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제77장 남아 있는 것(4)
동녘이 떠오르는 이른 아침.
준후는 기숙사 한 구석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바람은 변화무쌍하며 천지를 뛰어 논다.
어디에도 머물 수 있지만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또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끝없는 순환으로 만물을 품어 안으니.
바람이 될 수 있는 자가 세상이 될 것이오. 세상이 되고 싶은 자는 바람이 되어야 할 지어다.」
청풍심법의 구결을 속으로 읊조리는 준후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떤 깨달음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화경을 경지를 뛰어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아주 중요한 통찰이었거늘.
호흡을 잠깐 놓친 사이.
깨달음이 준후를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준후가 한 박자 늦게 뒤를 뒤쫓았지만 소용없었다.
지나간 시간을 되찾을 수 없는 것처럼, 지나간 깨달음도 되찾을 수 없었다.
“하…….”
준후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빠져 나왔다.
실망감이 컸던 탓일까.
집중력이 바닥을 쳤다.
수련 의지도 확 꺾여 버렸다.
준후는 가부좌를 풀고 두 다리를 바닥에 쭉 뻗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 교육을 받은 지도 벌써 거의 7년이 다 되어갔다.
뇌혈관 파트.
뇌종양 파트.
소아 신경 파트.
정형외과(목·허리)파트.
정위신경 파트(치매 파킨슨) 파트.
수부외과 파트.
외상외과 파트.
신경외과에서 진료를 보는 모든 세부 전공을 마스터 했지만 무공에 관한 부분만큼은 별다른 성장이 없었다.
준후는 무림과 마찬가지로 화경에 머물렀다.
현경의 길은 멀고 험했다.
준후가 한 걸음 다가가면 현경이란 놈은 두세 발짝씩 준후에게서 도망치는 것 같았다.
‘정말 안 되는 걸까? 포기해야 하는 걸까?’
준후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히 현경이 아니더라도.
준후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무공과 내공을 익힌 괴물이었다.
그 장기를 바탕으로 신경외과 서전으로서 거의 정점에 올랐다.
거만하게 들리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왜일까.
준후는 여전히 현경이라는 경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준후가 현경을 놓지 못하는 걸까.
현경이 준후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
이제는 둘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구별이 안 갔다.
‘대체 왜…….’
준후는 스스로에게 끈질기게 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찾아냈다.
정답은 준후가 착용하고 있는 건강 팔찌에 있었다.
준후는 고개를 숙여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T.A(교통사고)로 뇌사에 빠져 장기를 기증하고 떠난 성호의 팔찌.
10년 넘게 착용한 팔찌는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뇌사, 식물인간.
신경외과 서전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질환의 이름을 준후는 속으로 되뇌었다.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 중이지만 뇌사와 식물인간에 관해서는 어떤 치료법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기적의 힘을 바라는 거겠지.’
준후가 헛웃음을 지었다.
현경의 고수들은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루어 경이로운 활약을 펼치곤 했다.
현경의 고수가 되어 얻은 힘을 현대적인 의료 시술에 접목한다면 뇌사와 식물인간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준후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경에 집착하고 있을 확률이 컸다.
“형, 약속은 반드시 지킬게. 나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 아니야.”
아련한 표정의 준후가 팔찌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 * *
샤워를 마친 준후가 옷을 갈아입고 그 위에 의사 가운을 걸쳤다.
의사 가운 왼쪽 가슴팍에 일곱 개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황금색 배지 중앙에 ‘M’이라는 대문자가 박혀 있었다.
‘M’은 마스터의 약자였다.
배지가 일곱 개인 이유는 준후가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서 배운 모든 과목에서 1등의 성적을 거뒀다는 의미였다.
준후는 기숙사를 나와 건물 옥상을 찾았다.
오렌지처럼 둥글고 노란빛을 띤 아침 해가 지평선을 막 탈출한 참이었다.
