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제77장 남아 있는 것(5)
“네.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대답을 하는 준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통화를 마친 준후는 휴대폰을 가운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식사하다 말고 어디 가는데?”
“응급 환자 생겼다고 도와달래.”
“무슨 환자?”
“모르는 게 좋을걸? 입맛 뚝 떨어질 테니까.”
“뭔지 모르겠지만 가지마.”
올리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맥스웰 말도 맞아. 우리, 7년을 미친 듯이 달려왔잖아. 교육도 끝났는데 최소한 며칠은 쉬어야지.”
“그렇다고 위독한 환자가 있는데 모른 척할 순 없잖아?”
단호한 목소리로 준후가 되물었다.
다른 스태프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술이라면 준후도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스태프들은 스스로 환자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준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준후에게는 그들을 도와줄 힘이 있었다.
힘이 있다면 그 힘을 사용하는 게 옳지 않을까.
그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보람이 있는 일이면서 동시에 준후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훈련이었다.
서전으로서 수술을 피하고 싶지 않았고.
수술을 피할 수도 없었다.
“미안한데 식판 좀 치워주라.”
말을 마친 준후가 번개처럼 식당을 떠났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올리버가 감쪽같이 사라진 준후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혀를 내둘렀다.
“저러는 거 하루 이틀 보냐? 그냥 그러려니 해.”
“나도 아는데 그래도 가끔 준후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전생에 수술 못 해서 죽은 귀신도 아니고 말이야.”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겠지.”
“사연이라…….”
올리버는 맥스웰이 말한 사연이라는 단어를 읊조려 보았다.
확실히 사연 없이는 행동도 없다.
올리버만 해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사연으로 메이유를 택하고 소아 신경외과를 택했으니까.
그렇다면 준후가 환자에게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사연은 무엇일까.
비록 그 사연은 알 수 없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보통 사연은 아닐 것 같았다.
올리버가 짐작컨대.
가장 확률이 높은 사연은 소중한 누군가가 수술을 받지 못해서 죽었다는 것 아닐까.
“근데 무슨 수술이길래 준후가 직접 나서지?”
맥스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응급 환자라도 보통은 과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않나? 우리 클리닉이 명색이 메이유인데?”
“그러게. 듣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
올리버도 맥스웰의 의견에 동의했다.
준후 한 명이 없다고 해서.
메이유 클리닉이 안 돌아갈 리는 없었다.
메이유는 명실상부 미국 최고의 의학병원이었으니까.
그래서 궁금했다.
대체 어느 과에서 무슨 이유로 준후를 찾았는지.
“총상 환자 아닐까? 준후가 총상 환자 하나는 기깔나게 수술하잖아. 저번 달은 뇌에 박힌 총알도 빼내지 않았나?”
“내 생각에는 복합 교통사고 환자 같은데? 머리도 다치고 복부 장기도 다치고.”
두 사람이 준후가 진료할 환자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 * *
한편 그 시각.
준후는 청풍보를 밟아가며 응급실 건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거센 맞바람에 머리카락이 뒤로 눕고 의사 가운이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준후의 두 다리가 빠르게 교차했다. 지금의 준후는 한 마리의 치타였다.
응급실로 향하는 도중.
저 앞에서 한 무리의 의사들이 준후 앞을 가로 막으며 걷고 있었다.
‘젠장, 하필이면.’
속도가 워낙 빨랐던 탓에 방향전환 할 틈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환자 진료를 보기도 전에 환자를 만들 판국이었다.
졸지에 볼링공이 되어 볼링핀 같은 의사들을 덮칠 판국이었다.
탓!
빠르게 계산한 준후가 땅을 박차고 날았다.
붕 뜬 준후가 마주 오는 의사들의 머리 위로 날았다. 그 높이는 무려 10미터에 달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준후에게 등을 보여주고 있었으므로 준후의 경이로운 도약을 보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마주 보는 상황이었으면 해명하기 훨씬 곤란했을 테니까.
착!
준후는 허리와 무릎을 살짝 굽히면서 만근추의 수법을 사용했다.
내공과 무게 중심을 양 발바닥에 몰았다.
충격 흡수와 균형 잡기.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준후는 계속해서 달렸다.
응급실이 가까워질수록 달리는 속도를 조금씩 떨어뜨렸다.
지이이잉.
자동문이 열렸다.
마침내 도착한 응급실.
대기석에는 20여 명의 환자가 지루한 표정으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싸한 알콜향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준후는 가장 가까운 간호사에게 물었다.
“방금 실려온 수부외과 환자 어디 있나요?”
“A섹터 복도 끝이요. 환자분 상태가 정말 심각하더라고요…… 저는 끔찍해서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간호사가 진저리 치며 대답했다.
준후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침상으로 향했다.
침상에 도착하자 보호자로 보이는 여성이 넋 나간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성은 준후가 온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침상에는 환자가 누워 있었다.
환자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했다. 낯에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환자의 머리와 몸과 팔은 무사했다.
하지만 다리가 문제였다.
무릎 아래에 대각선의 형태로 생긴 상처가 있었다.
상처 사이로 뼈와 근막, 근육, 혈관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통 사람이 봤다면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참혹한 광경이었다.
‘아…….’
준후도 속으로 한탄했다.
환자 다리의 3분의 2가량이 절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를 살짝만 건드려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 * *
“네. 교수님. 네. 알겠습니다.”
