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제76장 질주(1)
오스틴의 지시에 따라 스태프들은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하고 수술복장까지 갖춰 입었다.
수술 가운, 수술 마스크, 수술 장갑 등을 차례대로 착용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실제로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닌데?」
다들 말은 안 했지만 그런 눈빛으로 오스틴을 쳐다보았다.
준후도 다른 스태프들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오스틴의 지시는 과한 감이 있었다.
준비를 마친 스태프들이 3번 수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피쉬쉬쉭!
천장에서 하얀 에어 샤워가 쏟아졌다.
전신소독까지 마치고 나서야 일행들이 수술대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
준후는 수술대를 내려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은 3D 프린터로 구현된 쌍둥이 모형이었다.
모형의 재질은 CPR 교재로 쓰이는 인형과 비슷한 고무 재질이었다.
목 아래가 구현되지 않아 다소 괴기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머리의 크기와 형태는 실제 쌍둥이와 똑같아 보였다.
아마 실제로 똑같기도 할 것이다.
CT와 MRI 영상을 바탕으로 제작했을 테니까.
-준후, 네 대답이 제일 그럴싸하구나. VR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방법이지. 다만 실전과 같은 연습이 목표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단다.
오스틴이 꽁꽁 숨겨두었던 의도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VR로 수술을 연습하면 손맛을 느끼기 어려웠다.
수술 도중 실수를 한다고 해도 실수에 대한 충격이 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형을 사용하면 VR 연습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교수님. 모형은 대체 언제부터 준비하셨나요?”
준후가 맞은편에 선 오스틴에게 물었다.
레이먼드와 헥터도 궁금하다는 듯 오스틴을 응시했다.
“보호자가 외래 진료를 보러온 날에 바로 제작 의뢰했지. 덕분에 간신히 시간을 맞췄구나.”
“대단하십니다. 의뢰가 늦었으면 아예 모형을 받지도 못했을 텐데.”
“뭐든지 간절하면 서두르게 되는 법이지.”
오스틴이 반달눈으로 웃었다.
“평소에도 3D 프린터로 모형을 만들어서 수술 연습을 하시나요?”
“아니. 이야기만 들었지 모형을 써보는 건 나도 처음이야. 정수리가 붙은 샴쌍둥이 환자를 수술하는 것도 처음이고.”
모든 것이 처음임에도 오스틴의 대처와 준비는 침착하고 치밀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오스틴을 존경해 마지않았다.
만약 나중에 희귀 질환 환자를 수술하게 된다면.
자신도 3D 프린터로 환자 모형을 본 따서 연습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메이유에 오길 참 잘했고.
오스틴을 만나서 참 다행이었다.
“연습 일정을 알려주마. 여기 있는 전원은 앞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밤 7시까지 3번 수술 방에 집합한다.”
“…….”
“모형 연습은 밤 11시까지 진행하고 1시간은 간단하게 피드백을 주고받을 거야.”
“…….”
“주말에는 하루 종일 수술방에만 있을 거고. 혹시 불만 있는 사람?”
오스틴의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노 교수가 이만큼 수술에 열정과 헌신을 보이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교수님. 저 질문이 있습니다.”
준후가 말했다.
“말해보렴.”
“연습 시간에 비해 모형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추가로 주문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럴 줄 알고 처음부터 여러 개를 주문했단다. 남은 게 10개쯤 되지?”
“와…….10개씩이나…….”
한 방 먹었다는 듯 준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때? 이젠 모형이 부족한 게 아니라 연습 시간이 부족할 것 같지 않니?”
오스틴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들 나만 믿고 따라 오거라. 모형을 10개 정도 부수고 나면 수술은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 없을 테니까.”
오스틴의 자신감과 카리스마가 스태프들을 사로잡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분리 수술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 * *
그날 자정.
레이먼드는 준후와 함께 메이유 클리닉 본관을 벗어나 기숙사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은 깜깜하고 사위는 고요했다. 정면에서 보는 밤바람이 쌀쌀했다.
