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제75장 레디(1)
헥터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의사 가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헥터의 손에 들린 것은 희고 가느다란 튜브였다.
채혈할 때 사용하는 토니켓(고무줄)을 더 얇고 작게 만들어놓은 형태였다.
몇몇 교육생이 ‘저게 어디에 쓰는 물건이고?’하는 표정으로 튜브에 집중했다.
“이건 인공 혈관입니다.”
헥터가 인공혈관을 좌우로 잡아당기며 말을 계속했다.
혈관이 길고 탄력 있게 늘어났다.
“얼마 전에 개발된 뇌혈관 전용 인공혈관이라 아마 형태가 익숙하지 않은 분이 많을 겁니다.”
“…….”
“쌍둥이가 공유하고 있는 뇌동맥을 절개한 뒤 이 인공혈관으로 새로운 혈관을 만들어 주는 게 제 수술 방법입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깔끔한 설명.
교육생들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헥터를 응시했다. 일부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왜지? 대체 왜…….’
헥터는 애가 탔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오스틴과 눈을 마주쳤는데 오스틴은 별 반응 없이 덤덤했다.
표정에 색깔이 없었다.
헥터가 회심의 수술법을 설명했거늘!
설마 자신의 방법이 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오스틴은 일부러 칭찬을 아끼고 있는 걸까.
그래서 헥터는 선수를 쳤다.
“학과장님.”
“왜?”
“제 수술법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일단 준후의 발표부터 들어보지. 준후, 단상으로.”
발표를 마친 헥터가 단상을 내려갔고 발표를 해야 하는 준후가 단상으로 올라갔다.
준후와 교차할 때.
헥터는 준후를 향해 연민의 눈빛을 쏘았다.
그동안 힘껏 발버둥을 쳤겠지만.
달라진 것은 없으리라.
이번 경쟁에서 준비 시간도, 경험도, 의료 지식도, 그 어떤 것도 준후의 편이 아니었다.
준후에게 남은 것은 침몰뿐이었다.
* * *
“흠흠.”
단상에 올라선 준후가 헛기침을 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스태프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아무래도 독자적인 수술법을 발표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맥스웰이 트윙키 먹는 모습을 보고 수술의 실마리를 얻은 뒤.
준후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목적지를 찾는 것만큼이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고 중요했다.
지난밤을 지새운 끝에 준후는 가까스로 꽤 그럴싸한 수술법은 만들어낼 수 있었다.
부디 학과장님이나 다른 스태프들도 이 수술법을 그럴싸하게 느껴야 할 텐데…….
“제 수술법은 헥터 교수님보다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준후가 칠판을 이동해 보드 펜을 손에 쥐었다.
칠판에 한 일(一)자를 그었다.
과연 헥터에 맞서는 준후의 이론은 무엇일까, 발표를 듣는 스태프들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쌍둥이가 공유하고 있는 뇌동맥을 절개하는 작업은 저도 헥터 교수님과 같습니다.”
준후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한 일자의 중간을 칠판지우개로 지우고 두 개의 화살표(↰,↳)를 그렸다.
절개한 혈관이 분리된다는 점을 강조한 그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준후가 맥스웰에게 힌트를 얻은 부분이었다.
맥스웰이 트윙키를 반으로 가른 것처럼, 혈관을 반으로 갈라야겠다는 생각을 준후는 그 전에는 하지 못했다.
그때는 어떻게든 혈관을 연결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다만 저는 인공혈관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혈관만 사용할 겁니다.”
“그건 헛소리야!”
헥터가 기다렸다는 듯 반박에 나섰다.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가 컨퍼런스 룸에 울려 퍼졌다.
“절개한 중대뇌동맥은 짧아져서 다른 혈관과 연결할 수 없어. 내가 인공 혈관을 사용한 이유가 뭔지 알아?”
“…….”
“길이의 제약을 받지 않아서라고.”
“교수님. 제 발표 시간입니다. 끼어들지 말아주시죠? 그리고 반론을 한다면 최소한 발표가 끝난 뒤에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준후가 꾸짖는 말투로 헥터에게 경고를 주었다.
헥터는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날카로웠다.
“저는 환자의 요골동맥(앞팔동맥)을 채취할 겁니다.”
“…….”
“요골동맥을 중대 뇌동맥에 문합하면 혈관 길이가 늘어나겠죠? 그렇게 길이가 늘어난 중대 뇌동맥을 다시 윌리스 환에 연결해 주는 게 수술의 목표입니다.”
준후가 발표를 마쳤다.
하지만 발표 후의 반응은 헥터 때와 달리 싸늘했다. 스태프들은 입이 아니라 몸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게 정말 가능하겠어?
수술을 판타지로 하겠다는 건가?
불신과 의심의 기운이 컨퍼런스 룸에 팽창하기 시작했다.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술의 개발자이긴 했지만.
자신의 수술이 유토피아처럼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준후는 잘 알았다.
환자는 3세 아동이었다.
다 자라지 않은 뇌혈관은 아직 얇고 가늘었다.
성인의 뇌동맥이 나무의 가지라면 아이의 뇌동맥은 잔 가지였다.
그만큼 연약해서 다치기 쉬웠다.
혈관을 문합하는 도중 언제 어떻게 파열이나 출혈이 발생할지 몰랐다.
“준후. 뭐 한 가지만 물어보지.”
그동안 잠자코 있던 오스틴이 입을 뗐다.
“네. 학과장님.”
“요골동맥과 중대뇌동맥의 폭과 길이는 맞춰봤나?”
“네. CT 영상으로 다 맞춰봤습니다. 두 혈관의 폭은 거의 비슷합니다. 요골동맥을 5센티미터 정도 채취하면 윌리스 환에 닿을 수 있다는 것도 계산해 봤습니다.”
