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제74장 스프링(1)
“보시다시피요.”
클라라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턱짓으로 환자 감시 장치를 가리켰다.
준후의 눈이 자연스레 환자 감시 장치로 향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항생제를 사용 중임에도 바이탈이 급감하고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는 저스틴의 두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이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치료 계획은 정하셨습니까?”
“한 번 투여한 항생제를 이렇게 빨리 교체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하지만 오늘은 예외가 되겠네요.”
“어떤 항생제를 쓸 거죠?”
“클로람페니콜이 좋겠어요.”
클로람페니콜은 일부 뇌수막염 또는 폐렴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광범위 항생제였다.
폐렴에서 시작되는 패혈증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고 환자가 뇌수술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클라라의 판단은 정석이었다.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를 테면 국영수를 중심으로 해서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는 느낌이랄까.
“선생님은 지금까지 뭐 하셨어요? 제가 준 패혈증 환자 리스트로.”
클라라가 준후를 쳐다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 기회에 패혈증 공부를 해봤습니다.”
“신경외과 서전인데 부지런하시네요. 전혀 상관없는 전공까지 공부하시고.”
“내 환자, 네 환자가 어디 있겠어요. 아프면 다 환자고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야죠.”
준후가 클라라와 잡담을 나누는 동안.
잠시 자리를 비웠던 레이먼드가 침상으로 돌아왔다. 레이먼드 손에 10cc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클로람페니콜 재어 왔습니다. 곧바로 수액에 믹스해 주면 되죠?”
“네.”
“잠깐만요. 선생님.”
준후가 다급하게 레이먼드의 앞을 가로 막았다.
준후의 돌발행동에 클라라와 레이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해? 비켜?”
“너야말로 빠져 있어. 선생님. 정말 클로람페니콜을 사용하는 게 맞을까요? 더 좋은 항생제가 있지 않을까요?”
준후가 호소하듯 말했다.
지난 몇 시간 고군분투하면서 내공으로 항생제의 염증 반응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준후였다.
그런 준후의 결론에 따르면.
저스틴은 E. coli(대장균)에 감염 되었고 복강에 염증 반응이 특히 심했다.
말하자면 클라라가 투여하려는 항생제는 효과가 없었다.
“전 주어진 정보 안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아마 다른 감염 내과의도 저랑 똑같은 판단을 했을 겁니다.”
클라라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가능성을 여러 가지 가능성은 열어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무슨 가능성이요?”
“예를 들면 세팔로스포린 계열 항생제를 사용한다던가.”
준후가 슬쩍 미끼를 던졌다.
세팔로스포린 계열은 복강 내 감염 및 대장균을 치료하는데 탁월한 항생제였다.
하지만 준후의 미끼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클라라가 팔짱을 끼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준후를 노려보았다.
“공부 좀 잠깐 했다고 아는 척하는 거예요? 제 앞에서 항생제를 논하시는 건 선 넘었죠.”
“…….”
“제가 수술방에서 선생님한테 수술 훈수 두면 기분 좋겠어요?”
“…….”
“애초에 환자는 복강이나 대장 내 감염이 생길 이유가 없다고요. 복부 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패혈증은 수술 부위와 상관없이 발생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기능이 떨어진 장기라면 어디라도 가능하죠.”
준후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대응했다.
클라라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이제 저스틴은 클라라의 환자였다.
치료의 권위 또한 준후보다 클라라가 월등하게 높았다.
항생제 치료를 하는데.
신경외과 서전이 더 믿음직스럽겠는가.
아니면 감염내과의가 더 믿음직스럽겠는가.
‘항상 이게 문제란 말이지.’
준후는 답답한 나머지 가슴에 창문을 만들고 싶었다.
내공과 무공.
현대 의학을 보조하는 사기 스킬.
서전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준후의 활약을 이끌어온 쌍두마차.
하지만 내공과 무공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내공과 무공으로 얻어낸 정보와 치료법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무림에서의 삶.
내공과 무공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설명한다고 믿어줄 리도 없고.
미친놈 소리만 안 들어도 천만다행이었다.
“너 완전 돌았구나?”
잠자코 있던 레이먼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감염 내과에 컨설턴트(협진) 넣자고 했던 게 너잖아. 근데 왜 선생님 말을 안 들어?”
“안 듣는 게 아니고 같이 생각을 해보자는 거지.”
“아니, 그러니까 생각할 게 뭐가 있냐고. 네가 클라라 선생님보다 잘난 게 뭐가 있는데?”
레이먼드의 추궁에 준후는 반박을 못했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표면상으로는 레이먼드의 말이 옳았다. 항생제 치료에 준후가 끼어 들 구석은 없었다.
“너 때문에 치료가 지연되고 있잖아. 빨리 비켜. 항생제 믹스하게.”
“…….”
“힘 싸움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준후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자 레이먼드가 한 손으로 준후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준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스틴을 살리려면.
세팔로스포린 계열 항생제를 투여해야 해.
하지만 말로는 안 통하고 몸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지에 몰린 준후는 가까스로 묘수를 발견했다.
결자해지란 말이 있다.
본인이 묶은 매듭은 본인이 풀어야한다는 인과응보의 의미가 담긴 사자성어였다.
이 소란이 왜 일어났을까.
바로 내공과 무공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란을 잠재우는 것 또한 내공과 무공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준후는 단전에 머물러 있던 내공을 끌어올렸다.
* * *
‘이 새끼는 몸이 바위인가? 꿈쩍도 안 하네?’
레이먼드는 준후를 밀쳐내려다가 실패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준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키와 덩치는 레이먼드가 더 큰데 정작 위압갑을 느끼는 건 레이먼드였다.
