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88화 (388/424)

388화

제75장 레디(3)

“무슨 일인데?”

레이먼드는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하게도 레이먼드는 준후를 싫어했다.

메이유 클리닉 신경외과에서 수련하는 내내 최고의 천재로 인정받아온 이가 레이먼드였다.

그런데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레이먼드는 늘 준후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쪽지 시험, 집도 성적, 교수 평판, 환자와 보호자의 호감도 등등.

무엇 하나 준후를 앞서나가는 부분이 없었다.

레이먼드에게 준후란 열등감과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방아쇠였다.

준후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아니, 준후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레이먼드는 창자가 뒤틀리고 속에서 불길이 치밀어 올랐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난 너랑 할 말 없어.”

“5분 정도면 돼. 오래 걸리지 않아.”

레이먼드는 대답하지 않고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준후도 알 것이다.

자신이 준후를 싫어하는 사실을.

실제로 준후도 레이먼드를 싫어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더 이해가 안 갔다.

의국이나 병동도 아니고, 기숙사라는 사적인 공간에 찾아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걸까.

“거기로 가자.”

“그래.”

방을 나온 레이먼드가 앞장서고 그 뒤를 준후가 뒤따랐다.

오늘은 시기나 질투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던 레이먼드였다.

기숙사 복도를 통과하자 넓은 홀이 나타났다. 정면에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좌측에 교육생들을 위한 휴게 공간이 있었다.

3개의 소파와 음료 자판기가 놓여 있었다.

레이먼드가 먼저 소파에 앉았고 맞은편에 준후가 앉았다.

“쌍둥이 분리 수술은 어때? 준비 잘 되냐?”

“이제 시작이지. 스태프도 아직 안 정해졌고 수술법도 못 읽어 봤어.”

“하긴 보통 어려운 수술이 아니니까. 서전 인생에 한 번 할까 말한 수술이기도 하고.”

레이먼드가 다리를 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먼드는 모처럼 준후를 향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감탄이었다.

그 어려운 분리 수술에 제1어시스트를 하겠다고 학과장을 만나 담판을 짓지를 않나.

제1어시스트 자리를 두고 교수와 논쟁을 벌여 그 자리를 차지하지를 않나.

가끔 준후는 전차처럼 맹렬하게 돌진하곤 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본론부터 꺼내봐.”

“넌 쌍둥이 분리 수술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환자나 보호자의 처지가 딱하다는 정도? 애초에 내가 낀 수술도 아닌데 깊이 고민할 필요 없잖아?”

“만약 네가 낀다면?”

“뭐,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지겠, 잠깐, 내가 낀다고?”

준후의 질문에서 레이먼드는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서 꼬았던 다리를 풀고 준후 쪽으로 상체를 가까이 했다.

무언가 큰 게 오고 있었다.

“분리 수술 어시스트에 한 자리가 남아. 써드 어시스트가. 난 써드에 네가 들어갔으면 좋겠다.”

“너 지금 나 놀리냐?”

“나는 누구처럼 다른 사람 놀리는데 취미 없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레이먼드는 준후의 제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현 상황을 비유하자면 이랬다.

한 동네에 철천지원수 두 명이 있다.

그런데 원수 중 한 명이 다른 원수에게 선뜻 좋은 취직 자리를 알아봐 준 것이다.

이 녀석,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혹시 숨겨둔 사악한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내가 분리 수술 어시스트에 들어가서 실수하고 커리어를 망치기라도 바라고 있는 건가?

“써드 어시스트가 교수님이 아니고 교육생이야?”

“오스틴 교수님이 무조건 교육생 중에 뽑으라고 하셨어.”

“교육생이라면 나 말고도 많잖아. 특히 네가 친하게 지내는 맥스웰이나 올리버도 있고.”

레이먼드는 끈질기게 묻고 끈질기게 의심했다.

초콜릿은 달지만 먹다 보면 이가 썩게 된다.

“굳이 사이도 안 좋은 내게 써드를 제안하는 이유가 뭔데?”

“감정적인 면까지 고려한다면 당연히 올리버나 맥스웰하고 수술하는 게 맞지.”

“그래. 내 말이 그거라고!”

레이먼드의 고개가 세차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드디어 준후의 입에서 본심이 나올 모양이었다.

레이먼드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근데 난 네가 써드를 맡아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니까? 사람 속 터지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이유는 심플해.”

준후가 피식 웃었다.

“나를 제외하면 교육생 중에 네가 실력이 제일 좋으니까.”

“내 실력이 제일 좋다고?”

“당연하지. 그건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사실 아닌가?”

준후의 뜬금없는 칭찬을 좋아해야 하는지.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야 하는 건지 레이먼드는 순간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오로지 실력만 보고 널 뽑았다는 거다.”

“…….”

“분리 수술에 성공하고 쌍둥이를 살리려면 솜씨가 가장 뛰어난 스태프가 곁에 있어야 해. 솔직히 나도 널 싫어하긴 하지만 수술에서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하는 게 맞겠지.”

준후가 야무진 목소리로 속사포 같은 설명을 쏟아냈다.

이제는 레이먼드도 준후의 진심을 알 것 같았다.

‘참 나, 뭐 이런 게 다 있어?’

레이먼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만약 레이먼드가 준후 입장이었다면, 결코 준후를 써드 어시스트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어떤 서전이 싫어하는 인간 옆에서 12시간도 넘는 수술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데 준후는 오직 환자의 경과만 보고 레이먼드를 뽑았다.

본인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환자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할 건데?”

