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80화 (380/424)

380화

제73장 저질(5)

감염 내과 당직실.

클라라는 저스틴의 간호 기록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이 좁아지고 눈은 점점 가늘어졌다.

톡. 톡. 톡.

손가락은 규칙적으로 책상을 두들겨댔다.

항생제와 수액을 때려 박고 있음에도 아이의 상태는 좋아질 줄 몰랐다.

바이탈이 낭떠러지에 내몰린 듯 불안했다.

‘배양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 잘 버텨줬으면 좋으련만.’

클라라는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매만졌다.

신경외과 환자.

특히 소아 신경외과 환자는 유달리 패혈증 사망률이 높았다.

어린 몸으로 최소 4-6시간의 대수술을 견디다 보니 체력과 면역력이 확 떨어지는 탓이었다.

현대 의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건만 패혈증은 좀처럼 극복이 안 되고 있었다.

신속한 진단 방법도 정확한 치료 방법도 오리무중이었다.

감염 내과의로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최악의 경우 에크모(체외막 산소공급 장치)를 써보자. 아니면 항생제를 바꿔보거나.’

클라라가 만일을 대비하는데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신경외과의 준후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근데 당직실에는 무슨 일로…….”

클라라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저스틴은 이제 감염 내과 환자였다. 준후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혹시 바쁘신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거기 앉으세요.”

클라라가 가리킨 의자에 준후가 앉았다.

클라라는 한동안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무엇보다 준후의 눈동자가 맑아서 보기 좋았다.

클라라는 눈이 맑은 사람은 영혼도 맑다는 말을 믿는 편이었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 지원자시죠?”

클라라가 먼저 운을 뗐다.

“네. 교육받으려고 한국에서 넘어 왔습니다.”

“프로그램은 어때요?”

“다들 힘들어하는데 저는 할 만해요. 처음부터 독기를 품고 왔거든요.”

“사연이라도 있으신 가봐요?”

“사연 없는 사람이 있겠어요? 클라라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준후의 역질문에 클라라는 쓰게 웃었다.

분명히 있었다.

동료들에게 한 번도 꺼내지 못한 가슴 속 아픈 상처가. 그리고 그 상처가 클라라를 감염 내과로 이끌었다.

“감염 내과 당직은 어떤가요?”

“말라 죽는 느낌이랄까요? 외과의들은 수술이 끝나면 환자 관리가 다소 느슨해지잖아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내과 계열은 수술처럼 뭔가 마침표로 찍을 만한 게 없답니다. 간호기록지를 수시로 들여다보고 약과 주사제를 바꿔줘야 해요.”

“선생님이 보기에 저스틴이 호전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꿀 발린 소리를 할 수도 있었고 회초리처럼 매서운 소리를 할 수도 있었다.

클라라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냥 까놓고 말씀드릴게요.”

“바라던 바입니다.”

“비슷한 환자를 여러 번 치료해 봤는데 생존율은 50퍼센트 정도로 봐요.”

“패혈증 감염균을 일찍 발견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발견 안 됐나요?”

“제발 누가 좀 발견해 줬으면 좋겠네요. 배양 검사 결과 기다리다가 제 수명이 팍 줄기 전에.”

클라라가 준후에게 하소연을 했다. 괴롭다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선생님. 질문 하나만 더 드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패혈증 감염균에는 감염균마다 특징이 있겠죠?”

“당연히 그렇죠. 선생님들 수술하는 거랑 비슷해요. 메스라고 다 같은 메스 아니잖아요? 피부 가르는 메스가 있고, 신경이나 혈관 자르는 메스가 따로 있잖아요?”

“…….”

“감염균 특징에 따라 항생제를 맞춰서 쓰는 거죠. 그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배양 검사를 하는 거고.”

클라라의 대답에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낀 채 침묵에 빠졌다.

문득 클라라는 준후가 왜 이리 패혈증에 관심이 많은 걸까 싶었다.

본인 전공도 아닌데…….

“대화를 편하게 이끄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덕분에 감촉 같이 잊고 있었네요.”

“뭐를 잊으셨나요?”

“저랑 잡담을 나누고 싶어서 당직실까지 오신 건 아닐 테고. 용건이 있죠?”

“네. 맞아요. 용건 있습니다.”

준후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패혈증 환자 리스트를 받고 싶습니다. 잠깐 병실 구경도 하고 싶고요.”

* * *

드르르륵.

준후가 감염 내과 당직실을 나왔다.

준후의 손에 따끈따끈한 A4용지 뭉텅이가 들려 있었다.

준후가 슬쩍 첫 장을 내려다보았다.

첫 장에 패혈증 병원균 중 하나인 연쇄상구균으로 치료받는 환자의 목록이 나열되어 있었다.

똑. 똑. 똑.

가까운 병실에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호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병실에는 환자만 누워 있었다.

환자는 낮잠에 빠져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고 규칙적이었다.

환자의 팔뚝에 수액이 연결되어 있었다.

준후는 조심스럽게 환자의 가슴에 손바닥을 얹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흘려보냈다.

내공이 얇고 가는 실이 되어 환자의 혈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시간은 고작 1분여에 불과했다.

심장 박동으로 분출되는 혈관이 전신을 돌고 돌아오는 시간과 일치했다.

역할을 다한 내공은 혈액 속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하…… 역시 어렵네.’

만만치 않은 작업에 준후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까드득 소리가 병실에 울려 펴졌다.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준후는 저스틴에게 내공 심장술을 펼치지 않았다.

대의?

다수?

그런 것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한 사람의 존엄을 해칠 수는 없었다.

저스틴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유일무이한 인간이었다.

