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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410화 (410/424)

410화

제79장 뜻밖의 행선지(5)

신원대학교 1층 로비.

시장처럼 북적였던 장소가 지금은 비교적 한산했다. 대기석에 앉은 환자들은 없다시피 했으며 검사실을 오가는 환자도 많이 줄어들었다.

외래 진료가 끝난 것이다.

준후의 발걸음은 흉부외과 외래 진료실로 향하고 있었다.

제3진료실 앞.

전광판에 떠오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준후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광판 속에서 아영이 빙긋 웃고 있었다.

레지던트 면허를 땄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영은 벌써 교수가 되어 외래 진료를 보고 있었다.

끼이이익.

진료실 문이 열렸다.

낯익은 얼굴.

그리웠던 얼굴.

사랑하는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후와 아영의 눈빛이 교차했다.

두 사람 주변의 시간만 멈추듯.

둘 다 움직임이 없었다.

이윽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갔다.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지금 이 순간 말은 필요 없었다.

준후는 그저 아영을 꼭 끌어안았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북받쳐 올랐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흐릿해졌다.

오래 전부터 아영과 재회할 때.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 번 터진 감정을 수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진한 포옹을 마친 후.

준후가 아영과 떨어져 아영을 쳐다보았다.

아영이 눈앞에 있다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났다. 화상 통화를 하는 일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현실감이었다.

아영도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동자가 촉촉하고 눈시울이 빨갰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준후가 가까스로 첫마디를 떼었다.

헤어짐의 원인은 전적으로 준후에게 있었다.

준후가 수련을 위해 메이유로 떠났으니까.

무려 7년을 미국에 있었으니까.

준후의 결정으로 아영은 분명 외로웠을 것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분명 괴로웠을 것이다.

흉부외과 펠로우 과정.

흉부외과 조교수가 되는 과정.

그 힘든 시기에 아영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준후는 죄책감을 느꼈다.

자고로 연인이란…….

서로가 힘들 때 버팀목이 되고 휠 곳이 되어 주어야하는 법 아닌가.

“오래 기다린 건 맞지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왜…….”

“네 꿈을 쫒는 게 왜 나한테 미안해 할 일이야?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지.”

제법 감정을 추슬렀을까.

아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내가 널 기다린 시간을 미안한 시간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단지 그뿐이야.”

아영의 대답이 똑 부러졌다.

새삼 아영의 고등학교 시절 별명이 똑순이였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 다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

“…….”

짧은 대화가 끝나고 긴 침묵이 시작되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게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해서 찾아온 침묵이었다.

준후는 아영 곁에 다가가서 한 손으로 아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배고프지? 일단 뭐라도 좀 먹을까?”

“준후, 넌 뭐 먹고 싶어?”

“네가 좋아하는 빵.”

준후의 말에 아영이 피식 웃었다.

* * *

병원 근처에 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있었다. 음료를 같이 취급하고 앉을 테이블도 있는 곳이었다.

턱!

아영이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쟁반에 빵이 한가득이었다.

준후는 테이블에 마실 음료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자리에 앉았다.

“이거 진짜 다 먹을 수 있겠어?”

준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구입한 빵과 아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영이 직접 고른 빵은 무려 7개. 거기에 조각 케이크 1개도 있다.

아영의 별명이 빵순이긴 하지만.

이렇게 많은 빵을 먹었던 건 같지는 않은데…….

“이 정도면 적당히 배부를걸?”

“배가 터질 정도가 아니고?”

“안 그래도 나도 요즘 준후 너처럼 뉴튜버나 할까 싶어. 빵이나 디저트 전문 뉴튜버.”

아영이 농담조로 말하다가 정색을 했다.

“그건 그렇고…….”

“뭐야? 그 매서운 눈초리는?”

“또또. 영양가 없는 피자 빵을 골라왔네. 빵집에 왔으면 빵다운 빵을 먹어야지.”

아영이 한참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아영은 오래전부터 반(反) 피자빵 파였다.

아니, 피자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주의 피자빵 세력이었다.

아영의 논리는 이랬다.

피자는 피자고 빵은 빵이다.

그러므로 피자빵은 존재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아영은 아직도 뭘 모르는 눈치였다.

준후가 피자빵을 고집하는 이유를 말이다.

준후는 사실 피자빵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 왜 피자빵을 골랐냐하면…….

준후가 피자 빵을 고를 때마다 정색하는 아영의 모습이 귀여워서.

아영에게 괜히 장난이라도 한 번 더 치고 싶어서였다.

“뭐라는 거야? 맛만 좋은데.”

준후가 약 올리듯 말하며 피자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내는 아영은 역시 귀여웠다.

암, 이 재미는 절대 못 버리지.

“칫! 귀국도 했겠다 조만간 빵으로 정신 교육 좀 시켜야겠어.”

“마음대로 하세요. 그건 그렇고 교수가 된 기분은 어때?”

“교수가 되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 할 일이 많아진 만큼 책임감도 커졌어.”

말을 마친 아영이 빵을 베어 물었다.

어쩌면 아영이 빵을 많이 먹게된 건 스트레스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를 가장 손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먹는 것이니까.

“힘든 거 있으면 다 말해. 다 들어줄게.”

“괜찮아. 나 잘하고 있어.”

“그거야 당연히 아는 거고. 남들한테 못한 이야기 많잖아?”

“남들한테 못한 이야기는 준후 너한테 꼬박꼬박 해왔는데?”