주도권을 쥔 레이먼드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말투에 은근한 거만함이 묻어났다.

“허락할 때까지 괴롭혀야지.”

“그냥 네 친구들 어시스트 세우면 되잖아? 내가 거절했으면 명분도 생길 테고.”

“난 그저 최고의 수술을 하고 싶을 뿐이야.”

“아주 오랜만이네. 나한테 주도권이 생긴 게.”

레이먼드는 생글 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준후를 지나쳤다.

그러다가 발길을 돌리며 준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날 선택한 거 후회하지 않을 거다.”

* * *

그날 저녁.

레이먼드와 대화를 마치고 준후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베란다 앞에 서서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까만 하늘에 넉넉한 보름달이 떴다. 주변에 있는 병원 건물이 등대처럼 밝은 빛을 뿜어냈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이 장난치듯 준후의 머리카락을 뒤흔들고 도망쳤다.

학과장 오스틴이 내준 숙제를 준후는 잘 해결했다고 믿었다.

-교육생 중 누구를 옆자리에 세울래?

오스틴이 내준 숙제의 요점은 간단했다.

준후에게 수술에 알맞은 스태프를 고를 줄 아는 선구안이 있냐는 것이었다.

분리수술이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수술 난이도가 조금만 낮았다면.

준후는 맥스웰을 써드로 꼽았을 것이다.

말도 잘 통했으며 쇄지공으로 실력도 급상승했기에.

하지만 분리 수술에 더 적합한 인재는 레이먼드였다. 미운 감정과는 별개로 레이먼드는 교육생 중 실력이 가장 뛰어났다.

그리고 분리 수술에 필요한 건 단 하나.

오로지 실력이었다.

‘좀 더 튕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넘어갔네.’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 레이먼드는 준후가 내심 본인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뿌듯했을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니까.

설령 그 칭찬이 원수나 라이벌에게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기분 전환을 하던 준후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쌍둥이 부모의 이름을 검색창에 검색해 보았다.

“하…….”

감탄 섞인 침음성이 튀어나왔다.

남자 보호자는 전기 자동차와 관련된 빅 테크 기업의 CEO였고, 여자 보호자는 자기 계발 및 동기 부여에 관련된 명망 있는 강사였다.

분리 수술에 성공하면 주식의 일부를 증자하겠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준후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더불어 제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건강과 생명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물론 돈이 많으면 건강관리가 더 편하긴 하겠지만.)

지이이잉.

지이이잉.

때마침 몸을 떠는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니 병동 콜이었다.

-선생님. 저 당직 근무 중인 다니엘입니다.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어. 괜찮은데 왜?”

-…….

다니엘이 숨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다다다 노티를 시작했다. 노티를 듣는 준후의 얼굴이 차차 굳어졌다.

“바로 갈게.”

구구절절한 오더는 필요 없었다.

준후는 파란 수술복으로 환복하고 그 위에 흰 가운을 걸쳤다.

보법을 밟아가며 기숙사를 떠나 병동으로 달려 나갔다.

병동에 도착하는 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드르르륵.

준후가 스테이션과 가까운 병실로 급하게 뛰어들었다.

“선생님, 오셨어요?”

다니엘이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쌍둥이의 보호자 조던과 스칼렛은 불안한 눈빛으로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준후는 침상으로 다가가 쌍둥이의 상태를 살폈다.

쌍둥이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아이들은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며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바이탈은?”

“체온하고 맥박, 호흡은 정상인데 혈압이 조금 높습니다.”

“얼마나?”

“140mmHg/100mmHg입니다. 근데 그렇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울고 있을 때 측정한 거라서요.”

“그걸 감안하더라도 좀 높은데?”

한 번 구겨진 준후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서로 정수리가 붙어 있긴 했지만.

그동안 쌍둥이들은 별 탈 없이 입원 생활을 해왔다.

준후가 꾸준하게 신경 쓰기도 했고.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사고가 터졌단 말인가.

문제 원인을 발견해서 신속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수술이 중요하다지만.

환자가 수술을 감당할 수 있는 컨디션을 유지하게 만드는 일도 수술 못지않게 중요했다.

“엠마가 토했다고 했지?”

“네. 묽은 액체를 손바닥 절반만큼 토했습니다. 그다음부터 소피아도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잠자코 있던 조던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부터 살펴봐야죠.”

준후의 시선은 여전히 쌍둥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태도는 침착했지만 머릿속은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준후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뇌수막염일까.

아직 체온이 정상인 걸 보면 감염증은 제외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갑작스레 발작을 한 걸 보면 뇌전증도 의심해 볼 만해. 뇌전도를 찍어 봐야 하나?

유동식이 잘못 들어갔나?

단순히 체한 걸까?

아니야, 혈압이 높은 걸 간과하면 안 돼.

아이는 까닭 없이 울 수도 있어.

샴쌍둥이 환자라서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걸지도 모르지.

수많은 자문자답에도 준후는 마땅한 병인을 찾아내기 벅찼다.

솔직히 인간이 아파야 하는 이유는 너무 많았다.

“으아아아앙!”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오히려 더 목청을 높였다.

아이들이 평범했다면 부모가 품에 안아서 진정을 시키려고 노력이라도 했을 텐데.

엠마와 소피아는 정수리가 붙어 있어서 안고 달랠 수도 없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보호자와 다니엘의 시선은 준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제 동아줄은 준후뿐이었다.

“검사 전에 일단 아이들부터 진정시키죠.”

준후가 모처럼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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