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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411화 (411/424)

411화

제80장 아무 데도 못 가(1)

병원 인근에 위치한 오피스텔 건물 안.

준후는 아영과 함께 502호실 앞에 서 있었다.

“비밀 번호는 0415야.”

아영이 씽긋 웃으며 문 앞에 서서 도어락에 비밀 번호를 눌렀다.

순간 준후는 울컥 눈물을 쏟을 뻔 했다. 비밀 번호가 준후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영은 왜 준후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했을까.

그 이유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분명 준후가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집에 들어올 때 준후를 떠올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집 비밀 번호가 준후 생일이면.

아영은 최소에 하루 한 번은 준후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아영이한테 평생 잘해야 해. 나라는 놈은…….’

준후는 입술을 질끈 깨물어가며 울컥하는 마음을 참아냈다.

띠리리~

경쾌한 전자음이 퍼졌다.

아영이 먼저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준후가 따랐다.

오피스텔은 아담했다.

갓 집에서 독립한 사회 초년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방과 거실의 구별이 없었다.

현관 왼쪽에 화장실이 위치했고.

우측 편에 싱크대, 세탁기, 냉장고, 옷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창가 쪽에 침대가 놓였으며.

침대 옆으로는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이 놓여 있었다.

아영의 평소 성격처럼.

방은 깔끔하게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따로 산 지 3년 정도 됐다고 했나?”

“응. 이젠 집보다 여기가 편할 정도야.”

“소음 문제는 없어?”

준후가 방을 훑으며 물었다.

“1년 전에 옆집에서 개를 키웠거든. 그때는 좀 짜증이 났는데 최근에 들어온 사람은 조용히 지내더라.”

“그랬구나. 음식은 어떻게 해먹어?”

“요즘은 나도 배달만 시켜 먹는 것 같네? 음식 만들고 치우는 게 너무 귀찮더라.”

아영이 귀엽게 혀를 내밀었다.

“차라도 한잔할래?”

“좋지.”

준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커피포트에 물을 담는 아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학 병원 교수라고 하면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다.

돈을 잘 벌며 화려하고 품위 넘치는 생활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외과 교수의 경우.

특히 흉부외과나 신경외과 교수는 설령 교수가 됐다고 해도 일상을 즐길 수 없었다.

외과 기피가 심해지면서.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면서.

교수들조차 밤낮으로 갈리고 있었다. 집에서 쉬다가도 응급 수술이 잡히면 병원으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떤 외과 교수는 교수가 돼서 술을 끊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언제 응급 콜을 받을지 몰라서 술을 못 마시게 된 것이지만.

아영의 상황도 비슷했다.

집에서 쉬다가 응급 콜을 받고 병원에 가는 게 싫어서.

위급한 환자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치료하기 위해서.

아예 병원 근처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아영이 병원 근처에 숙소를 잡게 된 데는 안타까운 사연이 숨어 있었다.

바야흐로 3년 전.

아영이 외래 진료를 끝내고 집에 쉬고 있던 때였다.

당직 레지던트가 아영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응급실에 대동맥 박리 환자가 왔습니다!

대동맥 박리는 흉부외과 질병 중에서 가장 응급한 질환이었다. 수술 난이도도 악랄한 걸로 유명했다.

아영은 급하게 차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대교에서 더 전진할 수가 없었다.

10중 추돌사고가 터진 탓이었다.

환자는 결국 다른 대학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그곳에서도 수술은 받지 못했다.

왜냐고?

대동맥 박리를 감당할 서전이 없어서.

당직 교수가 이미 응급 수술 중이라서.

그때 트라우마가 생긴 아영은 결국 병원 근처에 숙소를 얻기에 이르렀다.

언제까지 우리만 이런 대우를 받고 살아야 하나.

이런 삶이 정말 맞는 걸까.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개인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고군분투 하고 있거늘.

병원은 돈이 안 된다며 외과 계열을 구박하기만 했다.

필요한 물품을 대주지 않거나.

그 규모를 줄이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공단도 마찬가지였다.

외과 수술의 수가를 뭉텅뭉텅 썰어내기만 바빴다.

한마디로 외과의들은 어디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구박데기였다.

역시 스승님 말씀이 맞아.

한 개인의 희생으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어.

누가 나서서 시스템을 바꿔야 해.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될 거야.

아영이 사는 모습을 직접 지켜봐서 그런지 몰라도.

메이유에서 해외 서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경험해서 그런지 몰라도.

준후는 한국 서전들이 불합리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를 개선해야겠다는 갈증도 느꼈다.

“자, 받아.”

“잘 마실게.”

준후는 아영이 건네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국에 돌아온 소감은 어때?”

“별로…… 안 좋아.”