휘이이잉.
1월의 매서운 칼바람이 준후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하지만 준후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비록 현경의 경지는 이루지 못했음에도 준후는 한서불침이었다.
한서불침.
이는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않는 경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현경 = 만독불침 = 한서불침.
이렇게 셋이 짝을 짓는 게 보통이거늘 준후는 그 셋 중에 현경만 이루지 못했다.
매우 특별한 케이스였다.
왜냐고?
보유한 내공이 어마어마해서였다.
보통 무림인들은 단전에만 내공을 축척하는 데 비해.
준후는 판타지 소설의 도움(?)을 받아 마나 서클도 같이 익힌 상태였다.
7년간 꾸준히 수련한 덕분에 준후는 무려 6서클에 달하는 마나 서클을 축적했다.
단전이 두 개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공이 전신에 흘러넘치면서 자연스럽게 해독도 되고 추위와 더위 또한 느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달밤에 체조를 하듯.
준후는 옥상에서 혼자 무공을 펼쳤다.
날렵하게 보법을 밟았고.
세가가 자랑하는 청룡권법도 펼쳐보았다.
준후의 주먹은 용의 머리가 되었다가 몸통이 되었다가 꼬리가 되기도 했다.
아니, 준후는 한 마리의 용과 다름없었다.
누군가 준후의 수련을 지켜봤다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동작 하나하나가 강맹하고 눈에 안 들어 올 정도로 빨랐으니까.
그 누군가가 만약 격투기 선수였다면 아마 심한 좌절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준후의 신체는 이미 인간을 초월했으니 말이다.
준후는 대략 1시간 동안.
무림에서 익혔던 무공들을 하나하나 되짚은 후에야 수련을 멈췄다.
“휴, 이제 살 것 같네.”
준후가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공이 넘쳐도 문제였다.
요즘 들어 끓어오르는 힘을 주체할 수 없다는 기분을 자주 느끼고 있었다.
몸 풀기를 마치고 준후는 1층 식당으로 이동했다.
때마침 식당 입구에서 올리버와 맥스웰을 마주쳤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두 사람의 인사에 준후는 손을 들어 화답했다.
그리고 식판에 음식을 담은 뒤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던 중.
준후는 잠깐 고개를 들어 두 친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삼총사가 된 지 엊그제 같은데.
올해로 이 녀석들과 보낸 시간이 무려 7년이나 지났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
맥스웰이 준후의 시선을 의식하고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아니, 그냥. 시간이 벌써 이렇게 빨리 갔나 싶어서. 근데 너 이제 왼손도 잘 쓴다?”
“이제 왼손 오른손 구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데?”
맥스웰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맥스웰은 보란 듯이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해서 채소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올리버가 부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도 준후 말 들을 걸 그랬나? 바보처럼 보여서 안 따라했는데…….”
“지금도 안 늦었어. 꾸준히 하다 보면 이 몸을 쫓아올 수 있을 거야. 물론 그때는 나도 지금보다 더 손놀림이 좋아지겠지만.”
“거만이 하늘을 찌르네.”
“죄송합니다, 마스터. 감히 마스터 앞에서 주름을 잡다니…….”
준후의 지적에 맥스웰이 익살맞게 예의를 차렸다.
준후가 피식 웃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음식을 바깥으로 뿜어낼 뻔했다.
지난 7년간.
준후는 맥스웰을 제자로 삼았다.
쇄지공을 가르치고, 양수호박기술을 가르치고, 호월십이수도 일부 전수해 주었다.
준후 자신이 무공으로 성장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무공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 점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눈앞에 있는 맥스웰이 살아 있는 증거였다.
다른 동기들은 바보 같다고 기피했던 무공 훈련을 맥스웰만큼은 끈기 있게 따라주었고.
맥스웰은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서 명실상부 2인자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아마 4년 차쯤 부터였을 것이다.