준후가 작정하고 버티면.
쫓아낼 수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야, 똥고집 좀 그만 부려라. 환자부터 치료하고 봐야할 거 아니야.”
“…….”
준후는 대답이 없었다. 레이먼드가 아닌 클라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착각인지 몰라도.
준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붉은 기운을 띤 것처럼 보였다.
준후의 몸에서 살기랄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에 레이먼드의 팔뚝에 소름이 돋고 솜털들이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선생님. 항생제요. 클로람페니콜 말고 세프타지딤으로 바꾸죠.”
클라라가 얼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먼드가 화들짝 놀랐다.
“네? 갑자기요?”
“생각해 보니까 세프타지딤을 사용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세프타지딤이면 세팔로스포린 계열 아니에요? 그럼 준후 말을 듣겠다는 거예요?”
“네.”
클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레이먼드는 크게 당황했다.
왜 뜬금없이 항생제를 바꾼단 말인가.
비록 레이먼드가 패혈증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의 생각에도 세프타지딤보다는 클로람페니콜이 더 유용한 것처럼 보였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새 항생제 가져와.”
준후가 레이먼드를 재촉했다.
하지만 레이먼드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저스틴은 레이먼드가 부스트 업 교육을 받으며 처음 집도한 환자이자 VIP 환자였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치료하고 싶었다.
“클라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요. 세프타지딤 사용하는 거 맞아요? 이게 최선이에요?”
“이제 선생님도 제 말을 안 듣는 건가요? 제가 그렇게 만만해요? 그냥 치료 그만둘까요?”
클라라가 까칠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재차 확인을 받았으니 레이먼드도 별수가 없었다.
그는 스테이션으로 이동해 세프타지딤 바이알에 생리 식염수를 믹스했다.
바이알을 흔들자 식염수와 항생제가 뒤섞였다.
레이먼드의 마음도 혼란스러웠던 건 덤이었다.
용해한 항생제를 주사기에 재고.
레이먼드는 침상으로 돌아갔다.
수액 세트 앞을 가로 막고 있던 준후는 어느새 자리를 피해 있었다.
본인의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레이먼드가 수액에 항생제를 믹스하고 가볍게 수액을 흔들었다.
방아쇠는 당겨졌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남은 건 저스틴이 회복되기를 하늘에 비는 것뿐이었다.
준후가 먼저 중환자실을 떠났다, 바람처럼.
레이먼드는 클라라와 함께 중환자실을 나왔다.
“선생님. 세파 계열 항생제를 써도 정말 괜찮은 거겠죠?”
“아마도요.”
“아마도?”
자신 없는 클라라의 대답에 레이먼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 하시면 어떻게 해요. 항생제 믹스까지 끝났는데. 심지어 지금부터는 항생제를 바꿀 수도 없잖아요.”
“그게…… 설명하기 힘든데요.”
클라라가 볼을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레이먼드한테 오더내릴 때는 세파 항생제를 사용하는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무 무책임한 발언 아닙니까? 치료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직감 같은 게 발동했나 보죠. 어차피 항생제 투여는 끝났고 되돌릴 수도 없어요. 좋은 결과를 기대해 봐요.”
레이먼드는 대답하지 않고 뒤로 고개를 돌렸다. 멀어지는 중환자실 입구를 힐끔 쳐다보았다.
* * *
중환자실을 벗어난 준후가 찾은 곳은 직원용 화장실이었다.
준후는 용변을 보는 칸에 다급하게 들어갔다.
“우웨웨웩! 우웨웨웩!”
구역질을 하는데 목구멍에서 검붉은 핏덩어리가 튀어 나왔다.
준후는 고통스러워하며 뒤틀리고 엉킨 혈액들을 다 토해냈다.
변기가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괴기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꼬인 속이 다 풀릴 때까지 구토를 하고 나서야 준후는 허리를 폈다.
퉤하고 붉은 침을 뱉어냈다.
휴지를 뽑아 입가를 닦았다.
준후는 변기 물을 내리고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가에는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고 토하면서 튄 핏방울이 얼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준후는 찬물로 세수를 했다.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
‘두 번은 없었으면 좋겠네.’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클라라를 설득하기 위해 준후가 사용한 무공은 바로…….
사안(邪眼)이었다.
사안을 직역하면 간사한 눈이라는 뜻으로.
준후가 동료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사용하는 정안(正眼)과는 정확히 반대편에 있는 무공이었다.
사안의 사용법은 간단했다.
타인을 통제하겠다는 사념을 내공에 실어 보내면 끝이었다.
하지만 이는 정파의 방식이 아닌 사파의 방식이었다.
준후의 청명한 심법과 내공과는 상극인 무공이었다.
그래서 방금 그 대가를 치렀다.
혈맥이 꼬이면서 피를 한 움큼 토해냈던 것이다.
본래 시계방향으로 돌던 내공의 흐름을 반시계 방향으로 역행시킨 탓이었다.
후유증이 심했지만.
준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클라라를 설득할 방법도.
항생제를 몰래 투여할 방법도 없었기에.
그래도 천신만고 끝에 세팔 계열 항생제를 투여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준후는 알았다.
치료의 방향이 옳았다는 것을.
이제 저스틴이 호전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패혈증 원인균을 내공으로 감별하게 될 줄이야.
뜻밖의 소득이네.
하지만 난 앞으로 더 많은 걸 배우겠지.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게 되겠지.
성호 형.
뇌사랑 식물인간 상태 치료법도 반드시 찾아내볼게. 날 믿어줘.
왼쪽 손목에 착용하고 있던 건강 팔찌를 쓰다듬으며.
준후가 화장실을 떠났다.
그로부터 8달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