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제77장 남아 있는 것(1)
참관용 수술방.
클리블랜드 클리닉 소아 신경외과 과장이자 오스틴의 라이벌 미칼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눈썹을 찡그린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미칼은 준후라는 서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펠로우도 아니고.
교수는 더더욱 아니고.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후 부스트업 과정을 이수중인 교육생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 실력이 범상치 않았다.
웬만한 교수들과 비교해도 어시스트 능력이 뒤지지 않았다.
수술 과정을 통째로 꿰고 미리미리 움직였으며.
오스틴이 수술을 잘할 수 있게 시야와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수술도구 사용도 범상치 않았다.
양손으로 처치를 하는가 하면 이따금 안과나 수부외과에서 사용하는 미세 수술 도구를 활용하는 응용력까지 선보였다.
‘대단하군. 천재라고 봐야하는 건가?’
미칼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준후의 실력과 잠재력에 감탄하는 것과 별개로.
미칼은 준후가 미웠다.
준후가 이번 수술을 구원했기 때문이다.
오스틴은 오래 전부터 해결하지 못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미국 최고의 신경외과 서전에게 약점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놀랄지 모르지만.
이는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약점 없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지 않는가.
약점이 있어야만 인간이니까.
오스틴의 치명적인 약점이 뭐냐면…….
바로 완벽주의였다.
항상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그 단점은 이번 수술 중반부에 어김없이 드러났다. 쌍둥이의 뇌막을 박리하느라 2시간을 까먹은 것이다.
“오스틴 교수님,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쩜 저렇게 뇌막을 섬세하게 박리하시는지.”
같은 병원 소속으로 이번 수술에 동행한 교수 지미가 몇 시간 전 미칼에게 했던 말이었다.
“자네는 진심으로 저 짓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미칼이 코웃음 치며 되물었다.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게 박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뇌막의 비율도 정확히 5 대 5고요.”
“저런 걸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뭐라고 합니까?”
“시간 낭비.”
미칼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미칼이 봤을 때, 뇌막은 적당히 분리하고 나중에 인공 뇌막으로 복원술을 펼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환자들은 고작 3개월 된 아이였다.
수술을 견딜 체력이 모자랐다.
뇌막을 멋지게 박리하는 것보다 수술 시간을 단축하는 게 더 중요했다.
“아무렴 인공 뇌막보다는 자연 뇌막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수술에 따라서는 융통성도 발휘해야 하는 법이네.”
“융통성이라면…….”
“자네 스스로 생각해 봐.”
미칼은 다시 모니터를 응시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미칼의 눈에는 보였다.
함장 오스틴이 수술이라는 배의 항로를 잘못 잡았다는 것을.
배가 곧 암초를 만나 침몰하리라는 것을.
그런데 바로 그때!
준후가 나타나 모든 상황을 뒤집어 버렸다.
서툴게 뇌막을 찢어버렸고.
인공 뇌막 복원술을 해야 하는 상황을 강제로 연출해 버렸다.
그러니까…….
미칼이 알고 있는 걸 준후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녀석만 없었으면 수술은 망하는 거였는데.
오스틴은 매스컴의 질타를 받고.
최악의 경우 의료소송에 걸리고.
내가 소아신경외과 분야 최고봉이 되는 거였는데.
미칼은 다 잡은 토끼를 준후 때문에 놓쳤다. 그래서 준후를 도저히 예쁘게 볼 수 없었다.
“이제 대망의 하이라이트군요.”
곁에 앉은 지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3개월 된 아이의 뇌혈관을 과연 문합할 수 있을까요? 여간 힘든 게 아닐 텐데.”
“할 수 있을 거야. 오스틴이라면.”
“웬일로 오스틴 교수님을 다 인정하십니까?”
미칼의 발언이 의외라는 듯 지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무작정 사람을 깎아내리기만 하는 줄 알아?”
“하하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정교한 처치라면 미국에서 오스틴을 따라갈 서전은 다섯 명도 채 안 될 거야.”
