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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87화 (387/424)

387화

제75장 레디(2)

그날 오후.

준후는 오스틴의 부름을 받아 학과장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오스틴이 앉아 있었다.

“교수님. 제가 생각한 수술법이 맞는 겁니까?”

준후가 대뜸 물었다.

쌍둥이 수술법 발표가 끝난 직후, 오스틴은 놀랍게도 준후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준후는 선택을 받고도 당황했다.

준후가 떠올린 자가혈관 문합술은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확신할 수 없었고, 정확도나 안정성을 검증할 수단조차 없었다.

“중간 중간 생략된 부분이 많지만 큰 줄기는 내가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더구나.”

“그럼 교수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다는 건가요?”

오스틴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준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솔직히 학과장님이 일부러 제 편을 들어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헥터 교수에게 무언가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혹독하게 대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호오. 거기까지 꿰뚫어 봤구나.”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거든요.”

‘무림에서’라는 말을 준후는 속으로 삼켰다.

헥터가 오스틴 때문에 고생하듯.

준후도 무림맹주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었다.

좋은 스승은 때때로 제자에게 힘든 시련을 주거나 제자를 괴롭히곤 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은 성장에 필수요소였다.

“한 1, 2년 정도 됐을 거다.”

오스틴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헥터 녀석, 언제부턴가 자기 실력에 안주하고 공부를 안 했단 말이지. 어떻게 보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도 할까?”

“제 눈에는 그렇게 안 보였는데요?”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준후, 넌 헥터의 예전 모습을 못 봐서 그런 말을 하는 거란다. 과로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스스로를 혹사 시켰던 게 헥터였어.”

“…….”

“물론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눈빛이 죽어 있는 건 문제가 되지.”

“눈빛은 저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준후가 모처럼 맞장구를 쳤다.

눈은 영혼의 창문이었다.

눈이 위를 보느냐.

아래를 보느냐.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 등등.

눈은 그 사람의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어쨌거나 오늘 발표는 아주 훌륭했다. 난 네가 기권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지?”

오스틴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준후 쪽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기도 했다.

“제가 집도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학과장님도, 헥터 교수도 제 곁에 없다고 상상했죠.”

준후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한마디로 환자와 보호자가 오직 저에게만 기대고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

“제가 수술을 포기하면 환자와 보호자는 누구에게 기대겠어요?”

“허…….”

“마인드를 바꾸니까 수술을 포기하는 게 오히려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덤볐죠.”

말을 마치고서 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수술법을 찾아 방황하던 지난 3일은 준후에게 지옥이었다.

비록 고생한 열매는 달았지만.

그때만 떠올리면 속에서 신물이 올라올 만큼 괴로웠다.

“나도 제법 환자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너는 나보다 한술 더 뜨는구나.”

“…….”

“네가 다른 교육생보다 어떻게 그렇게 탁월하게 성장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

오스틴이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럼 앞으로 수술은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준후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준후와 헥터의 수술법 발표는 코스 요리로 따지면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앞으로 펼쳐질 코스들이야말로 진짜배기였다.

헥터가 완성한 분리 수술법은 무엇인가.

스태프들은 어떻게 꾸릴 것인가.

수술 날짜는 언제로 잡을 것인가 등등.

준후는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것이 많아서 입이 근질거렸다.

“서두를 필요 없어. 내일이면 다 알게 될 테니까.”

“너무 신비주의로 가시는 것 아닙니까?”

“넌 늙은이한테 궁금한 것도 많구나.”

준후의 농담을 오스틴도 농담으로 받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킬킬거렸다.

전부터 느낀 건데 준후는 오스틴과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

스태프들을 대하는 태도.

안전한 차선보다는 다소 불안전한 최선을 택하는 수술 방식 등등.

부디 내년부터 수련하는 수부외과 학과장도 오스틴처럼 좋은 사람이면 좋을 텐데.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보렴.”

“그럼 이번 수술에서 헥터 교수는 완전히 배제하는 건가요?”

“아니, 세컨드로 세울 예정이란다.”

헥터의 결정에 준후가 눈썹을 치켜떴다.

과연 이게 맞나 싶었던 것이다.

“제가 퍼스트고 헥터 교수가 세컨드면 말입니다. 헥터 교수 자존심이 많이 상할 텐데요.”

“자존심은 오늘 오전에 충분히 구겼지.”

“그래도 한 번 구기는 것과 두 번 구기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구겨진 자존심을 펴는 것도 서전에게 필요한 덕목이란다. 만약 헥터가 세컨드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못한다면요?”

“헥터의 그릇은 딱 거기까지인 셈이지. 난 앞으로 헥터를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다.”

오스틴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을 물리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과연 호랑이 스승다운 판단이었다.

만약 나중에 자신이 스승이 되고 제자를 기른다면 어떤 식으로 교육해야 할까.

준후로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대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할 말이 있었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퍼스트와 세컨드는 정해졌고. 마지막으로 써드 어시스트가 남았어.”

“교수님께서 편하게 정해주세요.”

“아니, 그럼 재미없지.”

오스틴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저 웃음을 준후는 예전에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꽤 곤혹을 치렀었다.

“써드 어시스트는 준후, 네가 직접 뽑거라. 교육생 중 한 명으로.”