준후가 번개처럼 대답했다.
오스틴은 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스태프들의 이목은 오스틴에게 집중되었다.
오스틴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서 오늘 발표의 성과가 결정되었다.
그래서일까.
준후와 헥터는 복싱 경기를 마친 복싱 선수 같았고.
컨퍼런스 룸은 사각 링 같았고.
오스틴은 심판 같았다.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오스틴이 결국 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었다.
* * *
오전 컨퍼런스가 끝난 뒤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학과장님.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헥터가 학과장실로 향하는 오스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헥터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귓불마저 붉은 기운을 띠었다.
“어째서 준후의 편을 들어주셨습니까? 누가 봐도 제 수술법이 월등하고 안전하지 않습니까?”
헥터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말했다.
놀랍게도 발표의 승자는 준후였다. 교수인 헥터를 준후가 제쳤던 것이다.
오스틴의 결과 발표 당시.
스태프들은 충격을 받았고 헥터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스틴이 억지로 자신을 밀어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3세 아이의 뇌동맥을 자가 혈관으로 봉합하겠다니요. 말로야 누군들 못합니까.”
헥터가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봉합하다가 혈관이 터지면 어떻게 할 겁니까? 대체할 혈관이 없지 않습니까?”
“…….”
“인공혈관을 쓰면 혈관이 터지더라도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잖아요.”
“이봐. 헥터.”
오스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학과장님.”
“계속 인공혈관, 인공혈관 노래를 부르는데 인공혈관은 정말 그렇게 안전한가?”
오스틴의 매서운 지적에 헥터가 뜨끔했다.
사실 인공혈관이 만능은 아니었다.
흉부외과나 소화기 외과 분야면 모를까, 신경외과에서는 아직 안정성 검증이 끝나지 않았다.
혈전 생성.
불안정한 혈류 유입 속도.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인공혈관에 대한 찬반이 갈리고 있었다.
“원래 100퍼센트 안전한 수술이라는 건 없지 않습니까?”
헥터가 당황한 감정을 추스르며 반박에 나섰다.
“인공 혈관을 사용 했을 때의 안정성. 그리고 자가 혈관을 사용했을 때의 안정성.”
“…….”
“두 가지를 비교했을 때, 전자의 안정성이 압도적입니다.”
“쯧쯧쯧. 자네는 내 예상을 티끌만큼도 못 벗어나는 군.”
오스틴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오스틴이 못마땅한 건 헥터도 마찬가지였다.
헥터의 눈에는 오스틴이 그저 준후를 편애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약 오스틴의 목적이.
헥터를 열 받게 하는 것이라면 목적은 이미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질문을 바꿔보지.”
“그러시죠.”
“인공혈관은 일종의 상수야. 장점과 단점에 한계가 정해져 있어. 내 말이 틀렸나?”
“아니요. 맞습니다.”
헥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오스틴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 하면서.
“하지만 자가 혈관은 변수가 많아. 물론 수술 위험도는 높겠지만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 값이 훨씬 크지.”
“…….”
“서전이라면 말이야. 본인 실력을 성장시켜야 해. 역량을 키워서 후자의 기댓값을 높여야 한다고.”
“하지만 위험은 최대한 피해야…….”
근거를 대려던 헥터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오스틴이 헥터의 말을 중간에 잘라 먹었던 것이다.
“물론 위험을 피해야 할 때도 있어. 하지만 이번 케이스는 원래 위험한 케이스야. 우린 다른 병원들이 다 거절한 수술을 맡았다고.”
“…….”
“난 이번 수술을 통해 자네에게 싸워야 할 때 싸우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어.”
“…….”
“어떻게냐고?”
“…….”
“자네와 정반대 성향인 준후를 통해서 말일세.”
설명을 듣고 보니.
헥터는 오스틴이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어떤 깨달음을 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 것도 같았다.
비록 묘사를 할 만큼 선명하게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생각이 정리되면 오스틴의 의도를 십분 이해할 수 있을 듯 했다.
“혹시 내가 아직도 준후 편을 든다고 생각하나?”
오스틴이 대화 주제를 바꿨다.
“편을 드는 게…… 맞지 않습니까? 준후를 통해서 저를 가르치고 싶다고 하셨으니까요.”
“그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려. 메일을 한 번 확인해 봐.”
자기 할 말만 하고 오스틴이 자리를 벗어났다.
헥터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오스틴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늦게 휴대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1시간 전에 보낸 메일이었다.
예약으로 보낸 듯했다.
‘갑자기 왜 메일을 보내셨지? 할 말이 있으면 방금 하셨으면 됐는데?’
헥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일을 확인했다.
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찬찬히 훑었다.
파일은 이번 쌍둥이 수술을 오스틴이 정리해놓은 것이었다.
파일을 읽는 동안.
헥터의 이마에 지렁이 주름이 늘어만 갔다.
“하…….”
정신없이 탐독을 마치고서 헥터는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오스틴이 생각한 수술과 준후가 생각한 수술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논문에 기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준후가 소아 신경외과 권위자인 오스틴과 같은 길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실로 경이로운 사고력이었다.
준후 때문에 헥터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그동안 난 대체 뭘 수련한 거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스틴이 말한 대로 오스틴은 단순히 준후의 편을 든 것이 아니었다.
오스틴은 준후가 쌍둥이 분리 수술을 발표하기 전에 이미 메일을 보냈다.
그러니까 오스틴이 준후의 수술법을 선택한 것은 준후가 예뻐서가 아니었다.
본인이 내린 결론과 준후의 결론이 같아서였던 것이다.
오스틴은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착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학과장님께도, 준후에게도 완패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