“그것도 아닐걸?”

준후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국에 있는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못한 말들 있잖아. 난 그걸 듣고 싶다고.”

준후가 아영의 정곡을 찔렀다.

순간 아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영이 준후를 손금 보듯이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준후도 아영을 손금 보듯이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영의 성격이라면 그동안 힘들었던 일을 준후에게 채 절반도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고민과 고충을 다 털어놓으면 자신이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준후 네가 먼저 미국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면 말할게.”

“난 딱히 힘들었던 거 없는데?”

“거짓말. 그럴 리 없어.”

아영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영이 너랑 가족들을 못 본 게 가장 힘들었고, 그다음이 인종차별 정도? 근데 인종차별도 처음에만 조금 있고 나중에는 아예 없어지더라.”

“정말? 그렇게 쉽게?”

“왜냐면…… 내가 실력으로 다 찍어 눌렀거든.”

준후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운기조식으로 인한 무한 체력.

후두부의 시신경을 자극해서 펼치는 가상의 수술 훈련.

호월십이수와 양수호박기술로 다져놓은 경이로운 손놀림.

내공을 이용한 각종 검사 및 임기응변 등등.

준후는 메이유를 씹어 먹고 귀국했다. 오죽하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겠는가.

“나 보통 사람 아닌 거 알지?”

준후가 주변을 살피다가 손바닥을 펼쳤다.

턱!

염력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음료잔이 준후의 손바닥으로 딸려 들어왔다.

격공섭물의 이치.

내공으로 물건을 움직이는 이치를 사용해 컵을 손에 쥐고 준후가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준후가 무림 출신임을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아영이 유일했다.

그래서 마음 편히 내공을 쓸 수 있었다.

“그건 언제 봐도 적응 안 된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어쨌거나 아영이 네 이야기를 해봐. 듣고 싶은 게 많아.”

준후가 양 손등 위에 턱을 괴고 아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충 이 정도?”

말을 마친 아영이 한 모금 남은 커피를 마셨다.

문득 매장에 걸린 벽시계를 응시했다.

현재 시각은 8시.

그러니까 2시간 가까이 혼자 떠들어댔던 것이다.

속에 있던 말을 다 털어내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후련한 아영이었다.

가족에게 할 수 없는 말.

동료들에게 할 수 없는 말을 준후에게는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연인이라는 관계는 참 신비한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혈연보다 더 끈끈한 구석이 있었다.

“귀 아프지 않았어?”

아영이 미안해하며 말했다.

뒤늦게 말을 너무 독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하게 들은 이야기를 귀 아팠던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와, 한방 먹었네.”

아영이 키득키득 웃었다.

아까 아영이 했던 말을 준후가 고스란히 되받아쳤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지만 앞으로는 고생이 덜할 거야. 내가 보장할게.”

“어떻게?”

“일단 체력적인 부분은 내가 100퍼센트 해결해 줄 수 있어. 새로 터득한 무공이 있는데 보여줄게.”

준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아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등을 내 쪽으로 돌려봐.”

“알았어.”

아영은 준후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등을 준후 쪽으로 돌렸다.

준후의 손바닥이 아영의 날갯죽지에 얹혀졌다.

‘이건…….’

뜨거운 무언가가 불쑥 심장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심장이 박동하면서 그 기운을 전신으로 뿜어냈다.

이 느낌은 마치…….

조영제가 온 몸으로 퍼지는 듯한 느낌과 비슷했다.

준후가 어깻죽지에서 손을 떼자.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알 수 없는 활력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또렷해지고.

살짝 굽었던 허리가 알아서 펴졌다.

기운이 너무 넘쳐나서 갑자기 평생 안 하던 헬스가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게 뭐야?”

“내공 수액술이라고. 심장에 내공을 보내는 무공이야.”

“내공 수액술?”

“응. 보통은 고수가 상대방의 혈맥에 내공을 흘려보내서 기력을 회복시키는데.”

“…….”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현대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서 의심을 살 수도 있고.”

“…….”

“그래서 방법을 바꿔봤어. 심장에 내공을 보내면 심장이 내공을 알아서 전신으로 순환시키는 방법으로.”

“…….”

“이것도 사실 아영이 네 덕분에 발견한 거야.”

“혹시 내가 흉부외과의라서?”

“빙고!”

준후가 유쾌하게 웃었다.

준후가 내공 수액술의 공을 아영에게 돌렸지만 아영은 그 깨달음이 전적으로 준후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다.

환자나 보호자, 또는 동료 스태프들에게 어떻게든 기운을 나눠주고 싶어서 준후는 필사적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 고민이 없었다면 내공 수액술이라는 경이로운 무공이 발견됐을 리 없었다.

“내공 수액술은 원래 반나절 정도 지속되는데 몇 년 사이에 개량을 좀 했어.”

“…….”

“요즘은 효과가 하루 정도 가더라. 앞으로 나한테 출근 전에 한 번 씩 받고 가면 몸이 힘들 일은 없을 거야.”

“…….”

“그리고 아영이 네가 심적으로 힘든 부분도 많이 좋아질 거고. 이제 난 어디 안 가. 무조건 한국에 있을 거거든.”

“…….”

“네 곁에서 항상 네 이야기를 들어줄게.”

준후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팔을 뻗어 아영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

그 사람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사실.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 수많은 사실이 아영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처음 재회했을 때.

잘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영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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