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제75장 레디(5)
그날 저녁.
준후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컨퍼런스 룸에 혼자 앉아 있었다.
30분 뒤에 쌍둥이 분리 수술팀원이 전부 모이는 데 일찍 와 있었던 것이다.
혼자 있었지만 심심할 겨를은 없었다.
준후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느라 바빴다.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맙다. 내일 보자.”
휴대폰을 가운 주머니에 넣으며 준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통화 상대는 각각 올리버와 맥스웰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 분리 수술의 써드 어시스트가 되기를 바랐고 준후의 선택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준후의 선택은 레이먼드였다.
친구들을 뽑아주지 못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술은 정(情)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준후의 소식을 듣고서 올리버와 맥스웰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달랐다.
올리버는 대놓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나는 네가 나를 뽑을 줄 알았다.
아버지 앞에서 다시 한번 활약하고 싶었다.
내 사연을 알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결정을 바꿀 수 없냐 등등.
올리버가 뜨거웠다면 맥스웰은 차가웠다.
내가 봐도 준후 너를 제외하면 레이먼드 실력이 제일 낫더라.
냉정하게 판단 잘했다.
날 안 뽑았다고 죄책감 같은 거 느낄 필요 없다 등등.
‘이제 제일 큰 숙제만 남았구나.’
준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니엘과 잡담하면서 들었는데 이번 수술은 벌써 매스컴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고 했다.
BBC 방송에 나간 것은 물론이고 각종 중앙 신문, 지역신문에도 기사가 실렸다고 했다.
준후도 검색해 보고 알았다.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번 분리 수술은 눈길을 끌 요소가 넘쳐났다.
정수리가 붙은 샴쌍둥이가 희귀한데다가 심지어 그 부모가 각각 스타트업 기업 CEO에 유명한 강사였다.
다른 병원에서는 다 퇴짜 놓은 수술을 오직 메이유만 수락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양날의 검이었다.
수술이 성공한다면 미국 대륙에서 찬사가 쏟아지겠지만.
반대일 경우 비난과 비평, 야유가 쏟아질 것이다.
무모한 수술을 방지하자는 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이번 수술에 걸린 것들을 떠올리자 준후마저 부담감을 느꼈다.
불안, 긴장, 초조, 두려움 같은 어두운 감정들이 준후를 억세게 흔들어댔다.
준후는 잠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부정적인 감정들과 자신을 분리 시켜 나갔다.
대통령이 됐든, 유명 연예인이 됐든, 빼어난 학자가 됐든, 아니면 옆집 크리스 씨가 됐든, 평범한 직장인이 됐든…….
환자의 지위는 준후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서전은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 최선과 정성을 다해 수술을 펼치면 그만이었다.
그밖에 다른 부분은 곁가지에 불과했다.
마음을 다 잡고 준후가 눈을 떴다. 준후의 눈빛이 다시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수술은 반드시 성공할 거야.
후회 한 점, 기력 한 점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퍼부어주겠어.
* * *
집도의 오스틴.
제1어시스트 준후.
제2어시스트 헥터.
제3어시스트 레이먼드.
분리 수술에 참여하는 영광의 얼굴들이 드디어 한자리에 모였다.
같이 지낸 시간이 벌써 9개월이었기에 서로를 잘 알아서 자기소개 따위는 필요 없었다.
컨퍼런스 진행은 오스틴이 맡았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수술 방법을 스태프들에게 꼼꼼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본인이 준비한 자료를 사용하기도 하고 환자의 CT와 MRI 영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컨퍼런스 룸에 오로지 오스틴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스태프들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스태프들의 표정과 태도는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처럼 진지하다 못해 비장했다.
대중의 관심이 쏠린 만큼 이번 수술은 ‘쇼(show)’ 같은 구석이 있었다.
수술이 끝나면.
모두가 결말을 알게 될 테고.
그 결말을 두고 너나 할 것 없이 떠들게 될 것이다.
오스틴의 일방적인 수술 브리핑은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스틴도.