정원 쪽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운치 있었다.
“넌 오늘 연습 어땠냐?”
레이먼드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려웠지만 재미있었지.”
“재미? 지금 상황에서 나올 단어가 아닌 것 같은데?”
“오스틴 교수님과 함께 수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즐겁고, 모형으로 수술하는 것도 신기하고, 그렇다고 실전이 아니니까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
“재미를 느끼려면 지금밖에 없을 걸?”
“말을 말자…… 하여간 넌 괴짜야.”
준후의 대답이 어처구니없어서 레이먼드가 혀를 찼다.
솔직히 레이먼드는 죽을 맛이었다.
오스틴 수술에 들어간 건 처음이었는데 오스틴은 말도 못하게 깐깐하게 굴었다.
썩션은 왜 이렇게 느리냐.
수술 도구로 퍼스트 어시스트의 수술 시야를 가리지 마라.
지혈은 무조건 보비(전기 소작기)로 할 생각 말고 거즈도 적극적으로 사용해라.
멍 때리지 말고 수술에 집중해라.
애도 아니고 처치를 일일이 하나하나 다 가르쳐야 하냐.
알아서 척척 못 하냐 등등.
오스틴은 그야말로 잔소리 대마왕이었다. 잔소리 때문에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불행하게도 고난은 오스틴뿐만이 아니었으니…….
수술 자체도 말도 못 하게 어렵고 낯설었다.
밥 먹듯이 하던 두개골 절제술조차 그 범위와 영역이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욕을 진탕 얻어먹고.
당황해서 본인이 무슨 처치를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탓일까.
준후의 제안을 수락할 때와 달리 레이먼드의 자신감은 수직으로 곤두박질 쳤다.
“교수님이 너한테는 뭐라고 안 하더라?”
“딱히 지적할 게 없으셨나 보지.”
“너랑 내가 뭐가 그렇게 다른데?”
레이먼드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솔직히 레이먼드는 준후가 연습 중에 개 박살이 날 줄 알았다.
교육생 주제에 감히 교수를 제치고 퍼스트를 차지하지 않았던가.
실력이 뽀록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웬걸?
준후는 능숙하게 퍼스트를 소화해냈다.
헥터의 부재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게 알고 싶어?”
“그래. 알고 싶다.”
“나한테는 있고 너한테는 없는 게 있지.”
“아 씨. 짜증나게 뜸들이네. 빨리 말해 봐. 사람 속 태우지 말고.”
“이거 차이야. 이거.”
준후의 검지가 본인 관자놀이를 가리켰고 레이먼드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너 지금 내 머리가 나쁘다는 거냐? 내가 이래 뵈도…….”
“아이큐를 말하는 게 아니야. 사고방식의 문제라고.”
“사고방식?”
“넌 너무 자기중심적이야.”
“그게 뭐 어때서?”
“너만 생각하는 게 집도할 때는 문제가 안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시스트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
준후가 진지한 눈빛으로 레이먼드를 응시했다.
레이먼드는 자신도 모르게 준후의 눈빛과 말투에 홀리고 말았다.
“어시스트는 집도의나 다른 스태프들을 어떻게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해야 돼.”
“…….”
“근데 네 생각만 하고 있으면 어시스트가 제대로 되겠어?”
준후의 지적이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레이먼드라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먼드는 곧바로 반박했다.
“누가 들으면 난 어시스트 한 번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인 줄 알겠네. 나도 레지던트 수련 때 수도 없이 어시스트 했거든?”
“그때야 수술 난이도가 비교적 낮아서 그런 거고. 쌍둥이 분리 수술처럼 어려운 수술에서는 작은 실수가 눈덩이처럼 굴러갈 수 있어.”
“칫.”
레이먼드는 대꾸를 하는 대신.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을 멀리 걷어찼다.
준후의 말이 맞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 더러웠다.
