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제77장 남아 있는 것(2)
“무슨 일 있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을까.
오스틴이 고개를 들어 준후를 쳐다보았다.
막 한 바늘을 꿰맨 직후였다.
“봉합사가 불량입니다. 매듭을 제대로 지었는데 중간에 흐물거리면서 풀어져 버렸습니다.”
“허…….”
오스틴이 한숨을 내쉬었다.
착용하고 있던 마스크가 펄럭거렸다.
곡반에 버려진 봉합사와 문합되지 않은 혈관을 번갈아 바라보는 오스틴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리를 정녕 이런 식으로 버리는 건가.
착잡한 건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혈관 연축.
그러니까 혈관이 비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쌍둥이의 혈관이 비슷한 시기에 문합되어야 했다.
그래야 혈류의 흐름이 일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꼴을 보라.
오스틴은 5 분의 3 가까이 문합을 진행했고 준후는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해놓은 게 없는 셈이 되어버렸다.
격차가 너무 벌어졌다.
“교수님께서 문합 속도를 조금 늦춰주시면 안 됩니까?”
레이먼드가 다급하게 물었다.
“우리가 분리한 건 작은 뇌혈관이 아니고 큰 뇌혈관이야. 시간을 끌면 뇌에 허혈 증상이 온단다.”
“그럼 연축이 더 위험합니까? 허혈이 더 위험합니까?”
“둘 다. 방금 네 질문은 어머니가 더 좋으냐, 아버지가 좋으냐고 묻는 질문과 똑같단다.”
오스틴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았다.
헥터 역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초조함에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황금 같은 시간은 버려지고 있었다.
‘하필이면…….’
준후는 수술 부위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 상상으로 수술을 수십 차례 했지만 이런 케이스는 단 한 번도 상상 못 했다.
역시 상상은 현실을 따라잡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준후의 시선이 문득 벽시계로 향했다. 수술을 한 지 벌써 15시간이 지났다.
문합술은 15분 째 진행 중이었다.
중대 뇌동맥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게 잡아야 20분 정도 될 것이다.
그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부를 봐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준후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동시에 자신이 가진 무기들을 순식간에 훑었다.
의학적인 지식과 경험.
응용할 수 있는 무공과 내공 등등.
1초가 꼭 1분 같았다.
짧은 시간에 그동안 지나온 궤적들이 영화 필름처럼 쉭쉭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답은 바깥에 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 자신의 안에 있을 것이다.
“교수님. 허혈과 연축이 아빠와 엄마를 고르는 일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레이먼드가 비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그랬지.”
“지금 엄마와 아빠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할…….”
“아뇨.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준후가 레이먼드의 말을 잘라먹었다.
손에서 놓고 있었던 니들홀더와 포셉을 다시 손에 쥐었다.
“교수님은 교수님 속도대로 진행해 주세요. 제가 교수님 속도에 맞추겠습니다.”
준후의 눈동자에 광채가 서렸다.
절망을 딛고 일어선 눈빛이었다.
“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건 불가능해. 레이먼드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구나.”
“…….”
“굳이 따지자면 허혈보다는 연축이 낫겠어. 아무래도 혈관이 망가지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그래. 준후 너무 무리할 필요 없어.”
잠자코 있던 헥터도 모처럼 나섰다.
아이를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괜히 속도에 욕심 부렸다가 문합이 엉성하면 그것도 문제야. 누수가 일어나면 그것대로 골치 아파진단 말이지.”
“더 이상 입씨름할 시간도 없습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교수님.”
“허허…….”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후회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합을 빨리 해도 후회할 수 있단다.”
“뭘 해도 후회한다면 원하는 것을 하고 후회하겠습니다.”
준후는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엠마와 소피아는 못 알아들었겠지만 준후는 아이들과 약속했다.
아이들에게 꼭 건강한 삶을 되찾아주겠다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번 수술에 키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뇌혈관 문합술을 빈틈없이 성공해야 했다.
준후는 혈관이 비틀어져 아이들이 위험한 재수술을 받는 것도 싫었고.
뇌허혈 때문에 아이들 뇌에 장애가 남는 것도 싫었다.
“좋다. 뜻대로 해보거라.”
“교수님, 안 됩니다. 너무 무모합니다. 최대한 연습 때와 비슷한 환경을 유지해야 수술 성공률이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헥터가 목청을 높여 반대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오스틴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타협 없는 거절의 표시.
헥터는 씩씩거리면서도 더 저항하지는 않았다.
잠깐의 소란 끝에 뇌혈관 문합술의 막이 다시 올랐다.
문합을 하기 전.
준후는 새로운 11-0 nylon 봉합사의 양 끝을 잡아당겨 보았다. 팽팽한 장력이 손끝에 전달되었다.
불량품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걸로 봉합을 했으면 개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스태프들끼리 의리가 상할 필요도 없었으며 아이들이 위험에 처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지금 준후가 해야 하는 일은 엎지른 물을 닦고 컵에 새로운 물을 담는 일이었다.
지금부터 오스틴 교수님을 따라잡아야 해.
시간으로 계산해 보면 한 매듭 당 10초를 끊어야겠지.
11-0 봉합사로 정교한 봉합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해낼 수밖에…….
난 무림인 출신이잖아?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졌잖아?
나만의 무기를 활용한다면 못할 것도 없어.
아니. 이건 오로지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멈췄던 시간.
멈췄던 준후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30분 후, 휴게실.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하던 스태프들이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들 기진맥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이따금 음료수로 목마른 입을 축일 따름이었다.
현재까지 소요되는 총 수술 시간은 16시간.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논스톱으로 수술을 진행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레이먼드가 곁에 앉은 준후를 힐끔거렸다.