듣고 있는 스태프들도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브리핑이 끝난 후에는 질문의 폭격이 쏟아졌다.
“집도 시간은 얼마나 걸릴 걸로 예상하십니까?”
“다른 과와 협진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비 스태프 명단은 결정하셨습니까? 보통 분리 수술은 스태프들을 두 팀으로 꾸려서 로테이션을 돌린다고 알고 있는데요.”
“수술 도중 생길 수 있는 문제는 뭐가 있을까요?”
쏟아지는 질문을 오스틴은 침착하게 또 막힘없이 대답했다.
오스틴조차 이번 분리 수술은 처음일 텐데 이미 수술을 해본 사람처럼 응답을 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집도의구나.
수술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파악하고, 스태프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 집도의구나.
준후는 새삼 집도의에게 필요한 덕목을 깨우쳤다.
“포괄적인 설명을 하느라 전하지 못한 소식이 있다.”
오스틴이 스태프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좋은 소식입니까?”
“아니. 나쁜 소식이지.”
헥터의 질문에 오스틴이 쓰게 웃었다.
“준후, 네가 오늘 있었던 일을 알려주겠니?”
“네. 교수님.”
모처럼 준후가 나섰다.
“오늘 오후 아이들이 10분 가까이 울었던 일이 있습니다. 혈압이 140mmHg/100mmHg이 나올 정도로 꽤 높았고요.”
“…….”
“Brain MRI 결과 아이들의 두개골과 뇌가 팽창 중이라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뇌압이 높아져서 이뇨제를 투입하고 머리를 거상시킨 상태고요.”
준후의 노티에 헥터는 물론이요 레이먼드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 듣는 충격적인 소식에 당황할 수밖에…….
준후 또한 결과를 확인하고 하늘을 원망했었다.
“그럼 앞으로 뇌압이 올라갈 일만 생기겠군요.”
헥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렇지. 수술 날짜도 앞당겨야 할 거다.”
“얼마나 당기실 생각입니까?”
“닷새 정도?”
“닷새면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그럼 앞으로 열흘밖에 없다는 소리인데요. 그 안에 충분한 연습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레이먼드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도 수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레이먼드.”
“네. 교수님.”
“뭘 착각하고 있나본데. 서전은 본인 일정에 환자를 맞추는 게 아니란다. 환자의 상태에 본인 일정을 맞춰야지.”
“그건 압니다만…… 가뜩이나 어려운 수술인데 훈련 시간마저 짧아버리면…….”
“원하는 조건과 환경에서만 수술할 수 있다면 나도 소원이 없겠지. 하지만 그런 꿈같은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아.”
오스틴이 딱 잘라 말했다.
준후도 오스틴의 의견에 동의했다.
삶이란 항상 인간의 기대와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었다.
그러니 느닷없이 닥쳐온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교수님. 저도 질문이 있습니다.”
준후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래. 말해봐.”
“수술 연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나요? 가장 중요한 설명이 빠진 것 같습니다.”
준후의 질문에 헥터와 레이먼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케이스의 환자가 있다면.
수술 연습이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정수리가 맞붙은 샴쌍둥이 케이스를 이제 와서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설령 찾는다고 한들 연습이 가능할까.
다른 환자의 목숨을 실험 용도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오스틴이 반대로 준후에게 물었다.
물론 오스틴이 답을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질문의 의도는 준후의 사고력과 문제 해결능력이 어떤 수준인지 알아보겠다는 것 아닐까.
준후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사이.
레이먼드가 먼저 나섰다.
“저라면 이렇게 할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단 쌍둥이 머리 분리 수술을 했던 스태프들을 죄다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수술하면서 어려웠던 점을 전해 듣습니다.”
“…….”
“마지막으로 이번 수술의 핵심이 뇌혈관 문합술인 만큼 소아 모야모야병 환자를 집중적으로 집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본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레이먼드가 씨익 웃었다.
“즉흥적으로 떠올린 것치고는 꽤 괜찮은 접근법이구나.”