미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수하게 오스틴의 장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저 친구는 어떨까?”
“준후라는 교육생 말씀이십니까?”
“그래.”
“보나마나 문합술 직전에 헥터 교수와 자리를 바꾸겠, 아니?!”
지미의 눈꺼풀이 올라가고 눈이 희번덕거렸다.
놀랍게도 스태프 교체는 없었다.
중대뇌동맥 분리 및 문합술.
이번 수술의 꽃이자 가장 난코스를 준후가 맡은 것이다.
“저…… 저래도 되는 겁니까?”
지미가 더듬거리며 미칼에게 물었다.
“오스틴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서 준후를 쓰고 있겠지만 어림없어. 연습과 실전은 또 다르거든.”
미칼의 입가에 빈정거리는 미소가 퍼졌다.
뇌동맥 분리·문합술은 의외로 퍼스트의 역할이 더 중요했다.
집도의와 퍼스트가 문합 속도를 맞춰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한쪽의 문합이 늦으면 다른 쪽 혈관이 뒤틀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과연 준후가 오스틴의 속도를 쫓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지켜보는 눈이 수십 개나 되고 환자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실전에서?
‘아까는 수술을 구원했을지 몰라도 이번에는 아니야. 이번에 너는 수술을 망치는 장본인이 된다.’
미칼이 속으로 확언을 했다.
* * *
중대뇌동맥이 잘리면서 뇌 안에 피의 홍수가 들이닥쳤다.
치이이익.
레이먼드가 기다렸다는 듯 썩션기로 피를 썩션했다.
수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
“…….”
본격적인 문합에 앞서 준후는 오스틴과 시선을 교환했다.
마스크를 써서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오스틴의 눈빛이 비장했다.
분명 오스틴에게도 준후의 비장함이 전달됐을 것이다.
드디어 시작된 건곤일척의 승부!
준후는 오감을 극대화하고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만화공을 펼쳤다.
단전에서 솟구친 내공이 준후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었지만.
지금 준후의 몸에서는 아지랑이 같은 내공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좋아. 이 느낌이야.’
준후는 만화공으로 인해 달라진 자신의 감각을 만끽했다.
삐이이. 삐이이.
환자 감시 장치의 기계음.
수술 도구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 등등이 대포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수술방의 서늘한 공기가 마치 북극의 칼바람처럼 피부를 할퀴어대는 것 같았다.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처치가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11-0 Nylon(합성 봉합사).”
준후의 지시에 레이먼드가 포장을 벗긴 봉합사를 내밀었다.
준후는 니들 홀더로 봉합사의 봉합침 부분을 잡은 후 조였다.
끼기기긱!
팔을 들어 면발을 뽑듯 봉합사를 길게 뽑아냈다.
봉합사의 굵기는 머리카락보다 더 얇았다.
봉합사는 숫자가 커질수록 얇았는데 11-0은 봉합사 중에서 가장 얇은 봉합사였다.
하지만 11-0 봉합사를 사용하는 일에 준후는 티끌만큼의 두려움도 없었다.
양수 호박 기술 대성.
호월십이수 대성.
봉합에 도움이 되는 무공을 극한까지 터득했으며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봉합 연습을 했으니까.
“홀딩해 줄게.”
레이먼드가 절반으로 잘린 중대뇌동맥을 소피아의 뇌 쪽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해당 혈관을 문합해야 할 윌리스 환 부위에 갖다 대었다.
레이먼드의 어시스트는 사소했지만 대단했다.
떨림 없이 혈관을 잡았으며.
혈관에 너무 힘을 주어.
혈관을 파열 시키는 일도 없었다.
준후가 레이먼드를 어시스트로 뽑은 것은 과연 신의 한 수였다.
‘내 실력, 남김없이 보여주겠어.’
준후는 의욕에 불타 첫 바늘을 혈관에 밀어 넣었다.
바늘침이 혈관을 뚫을 때.
‘뾱’하는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만화공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촉각이었다.