다른 스태프들과 달리 준후는 멀쩡하게 소파에 앉았다.
어깨가 퍼졌고 허리는 꼿꼿했다.
지친 기색은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레이먼드가 경악한 건 준후의 강철 체력이 아니었다.
준후의 문합 솜씨였다.
레이먼드는 지금으로부터 30분 전으로 돌아갔다.
준후가 보여준 F1 레이싱 카 같았던 문합 솜씨를 떠올렸다.
과장이 아니라 그때 준후의 손은 보이지가 않았다.
뭔가가 허공에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손에서 바람이라도 나오는 건지.
준후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준후의 가운이 희미하게 펄럭거리기도 했다.
‘손은 아예 못 보고 잔상 같은 것만 본 것 같은데.’
레이먼드의 시선이 곧 준후의 얼굴에서 준후의 손으로 옮겨졌다.
저 손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손이란 말인가.
어떻게 오스틴 교수보다 늦게 문합을 시작해서 오스틴 교수보다 빨리 문합을 끝낸다는 말인가.
레이먼드는 준후의 손을 세계 7대 미스터리에 추가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내 손에 꿀이라도 묻었어?”
레이먼드의 시선을 느낀 준후가 피식 웃었다.
“아니, 문합 속도가 말도 안 되잖아. 기계손도 아니고.”
“하…… 솔직히 나도 깜짝 놀랐구나. 설마 설마 했는데 나를 따라잡을 줄이야.”
오스틴이 감탄조로 지원사격에 나섰다.
준후가 문합술에 성공할 거라고 누구도 믿지 않았다.
물에 빠졌으니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일을 맡겼을 뿐.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니?”
오스틴이 계속해서 물었다.
“아닙니다. 극한의 상황이 되니까 저도 모르게 초인적인 힘이 터져 나온 것 같습니다.”
“초인적인 힘이라…… 정말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겠구나.”
“…….”
“어쨌거나 정말 잘해줬다. 덕분에 가장 큰 고비를 무사하게 넘겼어.”
“별말씀을요. 제가 봉합사를 제대로 확인 못 한 탓도 있는데.”
“네 탓이 아니야. 봉합사가 불량이었던 건 일종의 천재지변이었지.”
오스틴이 따뜻하게 준후를 다독여주었다.
준후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대화가 끊어진 사이.
준후는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엠마와 소피아, 스태프들.
그리고 준후 자신을 구원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이 두 손이었다.
‘지금도 실감이 안 나네.’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문합 속도를 압도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준후는 두 가지 작전을 동시에 펼쳤다.
하나는 초식화였다.
이미 한 번 문합술을 해보지 않았던가.
그 때의 감각을 초식으로 만들어서 반사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손이 나가도록 만들었다.
초식의 장점은 생각과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과 고민이 없으면 자연스레 행동이 빨라지기 마련이었다.
준후의 두 번째 작전.
그것은 초식을 펼치면서 ‘전광석화’의 구결을 되뇌었던 것이다.
구결이란 일종의 마음가짐이었다.
현대인에게 사이비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마음은 현실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화산파의 매화검법만 해도 그랬다.
검을 휘두르는데 어떻게 매화향이 난단 말인가.
하지만 깊은 신념과 내공이 뒷받침이 된다면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내공을 운용하면서 준후는 굳게 믿었다.
자신이 번쩍거리는 한 줄기의 전광이라고.
반짝 타오르는 불꽃이라고.
아이들을 살리겠다는 필사적인 각오 때문이었을까.
준후는 심마(心魔)에 빠지지 않았다.
스스로 번개가 되었고.
스스로 불꽃이 되었다.
솔직히 똑같은 상황이 왔을 때.
이번처럼 문합술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는 준후조차 장담하기 어려웠다.
물아일체의 경지는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피곤하실 텐데 한 분씩 저한테 오시죠. 일단 오스틴 교수님부터 오세요.”
“갑자기 무슨 일이니?”
“와보시면 압니다.”
오스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후 옆 자리에 앉았다.
준후는 추궁과혈과 점혈법으로 오스틴의 몸 구석구석을 풀어주었다.
내공 수액술.
그러니까 심장에 내공을 불어넣어 내공을 전신으로 퍼트리고 이를 통해 일시적으로 기력을 불어넣는 수법까지 펼쳤다.
“아니, 갑자기 몸이 쌩쌩해졌는걸? 믿을 수가 없구나.”
오스틴이 눈을 치켜 뜬 채 본인 몸을 훑었다.
준후는 그저 웃었다.
“요술이라도 부린게냐?”
“동양식 마사지를 해드렸습니다. 예전에 배운 적이 있거든요.”
“교수님. 일부러 호들갑 떠시는 거 아닙니까?”
이를 지켜보고 있던 헥터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다음 호출에 치료를 받더니 헥터 역시 준후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레이먼드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준후가 풀 세트(?) 회복술을 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체력이나 집중력 때문에 문제가 터질 일은 없을 테고 이제 마무리만 남은 건가?’
준후가 가볍게 목을 좌우로 까닥거렸다.
꿀 맛 같았던 휴식 시간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수술방으로 복귀했다.
잠시 수술방을 맞아주었던 신경외과 스태프들은 아이들에게 이상이 없었다고 전했다.
혈관 테스트를 진행했는데.
문합한 자리에서 누수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희소식도 전해주었다.
컨디션을 되찾은 스태프들이 수술을 재했다.
그로부터 3시간 뒤.
한 머리처럼 붙어 있던 엠마와 소피아의 머리가 떨어졌다.
두 아이는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준후는 코끝이 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