* * *

부스트 업 프로그램 하루 일정이 끝났다.

준후는 본관을 나와 기숙사 쪽으로 걸었다.

선선한 늦가을 바람에 의사 가운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보도 양 옆으로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다.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을 청소 직원이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쓱싹쓱싹하는 빗질 소리가 경쾌했다.

메이유에 근무한 게 엊그제 같거늘 벌써 9개월이란 시간이 지나 버렸다.

교육은 막바지로 치달았으며 내년부터는 수부외과 수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같은 속도라면.

메이유에서 보내야 하는 나머지 6년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듯싶었다.

‘어시스트를 직접 뽑으란 말이지?’

걷는 동안 준후는 오스틴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실 써드 어시스트는 오스틴이 알아서 뽑으면 그만이었다.

그 누가 감히 오스틴의 결정에 토를 달겠는가.

하지만 오스틴은 자신이 하면 편할 일을, 아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준후에게 떠넘겼다.

웃는 낯으로 재미를 운운했지만.

오스틴이 정말 재미있자고 준후에게 선택권을 준 것은 아닐 것이다.

‘헥터 교수를 시험한 것처럼 나도 시험을 하고 있는 건가?’

준후는 왠지 그런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말이다.

준후에게 어시스트 선택권을 주는 것으로.

오스틴은 대체 준후의 어떤 자질을 시험하고 싶어 하는지를 준후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오스틴은 아직 준후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는 노련한 서전이었다.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도 준후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오스틴이 정한 기한은 오늘 밤 9시.

그때까지는 써드 어시스트를 오스틴에게 통보를 해줘야 했다.

기숙사 방으로 들어가 준후는 라면 포트기에 물을 받고 물을 끓였다.

마트에서 구입한 한국 컵라면에 포장을 뜯고 스프를 쏟았다.

하루 종일 바빴던 데다가 신경 쓸 일도 많았던 탓에 매운 음식이 당겼다.

똑. 똑. 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소리.

침대에 걸터앉았던 준후가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바깥에 올리버와 맥스웰이 서 있었다.

“피자 사 왔는데 같이 먹자.”

“그래. 들어와.”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와 바닥에 앉았다. 피자 포장지를 열자 고소한 치즈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피자를 나눠먹는 동안.

맥스웰과 올리버는 오전 컨퍼런스에 준후가 보여준 활약에 대해 떠들어댔다.

설마 헥터 교수를 이론으로 찍어 누를 줄은 몰랐다.

오스틴이 준후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

다른 교육생들 경악한 표정은 잘 봤냐.

나아가서 분리 수술에 퍼스트 어시스트로 뽑혔는데 긴장은 안 되냐 등등.

친구들의 관심이 준후는 고마웠다.

동료란 무엇일까.

동료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해주는 사람이 동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올리버와 맥스웰은 준후의 진짜 동료였다. 두 사람 덕분에 타지에서 보내는 외과의 생활이 덜 외로웠다.

“근데 아까부터 표정이 영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맥스웰이 준후를 쳐다보며 물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학과장님한테 숙제를 받았거든.”

“무슨 숙제?”

“써드 어시스트를 교육생 중에 뽑으라고 하시네?”

“뭐야? 그런 걸 걱정이라고 했어?”

맥스웰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준후의 어깨를 툭 쳤다.

“그 문제라면 당연히 내가 주인공이지. 나 요즘 집도에 물 오른 거 알지? 네가 가르쳐 준 손가락 단련법으로 확 치고 올라간 거.”

맥스웰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지난 9개월 동안 준후가 가르쳐 준 쇄지공을 꾸준히 단련한 결과.

교육생 중에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준후. 나도 어시스트 하고 싶어.”

올리버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올리버는 먹으려던 피자 조각을 내려놓으며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이건 아버지께 다시 인정받을 절호의 찬스야. 심지어 저번하고 다르게 아버지와 한 공간에서 수술을 하는 거잖아?”

상상만 해도 벅차다는 듯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떴다.

써드 어시스트를 뽑는다면.

확실히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하는 게 무난했다.

둘 다 실력이 최상급이었고.

준후와 마음도 잘 맞았다.

더군다나 수술을 잘해보고 싶다는 의욕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두 사람 다 고르면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미안한데 조금 더 고민하고 결정해 볼게.”

“그래. 시간은 아직 있으니까.”

“누가 선택을 받더라도 원망하기 없기다?”

올리버와 맥스웰이 김칫국부터 마셔댔다.

두 사람이 떠난 후.

준후는 턱을 쓸어내리며 방 안을 서성거렸다.

써드 어시스트를 선택하는 일이 오스틴의 시험이라면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해 보자.

내가 오스틴 교수라면 대체 왜 이런 숙제를 내줬을까.

보통은 별 고민 없이 실력 있는 주변 친구를 고르는 게 당연할 텐데.

한참을 고민하던 준후는 가까스로 오스틴의 의도를 읽어냈다.

오스틴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헥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완전히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원.’

준후는 피식 웃으며 기숙사 방을 나왔다. 복도를 가로지르다가 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한 청년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청년은 준후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와락 얼굴을 구겼다.

‘네가 여길 왜 왔는데?’라는 불쾌한 빛의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청년의 이름은 레이먼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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