덕분에 준후는 바늘침의 전진을 멈출 수 있었다.
더 전진했다면 분명 혈관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중대뇌동맥을 통과한 바늘이 이어서 건너편 뇌혈관까지 통과했다.
휘리리릭.
준후는 실을 길게 뽑아서 현란한 손놀림으로 매듭을 지었다.
양손 매듭법.
이는 가장 안전한 매듭법인데 봉합사를 완전히 제어하여 안전하고 정확한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솜씨도 무르익을 만큼 무르익었겠다.
집중력도 최고겠다.
거기에 만화공까지 뒷받침되니 봉합사와 니들홀더가 손에 착착 붙었다.
준후는 마치 마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첫 번째 매듭을 완성시켰다.
혈관을 연결하는 봉합사의 장력.
매듭의 방향 등이 완벽 그 자체였다.
“미쳤는데? 지금 속도대로만 가자.”
“그건 알겠는데 뭐 잊은 거 없어?”
“내가 뭘?”
“매듭을 잘라야 할 거 아니야.”
“아…… 미안.”
레이먼드가 멋쩍게 웃었다.
매듭을 짓고 남은 실을 가위로 잘라주었다.
찰칵!
가위질 소리가 경쾌했다.
레이먼드과 호흡을 맞추며 준후는 파죽지세로 문합술을 이어나갔다.
문합에 필요한 바느질 수는 총 20회.
문합 방법은 단순 단속 봉합법.
바느질을 할 때마다 일일이 매듭을 지어주는 방식이었다.
문합을 절반 가까이 마쳤을 때.
준후는 힐끔 건너편 혈관을 훔쳐보았다.
준후의 봉합 속도가 오스틴의 봉합 속도보다 1.5배 정도 빨랐다.
정확도 면에서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메이유 클리닉에서 와서.
준후가 한 단계 더 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뿌듯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참사가 터져 버렸다.
“주…… 준후, 봉합사 한 번 확인해 봐.”
레이먼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매듭이 갑자기 느슨해졌는데?”
“멀쩡했던 매듭이 갑자기 왜 느슨해져? 지금이 장난칠 때야?”
“나도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심상치 않은 공기를 읽은 준후가 지금까지 자신이 지은 매듭을 살폈다.
가늘어지는 눈.
좁아지는 미간.
이마에 늘어나는 지렁이 주름.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레이먼드의 지적이 맞았다.
봉합사가 점점 느슨해지고 있었다.
혈관과 혈관의 연결이 느슨해지면서 붉은 피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씨X, 대체 왜!’
준후는 오랜만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문합은 완벽했다.
자만을 한 게 아니라 준후가 만화공을 통해 느낀 감각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왜 이런 불상사가 벌어진단 말인가.
설마?
한 가지 가설을 세우고.
준후가 곧바로 시험에 들어갔다.
일단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봉합사를 길게 늘어뜨렸다.
포셉으로 봉합사에 살짝 잡아 당겨보았다.
툭!
봉합사가 힘없이 끊어졌다.
“지금 뭐 해? 다시 문합하기에도 시간이 빡빡하다고.”
수술하는 내내 침착하던 레이먼드가 평정심을 잃었다.
눈빛도 흔들리고.
목소리도 흔들리고 있었다.
“문합이 왜 망했는지 알겠어.”
“왜 망했는데?”
“하…… 봉합사가 불량이야.”
준후는 원망하는 눈빛으로 봉합사를 응시했다.
수술에 사용되는 소모품에 불량품이 나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준후도 한국에서 서너 차례 비슷한 경우를 겪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오늘처럼 긴박하고 중요한 수술을 할 때 불량이 난단 말인가.
준후는 사용하던 봉합사를 곡반에 던져 버렸다.
텅!
봉합침과 곡반이 부딪치면서 공허한 울림이 퍼졌다.
“10번 메스.”
준후는 레이먼드에게 건네받은 메스로 지금까지 지었던 매듭을 일일이 제거했다.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