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제74장 스프링(4)
오스틴의 집무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한 사내가 성난 발걸음으로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오스틴을 향해 직진했다.
쾅!
사내가 두 손으로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학과장님. 제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사내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오스틴을 응시했다.
사내의 이름은 헥터.
부스트 업 프로그램의 제2교수였다.
헥터가 무례한 행동을 잇달아 했음에도 오스틴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소문 한 번 빠르구만. 아직 자네한테 입도 뻥긋 안 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말이.”
헥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두개골 조기 유합 수술을 마친 헥터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정수리가 붙은 샴쌍둥이 환자가 입원했고 그 환자의 퍼스트 어시스트로 준후가 뽑혔다는 소식이었다.
“말이 안 될 건 또 뭔가?”
“환자의 CT와 MRI 영상을 보고 오는 길입니다. 분리 수술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난이도 말도 안 되더군요.”
“어떤 점에서?”
“아이들이 동맥 혈관까지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수술에 교육생을 퍼스트로 세우시다니요.”
헥터는 오스틴의 결정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준후가 지난 9개월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교수에 버금가는 실력을 뽐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말이다.
수술에 대한 이해도.
지난 수십 년 간 차곡차곡 쌓아올린 교수들의 경험과 노하우는 쫓아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분리 수술에 적임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헥터였다.
헥터는 오스틴의 수제자였다.
말하자면 준후가 차지한 자리는 원래 헥터의 것이어야 했다.
“자네 혹시 준후를 질투하는 건가?”
오스틴이 놀리듯이 물었다.
아니, 놀리는 게 분명했다. 이제 오스틴은 입뿐만 아니라 눈도 웃고 있었다.
“제가 교육생을 질투할 위치입니까?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메이유의 평판을 고려해 보세요. 퍼스트는 제가 서야 합니다.”
“솔직히 나도 인정해.”
“뭘 말씀이십니까?”
“전반적인 실력을 따졌을 때 자네가 준후보다 한 수 위인 것은 많아.”
“근데 왜 준후가 퍼스트죠?”
“준후는 자네가 갖지 못한 걸 가지고 있거든.”
오스틴의 대답이 아리송했다.
준후는 가지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스틴이 농담을 하는 건지.
진심을 이야기하는 건지.
농담 같은 진심을 건네는 건지.
진심 같은 농담을 하는 건지.
헥터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자네의 대답은 근본적으로 잘못됐지. 내 말은…… 이번 수술이야말로 자네가 아니라 준후가 퍼스트를 서야 한단 말이야.”
“하…….”
헥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답답한 나머지 헥터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오스틴을 바라보았다.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주십시오. 지금까지 하신 말들 다 추상적이고 모호하지 않습니까?”
“자네는 자네한테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지?”
“모르니까 여쭈는 거죠.”
“이 기회에 알아봐. 자네 힘으로. 물론 내가 정답을 떠먹여줄 수는 있어. 하지만 그건 별의미가 없을 테니까.”
오스틴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오스틴은 고집이 소 힘줄만큼 질긴 사람이었다.
본인이 옳다고 믿으면.
먼지 한 톨조차 양보가 없는 사람이었다.
즉, 헥터가 아무리 떠든다고 한들 분리 수술의 퍼스트 자리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침묵이 깊어지고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헥터가 모처럼 입을 뗐다.
“교수님. 분리 수술 방법은 결정하셨습니까?”
“결정까지는 아니지만 생각해둔 건 있지.”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말해봐.”
“준후랑 제가 각각 교수님께 분리 수술 방법을 찾아서 평가를 받는 겁니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쪽이 퍼스트를 서기로요.”
“교육생하고 경쟁을 하겠다고?”
오스틴이 놀랐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긴 소아 신경외과의 2인자가 되고서 헥터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온 건 몇 년 만이었다.
“경쟁이라고 하기에는 체급이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헥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그렇게 해. 그 이야기는 자네가 준후에게 직접하고.”
“의외로 순순히 받아주시네요.”
“누누이 말하지만 적어도 이번 수술에 관해서 자네는 준후를 못 이겨.”
“아주 준후, 준후 노래를 부르시는 군요.”
헥터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솔직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준후가 슈퍼 루키라고는 해도 감히 헥터와 견줄 레벨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스틴은 꾸역꾸역 준후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헥터는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의 실력이 준후보다 월등하다는 진실을.
준후를 향한 오스틴의 맹신이 그릇되었다는 사실을.
할 말을 다 했으므로.
헥터는 미련 없이 오스틴의 집무실을 떠났다.
* * *
“둘 중 누가 엠마고 누가 소피아인가요?”
준후의 질문에 조던과 스칼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 구별법을 물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
“그게 왜 궁금하신가요?”
“환자를 파악하는 건 의사의 기본이죠. 의학적으로는 혹시라도 투약 실수가 있을까봐 그렇습니다.”
“아. 네. 엠마가 얼굴이 좀 더 길쭉하고 소피아는 얼굴이 동글동글한 편입니다.”
“왠지 그럴 것 같더라고요.”
준후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스칼렛의 설명대로라면.
아이들의 손목에 채워진 입원 팔찌는 착용이 잘못되어 있었다.
엠마에게 소피아의 팔찌가, 소피아에게 엠마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준후는 아이의 팔찌를 서로 교체해 주었다.
“팔찌를 잘못 차고 있었네요?”
