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제75장 레디(4)
“엠마, 소피아. 부모님 걱정하니까 뚝 그치자. 응?”
준후가 상냥하게 말하며 침상으로 가까이 갔다.
한 손으로는 아이들이 베고 있는 베개를 정리해 주고 다른 손으로는 아이들의 머리를 가볍게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팟! 팟!
준후의 검지가 아이들의 목 중앙을 찔렀다.
그러나 모두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음에도 누구도 준후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동작이 번개와 같았다.
“으아앙…… 으으.”
“으아앙…… 으으.”
목청껏 울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차차 잦아들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아예 울음을 멈추었다. 심지어 졸리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병실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선생님.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죠?”
“말도 안 돼…… 우리가 달랠 때는 아무 소용도 없었는데.”
다니엘이 경악하고 조던이 기겁했다. 준후가 나서기 무섭게 아이가 진정됐던 덕분이었다.
“글쎄요. 너무 울다가 지쳤나 보죠.”
“제 눈에는 쌩쌩해보였는데요?”
조던이 반문했다.
“아이들 입장은 다를 수 있죠. 어쨌거나 급한 불은 껐습니다. 아이들은 계속 우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준후는 고이 잠든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준후가 아이들을 순식간에 진정시킨 비법.
이는 ‘풍부혈 점혈법’이었다.
풍부혈은 목 중앙에 위치한 혈자리이자 의식과 관련된 혈자리였다.
적당한 내공을 담아 해당 위치를 점혈하면 사람을 손쉽게 기절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갑자기 왜 운 걸까요? 입원 기간 동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부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공기가 병실을 휘어 감았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아봐야지.”
“생각해두신 검사라도 있나요?”
“생각 중이야.”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애석하게도 준후라고 해서 뾰족한 해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준후의 역량이 모자란 건 아니었고 소아 환자 고유의 특성 때문이었다.
엠마와 소피아의 경우는 너무 어렸다.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을 할 줄도 몰랐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 진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진을 할 수 없었다.
최소한 어디가 아픈지는 알아야 검사라도 할 것 아닌가.
배가 아프다든가, 가슴이 아프다든가, 머리가 아프다든가 등등.
검사를 이것저것 다하면 아이들만 피곤해질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다고 4시간 동안 붙어 있을 수도 없고.
머리가 깨져라 고민하던 준후는 문득 다니엘과 부부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발견했다.
세 사람 다 온전히 준후를 의지하고 있었다.
주치의로서 느껴지는 책임감에 준후는 어깨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를 기꺼이 견뎌냈다.
더 많은 무게를 견뎌낼수록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뇌세포와 신경망이 비명을 지를 때 쯤.
준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울음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오스틴 교수님께 연락해 볼까요?”
기다리다 못한 다니엘이 한마디 했다.
“오스틴 교수님이라고 해서 묘수가 있지는 않을 거다.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음…… 방법을 알 것도 같은데…….”
말을 하면서 준후는 자연스럽게 두 손바닥을 각각 두 아이의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손바닥으로 흘려보냈다.
준후의 손바닥에서 뻗어나간 내공이 아이들의 전신을 눈부신 속도로 훑기 시작했다.
뇌, 심장, 폐, 간 등등.
거기에 각 장기들과 연결되어 있는 혈관까지.
내공들은 아이들의 온몸을 낱낱이 훑어나갔다.
마치 조영제가 전신에 퍼지듯이.
준후가 펼치고 있는 검사는 일종의 내공을 활용한 전신 CT 겸 MRI라고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다고?
그럼 모든 장기를 싹 다 검사하면 되잖아?
……라는 발상에서 즉흥적으로 시도한 것이었다.
내공이 실시간으로 쭉쭉 빠져나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버틸 만 했다.
준후는 단전뿐만 아니라 심장에도 동그란 고리 모양의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과거 판타지 소설에서 영향을 받아 꾸준히 마나 서클을 수련한 덕분이었다.
‘전신 내공 조영술’을 마치고 준후는 아이들의 머리에 얹었던 손바닥을 뗐다.
“일단 Brain MRI 촬영부터 하자. 결과 나오면 바로 나한테 노티하고.”
“Brain MRI이라면 저번 주에 촬영하지 않았나요?”
준후의 오더를 이해 못하겠는지 다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 더 찍어보는 게 좋겠어.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다른 검사는요?”
“필요 없어.”
“하다못해 피 검사나 chest PA도 안 하나요?”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준후 입장에선 Brain MRI조차 의미가 없었다.
‘전신 내공 조영술’로 검사 결과까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다른 스태프들과 결과를 공유하기 위해 촬영 오더를 내렸을 뿐이었다.
“두 분 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금방 좋아질 겁니다.”
“네.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병실에서 나온 준후는 병실 옆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댔다.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소아 병동이라서 천장에 모빌이 달려 있었는데 모빌에 줄이 배배 꼬여 있었다.
* * *
40분 뒤.
소아 신경외과 당직실.
입원 환자 오더를 입력하고 있던 다니엘이 텀블러에 담아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따라 유독 커피의 뒷맛이 씁쓸했다.
준후 선생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Brain MRI를 또 찍어서 얻을 이득이 없을 텐데.