준후는 그 유일성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남은 숙제가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패혈증 치료에 내공 심장술을 사용 못 한다면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 했다.

지옥문은 그때 막 열렸다.

내공을 치료 목적이 아니라면 어디다가 써 먹는단 말인가.

점혈법은 딱히 용도가 없었으며.

검술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준후는 마치 어두운 동굴에 갇힌 듯했다.

그곳에서는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았다. 걸어도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준후를 이끌어 줄, 빛 한줄기조차 부재했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보네.

내공과 무공으로도.

강렬한 의지만으로도 불가능한 일은 있는 법이니까.

아마 어렴풋이 이런 예감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패혈증 치료에 손을 못 댔던 거고.

치료를 포기하고 나니 그럴듯한 변명과 핑계가 마구마구 샘솟았다.

오히려 패혈증을 치료하겠다는 기존의 각오가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스틴의 가슴에 얹었던 손을 떼려던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이른바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던 것이다.

꼭 내공으로 치료를 해야 하나?

내공으로 패혈증의 원인균을 알아내고 치료는 항생제로 해도 되는 거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어 보이긴 하지만 일단 도전해 보자.’

준후는 아주 소량의 내공만 저스틴의 심장으로 흘려보냈다.

같은 작업을 20번 가까이 반복했다.

그러자 깨닫는 바가 있었다.

저스틴의 전신 염증 반응이 복부에서 특히 더 심하다는 것.

염증 반응이 폭약이 터지듯 강렬하게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준후는 다급하게 가설을 세워봤다.

1) 패혈증 병원균은 종류가 다양하다.

2) 다양한 종류만큼 몸에 끼치는 영향도 다양하다.

3) 각 원인균이 몸에 일으키는 고유의 염증 반응을 내공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혈액 배양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원인균을 파악할 수 있다.

가설을 세웠으면 확인이 필요했다. 준후는 곧바로 클라라를 찾아갔다.

이미 혈액 배양 검사가 끝난 뒤 적합한 항생제를 맞고 있는 환자의 리스트를 받아냈다.

‘지금부터 하나씩 알아내는 거야. 패혈증 원인균에 따른 전신 염증 반응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회상을 마친 준후는 계속해서 환자에게 미약한 내공을 쏘아냈다.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내공의 민감도를 최대치로 올려야 했다.

집중력은 잠깐이라도 흩어져선 안 됐다.

식은땀이 났다가 마르면서 얼굴과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래도 준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은 자신을 한 단계 성장시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휴우.”

준후는 한숨을 쉬며 환자의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연쇄상구균으로 Iperacillin / Tazobactam 항생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그는 허리 피부 층에 염증 반응이 가장 강했다.

염증 반응의 형태는 폭우 같았다.

빗줄기 같은 균들이 전신 혈관을 내리치고 있었다.

실험을 마친 준후는 다음 병실로 이동했다.

같은 방식으로 패혈증 환자의 전신 염증 반응을 탐구했다.

패혈증 원인균이 많았기에.

염증 패턴은 다양했다.

누구는 폐에, 누구는 비뇨기계통에, 누구는 간 계통에 염증 반응이 집중되었다.

염증 패턴들도 폭탄, 폭우, 회오리, 분수 등으로 미묘하게 달랐다.

3시간 가까이 병실을 돌자 준후도 요령이 생겼다.

전신 염증의 패턴이 한눈에 보였다.

연쇄상구균, 포도상구균, 녹농균, 폐렴균, 진균 등등.

패혈증을 일으키는 각종 균들의 특징을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길고 험난했던 여정 끝에.

준후는 저스틴이 앓고 있는 패혈증 원인균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시작은 황당했지만 그 끝은 찬란했던 것이다.

패혈증의 주된 사망 원인.

그것은 혈액 배양 검사로 원인균을 알아내는 며칠 동안, 다소 부정확한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준후는 이를 내공으로 극복했다.

내공으로 각 원인균의 염증 패턴을 미리 파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신경외과 환자가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비극은 지켜보지 않아도 되리라.

드르르륵.

준후가 마지막 병실을 나왔다.

손에 들고 있는 인쇄물을 구겨서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둘러 저스틴이 있는 중환자실로 내달렸다.

남은 건 치료뿐이었다.

* * *

같은 시각, 중환자실.

클라라는 의사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저스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필 가장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광범위 항생제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바이탈이 다시 추락하고 있었다.

삐이이. 삐이이.

환자 감시 장치에서 흐르는 전자음이 불길했다.

“선생님. 저스틴은 꼭 살려야 해요. 제발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클라라 곁에서 하소연을 하는 사람은 보호자가 아니었다.

어디서 연락을 받고 나타났는지 레이먼드가 그녀보다 먼저 중환자실에 도착해 있었다.

“이 아이가 혹시 선생님 친척이에요?”

“아뇨. 그건 아니고 제가 집도를 했고 VIP의 자제분이라서요.”

“아. 네.”

레이먼드의 속물 같은 대답에 클라라가 혀를 찼다.

비록 오늘 처음 봤지만.

방금 대답으로 레이먼드라는 인간의 민낯을 완벽하게 다 본 듯했다.

“선생님. 항생제가 안 통하는 것 같은데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짧은 시간에 자주 바꾸면 안 되긴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별 도리가 없어 보네요.”

클라라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문제는 어떤 항생제를 쓰냐는 것이었다.

광범위 항생제에도 종류가 많았다.

그리고 이번에 항생제를 바꾼다면 다음번에 또 항생제를 바꾸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내성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클라라가 항생제 교체로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제3의 인물이 불쑥 클라라 곁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저스틴 상대가 더 악화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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