데빈은 에이튼 과장과의 통화를 끊고서 응급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으로부터 5분 전.
응급실에 한 환자가 도착했다.
환자는 전기톱으로 목공 작업을 하다가 실수로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주 있는 케이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분기별로 한두 개씩은 터지는 케이스였다.
문제는 환자의 상태가 여타 환자들과 달리 심각하다는 점이었다.
응급실 노티에 따르면 환자의 다리는 벌써 3분의 2 가까이 날아갔다고 했다.
수액을 투여하고.
가까스로 지혈에 성공하고.
이후에 다리 CT를 촬영했다고 한다.
접합 수술에 방해가 될까봐.
추가적인 처치를 더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를 못 믿으시는 건가? 왜 그 녀석 말을 따르라고 하셨지?’
과장과의 통화 내용을 떠올리며 데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응급실로 내려가는 도중.
에이튼 과장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 수석인 준후를 호출했다. 그러니 준후를 도와서 접합 수술을 잘 마쳐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였다.
데빈이 누구인가.
신입이긴 하지만 그 역시 엄연히 수부외과 교수였다.
그런데 교수인 자신이 왜 교육생 따위를 도와야 한단 말인가. 그 반대가 되어야 맞는 것 아닌가.
준후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데빈은 준후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서둘러 도착한 응급실.
데빈은 환자가 누워 있는 침상에 도착했다.
의외로 준후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분명 기숙사에 있었을 텐데 준후가 자신보다 빨리 도착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준후는 키가 훤칠하고 선하게 생긴 동양인 남성이었다. 의사 가운 가슴팍에는 7개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신경외과 세부 전공을 가르치는 과장들이 인정한, 단 한 사람만 받을 수 있다는 전설의 배지였다.
뭐, 그래 봐야 교육생 주제에 좀 괜찮다는 표시겠지만 말이다.
사실 말이 안 되잖아?
고작 1년 만에 수부외과 펠로우 과정을 습득한다니.
그냥 벼락치기로 겉만 훑었겠지.
“그쪽이 준후 선생님입니까?”
데빈이 준후에게 먼저 아는 체를 했다.
“네. 그쪽은 데빈 선생님?”
“맞아요. 환자 상태는 어때요?”
데빈이 침상에 바짝 붙어 환자의 다리부터 살폈다.
다리를 확인하자마자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수부외과 전공이었지만 다리가 이렇게 아작 난 건 처음 봤다.
뾰족뾰족한 전기 톱날 때문에 뼈와 근육, 인대, 혈관이 지저분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남은 부위가 위태롭게 다리를 지탱 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출혈은 거의 다 멎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오는 길에 응급처치를 제대로 받은 데다 응급의학과 의사도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
“서…… 선생님.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환자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아까부터 자신의 참혹한 다리를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절단을 하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절단이요?”
“절단이요?”
환자와 보호자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면 앞으로 한 쪽 다리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저도 이런 말씀을 전해드려서 안타깝지만 그 편이 환자분께 훨씬 더 안전할 겁니다.”
데빈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라고 해서 이렇게 잔인한 말을 왜 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단 절단 범위가 너무 넓었다.
다리가 절반 정도만 잘려 나갔더라면 필사적으로 수술을 했을 거다.
그런데 환자는 무려 3분의 2가 날아갔다.
손목도 팔도 아니고 무려 다리가.
문제는 또 있었다.
날카로운 예기에 베였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전기 톱날 때문에 생긴 상처가 울퉁불퉁했다.
접합수술을 한다고 해도 상처가 다시 벌어지거나 찢어지거나 분리될 확률이 높았다.
감염 또한 심각한 골칫거리였다.
물론 에이튼 과장은 환자에게 접합 수술을 하라고 했지만 현장에서 환자를 본 데빈의 의견은 달랐다.
이 환자는 수술을 해서는 안 됐다.
만약 과장이 현장에 있었다면 그도 똑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선생님. 전 외발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다리를 붙여주세요. 여긴 메이유 클리닉이잖아요. 어떻게든 방법이 없습니까?”
“선생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환자와 보호자가 동시에 간청했다.
마음이 약해졌지만 데빈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안 되는 걸 된다고 하는 것도 기만이었다.
좋다.
백번 양보해서 수술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수술 결과가 나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환자는 의료 소송을 걸어 데빈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메이유 클리닉이라고 해서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데빈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다리를 절단하고 나중에 의족을 다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의족이요?”
“예. 요즘은 의족도 잘 나와서 걷는 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물론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만…… 그래도 이게 최선이에요.”
말을 마친 데빈이 곁에 서 있는 준후를 응시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는 눈빛이었다.
준후는 아까부터 전봇대처럼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무 말도 없이 턱만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동의서 받고 접합 수술 진행하죠.”
준후가 청개구리 같은 대답을 했고 데빈은 귀를 의심했다.
“하…… 방금까지 내가 한 말 못 들었어요? 이 환자분은 접합 수술을 하면 더 위험해진다니까요.”
“…….”
“어설프게 뼈나 근육, 인대, 신경 혈관을 건드렸다간 의족까지 못 달수도 있단 말입니다.”
데빈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준후는 눈썹 하나 까딱거리지 않았다.
데빈을 무시하고 환자와 보호자를 번갈아 응시했다.
“제가 환자분의 다리를 되찾아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하…….
이 새끼, 선 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