의 업무는 가르고 자르고 봉합하는 것이었다.

전신 감염증을 앓는 환자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하지만 말이다.

‘무공을 쓰는 외과 의사’라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지 몰랐다.

준후는 이 기회에 패혈증을 꼭 정복하고 싶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신경외과 수술 후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환자를 이따금 지켜봐야 했다.

그때는 차마 치료할 생각을 못했다.

병원 업무와 스승의 논문을 공부하느라 너무 바빴다.

엄밀히 말하면 패혈증이 신경외과 영역이 아니라 반쯤 치료를 포기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미국은 시간 여유가 충분했다.

무엇보다 신경외과 수술 후 패혈증이 발생했다면 신경외과에 책임 소재가 완전히 없다고도 볼 수 없었다.

준후는 주변을 재빨리 훑고서.

저스틴의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이건 아닌가? 오히려 독이 되려나?’

준후답지 않게 행동이 굼떴다.

저스틴에게 내공 수액술을 펼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내공 수액술.

그 과정과 역할은 다음과 같았다.

1) 환자의 심장에 내공을 불어넣는다.

2) 펌핑하는 심장이 전신 혈관에 내공을 퍼뜨리면서 광범위한 치료 효과 또는 피로 회복 효과를 발휘한다.

평소라면 자신 있게 펼쳤겠지만 오늘은 왠지 주저하게 되었다.

치료 효과를 가진 내공이 염증 반응까지 상승시킬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시도하는 치료가 옳은 걸까.

이게 인체 실험과 뭐가 다를까.

그런 의문이 들면서 한 편으로는 정반대의 반론도 떠올랐다.

비록 저스틴을 희생해서라도.

패혈증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내면 앞으로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었다.

한 사람 VS 다수.

마음 속 저울이 수십 번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운데.

결심을 내린 준후가 행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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