어시스트를 하는 내내 레이먼드는 어떻게 하면 준후보다 자신이 더 돋보일까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술에 집중하지 못하게 됐다.
“써드 어시스트, 포기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해. 아직 늦지 않았어.”
준후가 약 올리듯이 말했다.
“내가 너라도 그만 두고 싶겠다. 가뜩이나 힘든 수술을 굳이 욕 먹어가면서 할 필요 없잖아.”
“…….”
“사실 너 말고 봐둔 어시스트도 있어.”
“누군데?”
“맥스웰.”
“맥~ 스웰?”
맥스웰의 이름을 듣고 레이먼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근래에 실력이 급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레이먼드와 비교할 급은 아니었다.
“이 몸의 자리를 감히 맥스웰한테 넘긴다고? 너 내 자존심을 깔아뭉갤 작정이야?”
“그렇게 잘났으면 실력으로 증명하든가.”
“두고 봐. 내일부터 맥스웰의 맥 자도 못 꺼내게 해줄 테니까.”
레이먼드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 * *
쾅!
레이먼드가 예의 없이 기숙사 방문을 큰 소리로 닫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간 다루기 쉬운 녀석이라니까.’
준후는 레이먼드의 방문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레이먼드처럼 승부욕이 강한 사람은 자존심을 건드려주면 놀라운 성과를 보이곤 했다.
빙 둘러서 조언도 했으니 아마 내일부터는 어시스트 방식이 오늘과는 180도 달라질 것이다.
기숙사로 들어간 준후는 우선 냉장고를 열어 목부터 축였다.
3시간 동안 진행했던 첫 모형 연습 과정을 회상했다.
소감부터 말하자면…….
수술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실전이 아니라 모형으로 연습을 했는 데도 그랬다.
천하의 오스틴조차 처음 해보는 수술이 어색했던 걸까.
그는 잠시 수술을 중단하고 고민에 빠지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기존에 짜두었던 수술 플랜을 즉석해서 수정하곤 했다.
준후라고 해서 실수를 안 했던 것도 아니었다.
두피 절개 후.
견인기로 수술 시야를 확보할 때.
너무 많은 시야를 얻고 싶어서.
견인기를 세게 잡아당겼다가 모형의 피부 일부를 찢는 대참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스태프들 간의 호흡도 오합지졸에 엉망진창이었다.
오는 길에 레이먼드를 콩가루처럼 깠지만 헥터도 그리 잘한 건 없었다.
어시스트가 소극적이어서.
실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믿었다.
수술 당일이 되면 수술의 완성도는 마법처럼 상승할 거라고.
이렇게 어려운 수술은 모두가 처음이었고 네 사람이 합을 맞춘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뭐든지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었다.
모자란 부분을 받아들이며.
나아가다 보면 길은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었다.
비행기만 해도 그랬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비행기지만 몇 세기 전에는 사람이 쇳덩이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믿지 않았다.
“이번 수술의 성패는 나한테 달렸어.”
준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면 오만하다고 비난했겠지만 준후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준후에게는 남들이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준후는 방구석으로 이동해 가부좌를 틀었다.
팟! 팟! 팟!
시신경이 위치한 후두부를 점혈한 후 두 눈을 감았다.
시신경을 자극한 덕분일까.
오늘 연습을 했던 수술대와 수술 도구, 모형을 생생하게 그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여기서 한 번 더 간다!’
준후는 상상으로 창조한 모형에 살을 덧붙이고, 진짜 두개골을 만들어내고, 혈관과 신경을 덧입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적어도 준후의 머릿속에서는.
실제와 똑같은 쌍둥이를 구현할 수 있었다.
모형이 아닌 실제와 똑같은 쌍둥이를 수술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점혈법으로 뇌를 속였기에 가능한 준후만의 수련법이었다.
‘저는 먼저 실전을 치르고 있겠습니다.’
준후가 속으로 읊조리며 수술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9일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