잠자코 있던 조던이 대화에 껴들었다. 그는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쌍둥이 얼굴이 비슷해서 스태프들이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메이유에서 이런 실수도 하는군요. 갑자기 믿음이 뚝 떨어지는데요?”
“여보. 그런 말 말아요. 선생님이 직접 와서 바로 잡았잖아요.”
“선생님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간호사한테 뭐라고 하는 거지.”
두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툭탁거렸는데 준후는 그들이 단순히 부부싸움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픈 아이를 키우다 보면 부모의 마음도 같이 병들고 만다.
소아 신경외과 근무를 하면서 준후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애석하게도 전염되는 것은 행복만이 아니었다.
불행도, 좌절도, 우울도, 고통도 서로에게 전염되기 마련이었다.
“분리 수술은 두 분이서 같이 결정하셨나요?”
“네. 의견은 조금 달랐지만요.”
“의견이 어떻게 달랐나요?”
“남편은 한 아이라도 확실하게 살리자고 했고 저는 두 아이를 모두 살려야 한다고 했어요.”
스칼렛이 대답했다.
조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스칼렛의 선택을 따르게 됐지만 아직 불만이 남아 있는 표정이었다.
지금의 선택을 하기까지.
부부가 얼마나 울고불고 화를 내며 싸웠을지가 제3자인 준후의 눈에도 훤했다.
확률이 낮은 최선이냐.
확률이 높은 차선이냐.
가뜩이나 어려운 문제인데 심지어 걸린 것이 자식의 목숨이라면 그 고충은 말로 다할 수 없었으리라.
“저는 말입니다.”
조던이 준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성공하고 부를 이루면 행복이 저절로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오로지 그 믿음만으로 살아왔죠.”
“…….”
“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깨달았습니다. 돈이 정말 중요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걸.”
조던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속마음을 밝히는 조던의 얼굴이 순간 수십 년은 늙어보였다.
무림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였는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준후는 떠올릴 수 없어 답답했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조던이 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다른 대형 병원은 두 아이를 다 살리는 분리 수술을 전부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메이유만 예외더군요. 이유가 있습니까?”
“집도를 맡은 오스틴 교수님 때문입니다. 항상 도전하시고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는 분이죠.”
“수술이 자신 있어서 맡았다는 건 아니네요?”
조던의 눈빛에 언뜻 실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안타깝지만 이 수술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서전은 아마 지구상에 없을 겁니다.”
준후가 힘없이 말했다.
기왕이면 보호자에게 용기를 팍팍 넣어주고 싶은데 도무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앞으로 10년 정도 더 지나면.
이렇게 어려운 분리 수술도 척척할 수 있는 최상승의 서전이 될 수 있을까.
문득 자신의 미래를 살짝 엿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준후였다.
“선생님. 수술 계획은 잡혔나요?”
이번에는 스칼렛이 물었다.
“아직입니다. 앞으로 최소한 2주는 보셔야 할 겁니다. 수술 방법과 스태프들도 확정을 지어야하고 사전 연습도 해야 해서요.”
“부디 잘 부탁드릴게요.”
“제 말을 어떤 식으로 해석할지는 모르겠지만…….”
조던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 수술에 성공한다면 저희 회사의 주식을 스태프분들께 일부 나눠드리겠습니다. 병원에 크게 기부도 하고요.”
“…….”
“제가 드릴 수 있는 인센티브는 이 정도뿐이네요.”
“됐습니다. 방금 들은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죠.”
준후가 허공에 휘휘 손을 저었다.
조던이 그동안 문제를 돈으로 해결해 왔음을 준후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아마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더 답답하고 불편하겠지.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인 돈이 종잇장처럼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한편으로 준후는 조던의 재력이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했다.
메이유에서 수술을 받을 정도면 부유층인 것은 확실한데…….
주식을 떼어줄 정도면 큰 기업의 임원인 듯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병실은 자주 들를 거고 수술 계획과 일정은 잡히는 대로 자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보호자와 대화를 마치고 준후는 병실을 나왔다.
병동 복도 끝에 위치한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밤 8시가 가까운 시각.
하늘은 어두웠고 높고 낮은 건물들이 등대처럼 빛을 밝히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세찬지.
길을 따라 심어놓은 가로수의 나뭇가지가 취한 듯 휘청거렸다.
소아 신경외과 교육이 끝나갈 무렵.
뜻밖의 고난을 마주했다.
정수리가 붙은 샴쌍둥이 분리 수술이라니…….
뉴스에서나 가끔 접하던 수술에 퍼스트를 맡게 될 줄이야.
준후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번 수술이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자신의 서전 인생에 큰 이정표가 되리라는 사실을.
조던의 가장 큰 무기가 돈이라면.
준후의 가장 큰 무기는 내공과 무공이었다.
그래서 이번 수술에 어떤 무공과 내공을 응용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검토해 보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이마에 주름만 늘어났다.
떠올린 무공들이 족족 제거되기 바빴다.
수술방에서.
스태프들 앞에서.
펼칠 수 있는 무공과 내공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준후는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드러낼 수 없어서 답답하고 외로웠다.
잠깐 머리를 식힐 겸.
준후는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조던의 이름을 검색창에 검색하려는데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좁고 빠른 보폭.
발소리가 일자로 나는 보폭.
상대는 준후에게 용건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