보호자들이 부자라서 입원비라도 한 푼 더 땡기려고 하는 걸까.
다니엘은 여전히 준후의 오더를 납득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자신이 직접 이것저것 검사 오더를 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선을 넘지는 않았다.
소아 신경외과 레지던트 사이에서 준후는 ‘프로페서’라고 불렸다.
교수는 아니지만 교수급으로 환자를 잘 보고 집도를 잘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교수들에게 직접 묻기 어려운 것들을 준후에게 물어보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레지던트 대부분이 준후를 좋아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다 무슨 생각이 있었겠지. 믿어보자.’
다니엘은 의심을 떨치며 쌍둥이의 검사 차트로 이동했다.
때마침 따끈따끈하게 MRI 영상과 판독지가 나와 있었다.
영상부터 확인한 다니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적어도 다니엘이 보기에 1주 전에 촬영한 영상과 오늘 촬영한 영상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때가 있는 건가 싶었는데.
판독지를 확인한 순간.
다니엘의 의심은 존경으로 바뀌었다.
-head bone is distensible. middle cerebral artery sections are under pressure.
판독지에 따르면.
쌍둥이의 두개골이 팽창하면서 중대뇌동맥에 압력이 가해지고 있단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운 이유도 설명이 됐다.
혈관에 압력이 강해지면서 뇌압도 덩달아 상승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니엘은 서둘러 준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 내부에 있었는지 준후가 금방 당직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판독 결과 나왔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다니엘이 호들갑을 떤 반면 준후의 태도는 침착하기만 했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Brain MRI만 촬영하기를 천만다행이네요. 이 검사 저 검사 다하고 협진까지 했으면 일이 복잡해졌을 겁니다. 보호자들도 걱정이 많았을 고요.”
“아까랑 말이 많이 바뀌었다?”
“하하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준후의 지적에 다니엘이 멋쩍게 웃었다.
“근데 갑자기 두개골이 팽창된 건 왜 그런 걸까요?”
다니엘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혹시 의료진의 실수가 있었다면 모를까.
갑자기 이런 사태가 벌어질 이유가 없었다.
“네가 진료 중인 게 소아 환자라는 걸 잊어서 그래.”
“제가 뭘 잊고 있는데요?”
“아이들 머리가 자라서 그런 거야.”
“아…….”
다니엘은 그제야 무릎을 탁 쳤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성장한다.
당연히 두개골도 성장하고 뇌도 성장한다.
서로의 머리가 맞붙은 상태에서 머리가 성장하다 보니 서로에게 압력을 주게 된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일단 뇌압부터 낮춰야지.”
“요추 천자할까요?”
“요추 천자까지는 필요 없고 약제에 이뇨제 추가하고 머리만 좀 높여주면 되겠다.”
“그거면 될까요?”
“그거면 돼.”
준후의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했다.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지 구체적인 이유를 덧붙이지 않는 준후의 모습이 더 멋있어 보이는 다니엘이었다.
타다다닥.
다니엘은 곧바로 간호 기록지에 추가 오더를 기입했다.
그가 할 일을 마치고 준후를 힐끔 쳐다보니 준후는 뚫어져라 MRI 영상만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일이 많이 꼬였다 싶어서.”
평소 준후답지 않게 대답에 한숨이 섞여 나왔다.
“아무래도 수술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 같아. 두개골하고 뇌가 팽창하면 앞으로 상태가 계속 나빠질 거거든.”
“…….”
“약으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테고.”
“수술 준비는 얼마나 되셨는데요?”
“이제 막 스태프만 결정됐어. 갈 길이 멀고 험난하지.”
준후가 쓰게 웃으며 다니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생하고 병동에 무슨 문제 있으면 바로 연락해. 괜히 내 눈치 볼 필요 없으니까.”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다니엘은 당직실을 떠나는 준후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준후는 남자가 봐도 멋진 남자였다.
* * *
당직실을 나온 준후는 휴대폰부터 들었다.
곧바로 오스틴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뜩이나 힘겨운 분리 수술인데 시간 압박까지 받게 생겼다.
이번 수술만큼은 하늘이 자신의 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준후, 무슨 일이지?
오스틴이 한참만에야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혹시 지금 통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아직 수술 들어가기 전이니까.
“그게 쌍둥이가 오늘 심하게 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Brain MRI를 촬영했더니…….”
준후는 핵심만 간추려서 상황을 전했다. 대화를 듣는 내내 오스틴은 리액션도 없었고 질문도 없었다.
제아무리 그라도 충격을 받은 걸까.
-수술 날짜를 당겨야겠군.
오스틴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 중으로 스태프들을 다 모아서 수술 연습을 시작할 셈이긴 했어.
“수술 연습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갑자기요? 그리고 연습을 하신다면 어떤 방식으로 하실 겁니까?”
오스틴의 설명에 놀란 준후가 속사포로 입을 놀렸다.
그만큼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소아 신경외과 넘버원 서전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었다.
항상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준후인데 오스틴에게는 오히려 기대도 되겠다는 편안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찬찬히 설명하기로 하고. 써드 어시스트는 누구로 정했지?
“레이먼드입니다.”
-훌륭하군. 저녁 때 보자고.
오스틴이 먼저 통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시험에 통과한 게 맞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