맥스웰이 레이먼드를 추월했던 시점이.
그럼 무공 수련법이 한국에서도 100퍼센트 통한다는 말이겠지. 후학을 가르칠 때 무조건 무공을 가르쳐야겠어.
솜씨 좋은 외과의는 많으면 많을수록 환영이니까.
준후는 잠깐 후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올해로 37살.
의대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부스트업 프로그램 7년.
준후의 경력은 이제 무시 못 할 수준에 이르렀다.
슬슬 아랫사람을 가르칠 때도 됐다.
“그래서 준후,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올리버가 준후에게 물었다.
어제부로 부스트 업 교육은 사실 상 끝났다.
나흘 뒤에 있는 수료식까지 자유였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가거나 여행을 떠난 동기도 많았다.
“나?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굳이 귀국해서 고생하게? 한국 서전은 봉급도 별로고 복지도 엉망이라며.”
“그래서 내가 필요한 거야.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도 애초에 그거 때문이고.”
“…….”
“전공을 7개나 익혔겠다, 이제 신경외과와 관련된 환자면 나 혼자서도 치료할 수 있으니까.”
준후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미국에서 수련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초심을 잃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7개의 전공을 마스터했으므로 준후는 7인분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조금 조심스러운데 말이야…… 이쯤 되면 스스로를 학대하는 거 아니야?”
“…….”
“메이유에 온 김에 여유롭게 살아보는 건 어때?”
올리버가 준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듯했다.
“나도 언젠가 은퇴할 테니까 여유는 그때 부리지 뭐. 올리버 너는 졸업하면 어디 갈 건데?”
“나야…… 메이유 소아 신경외과에 눌러앉아야지.”
올리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졸업했다고 해도 전공 한 가지는 반드시 선택해야 했다.
종합 신경외과 같은 과는 없으니까 말이다.
“오스틴 교수님 때문에?”
“눈치 한번 빠르네. 맞아. 아버지의 뒤를 잇는 권위자가 되고 싶어.”
대화를 마친 후 준후와 올리버가 맥스웰을 응시했다.
넌 어디를 갈 거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딱히 정해놓은 건 없는데 말이야…… 한 1년 정도? 쉴까 한다.”
“1년이나 쉰다고? 그러다가 손 녹슬겠다.”
올리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손이 녹슬기는 왜 녹슬어. 준후가 가르쳐준 훈련법이 있는데. 어쨌거나 좀 쉬면서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고민해 보려고.”
“…….”
“7년이나 개같이 굴렀잖아? 안식년을 가져도 이상할 건 없지.”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기점으로 세 사람의 갈 길이 다 달라졌다.
정든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준후는 마음이 퍽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별이 있으면 만남이 있는 법.
7년 만에 돌아갈 고국에서 준후는 분명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을 믿었다.
“맥스웰.”
“왜?”
“혹시라도 나중에 한국에 올 생각은 있어?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봉급하고 복지만 챙겨준다면 생각은 해볼게.”
“고맙다. 가능성이라도 열어줘서.”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뭐가?”
“그거 하나만 주면 안 되냐? 어차피 그랜드 마스터인 건 홈페이지에 나오는데.”
맥스웰이 준후의 가슴에 달린 배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으이구, 진상아. 탐낼 걸 탐내라. 그리고 배지만 있으면 뭐 하냐? 실력이 뒷받침 되어야지.”
“아니, 물어 보지도 못 해? 배지로 마스터 흉내를 내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장식용으로 하나 얻고 싶다는 거잖아.”
툭탁 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준후는 피식 웃었다.
이 흥겨운 다툼을 감상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구나 싶기도 했다.
지이이잉.
때마침 가운에 넣어둔 휴대폰이 떨렸다.
뉴튜브 편집자인가?
어제 전화를 한다고 했다고 문자를 보냈었는데.
무심결에 번호를 확인한 준후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이 번호는…….
수부외과의 번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