“감사합니다.”
“헥터, 네 생각은 어떠니?”
“저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헥터가 멋쩍게 웃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준후에게 향했다.
과연 준후는 어떤 대답을 할까.
모두의 관심이 쏠린 가운데 준후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집도의라면 말입니다.”
“집도의라면?”
“VR(가상현실 장치)로 연습해 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준후는 최신 수술 트렌드에 빠삭했다. 예전부터 그랬고 메이유에 들어와서는 그 경향이 더욱 굳어졌다.
의술이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서전 역시 진화하기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이었다.
최근 준후는 VR을 통해 수술 연습을 해서 샴쌍둥이 머리를 분리했다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었다.
“예전과 다르게 요즘 VR은 퍽 정교해졌다고 들었습니다.”
“…….”
“장치를 급히 마련하는 게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장비만 마련한다면 실전과 같은 연습을 기대할 수 있겠죠.”
준후의 대답이 야무졌다.
레이먼드와 헥터가 감탄하는 눈빛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오스틴은 말이 없었다.
준후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거운 입을 뗐다.
“준후, 네 대답이 제일 그럴싸하구나. VR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방법이지.”
“…….”
“다만 실전과 같은 연습이 목표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단다.”
“어떤 방법입니까?”
“다들 수술실로 이동하자.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빠를 테니까.”
오스틴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분리 수술팀 스태프들이 수술실로 향하고 있었다.
레이먼드와 헥터가 앞서서 걸었고 그 뒤를 준후와 오스틴이 뒤따랐다.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준후는 옆에서 걷는 오스틴을 힐끔 쳐다보았다.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라는 점에서 준후와 오스틴은 결이 같았다.
하지만 같은 사고방식을 가졌음에도 행동방식은 조금 달랐다.
오스틴은 뒤에서 뭔가를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 여러모로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줬구나.”
오스틴이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떤 점을 말씀하시는 건지…….”
“일단 레이먼드를 써드 어시스트로 뽑았던 것부터 칭찬하고 싶구나. 사실 난 네가 올리버를 선택할 줄 알았거든. 올리버는 내 아들이니까.”
“안 그래도 제가 레이먼드를 선택하니까 올리버가 많이 서운해 하더라고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왜 레이먼드를 택했지? 넌 레이먼드와 사이가 안 좋을 텐데?”
“수술에 사사로운 감정을 엮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했던 게 바로 그거란다. 설령 원수라고 해도 환자를 살릴 수 있다면 손잡을 필요가 있지.”
오스틴의 의도를 준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먼드를 택할 수 있었다. 만약 오스틴의 의도를 몰랐다면 준후는 맥스웰을 어시스트로 뽑았을 것이다.
서전이라면 보통 냉철할 거라고 사람들이 기대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과의보다 서전들이 더 열혈이었다.
그 뜨거움 때문에 수술을 그르치는 일이 많은데 오스틴은 그러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전했다.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건 Brain MRI였다.”
오스틴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쌍둥이가 울었을 때 정확히 Brain MRI만 해서 원인을 찾았더구나. 나라도 그렇게는 못 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교수님이 제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반나절 동안 이 검사 저 검사 다해봤겠지. 컨설턴트까지 내가면서. 아이가 울 이유야 넘치고 넘쳤으니까.”
오스틴의 대답을 통해 준후는 새삼 깨달았다.
내공이 사기는 사기라는 것을.
준후는 ‘내공 전신 조영술’을 통해 단 2분 만에 아이들을 정확하게 진단해냈다.
이는 소아 신경외과 권위자인 오스틴조차 할 수 없는 활약이었던 것이다.
“조금 있다가 설명하겠지만 이번 수술에서 네 역할이 크다. 부담스럽긴 하겠지만 잘해낼 수 있겠지?”
“네. 교수님.”
준후의 대답은 씩씩했다.
잡담을 나누는 사이 수술실이 가까워졌다.
오스틴이 준비한 이벤트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