“응? 왜?”

아영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꿔야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아영이 네가 고생하면서 사는 것도 보기 싫고.”

“뭐, 다들 이렇게 사는데 어쩔 수 없지. 애초에 이런 사정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지금 이렇게 산다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잖아?”

“없으면 만들어야지.”

준후의 목소리에 오기가 깃들었다.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시스템을 고치는 것이 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면.

외과 계열의 미래는 없었다.

정말 외국에서 외과의를 돈 주고 수입해야 할 판국이었다.

“오늘은 스케줄 없지?”

“어…… 음…….”

“왜 말을 못 해?”

“없었던 스케줄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영이 애매하게 웃으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에 저장한 이름이 ‘웬수’로 되어 있었다. 아마 원수를 귀엽게 표현한 것이리라.

“어. 성환아.”

-…….

“알았어. 지금 갈게.”

통화를 끊고 나서야 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안 했어도 무슨 상황인지 손에 잡힐 듯했다.

“이거 병원 근처에 숙소를 잡은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럴지도?”

준후의 블랙 유머에 아영이 힘없이 웃었다.

“준후야, 미안. 한국에 온 첫날인데 내가 하루 종일 같이 있어줘야 하는데.”

“괜찮아. 앞으로는 질리도록 볼 테니까.”

“그럴 일은 없어. 난 널 보는 게 안 질리거든.”

“말이나 못하면 밉지라도 않지. 나 신경 쓰지 말고 다녀 와. 그건 그렇고 내가 병원까지 데려다줄까? 너 안고 보법 밟으면 잠깐인데.”

“그 정도로 급한 건은 아니야. 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침대에서 일어난 아영이 준후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 * *

아영의 집에 혼자 남은 준후가 창가에 섰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신원대학교 병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해가 떨어지면서 사위가 어두웠다.

그래서일까.

불빛을 뿜어내는 본관 건물이 등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귀국한 지 하루밖에 안 됐지만.

준후는 벌써부터 앞으로의 계획을 짜보았다.

할 일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그것들을 다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우선 순위였다.

어떤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일까.

일단 서전으로서 복귀할 병원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무난한 선택이라면…….

정들었던 신원대학교 신경외과 서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동기와 선·후배들이 교수를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으니 따로 적응할 시간이 필요치는 않을 것이다.

준후가 메이유에서 쌓은 평판을 감안하면.

최소 부교수 자리는 너끈하게 차지할 확률이 높았다.

참고로 의국 교수의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조교수.

부교수.

과장.

부교수라면 의국에 2인자인데, 같은 부교수라도 나이와 경력이 더 많은 사람이 더 대접받는 구조였다.

준후가 부교수가 된다면.

사실상 4인자쯤 될 것이다.

‘다 좋은데…… 아는 사람들이라 오히려 일 처리가 쉽지 않을 것 같네. 승진 문제도 걸리고.’

준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준후의 진짜 욕심은 최연소 신경외과 과장이 되는 것이었다.

과장이 되어야 자신의 뜻을 강단 있게 밀어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의 의사 결정 과정은 수평보다는 수직에 가까웠다.

위에서 아래로 가기는 쉬워도.

아래에서 위로 가기는 어려웠다.

아래에서 위로 가는 행동을 윗선에서는 싸가지 없다, 권위에 도전한다고 받아들이기 일쑤였다.

신원대의 경우.

다 지인들이라서 판단을 할 때 정에 휩쓸릴 확률까지 높았다.

‘다른 병원도 심각하게 고려를 해봐야 하나?’

고민하던 준후가 이내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때렸다.

바보처럼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병원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준후는 아직 ‘그것’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것’을 끝마쳐야만.

제대로 된 서전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이이잉.

예상치 못한 난관에 당황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번호를 확인했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준후는 일단 받았다.

“누구시죠?”

-준후야. 오랜만이구나. 나 성덕이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아니, 이제 부협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전화를 건 사람은 표성덕이었다.

준후가 레지던트 시절 서울 신원대 병원 신경외과 과장을 맡았던 사내.

지금은 부산 신원대 병원 병원장이자 한국 신경외과 협회 부회장이 된 사내.

얼굴을 안 본지도 7년이 지났으니 휴대폰 번호가 바뀐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부협회장님께서 웬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네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메이유에서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수료했다지? 그것도 모든 전공에서 수석을 차지했다고 하더구나.

“노력도 했고 운도 따랐습니다.”

-겸손한 건 여전하구나.

짧은 문답 후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상대가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었으므로 준후는 말을 아꼈다.

그나저나 성덕은 왜 전화를 걸었을까.

단순한 안부 전화를 했을 리는 없었다.

그건 성덕을 모르는 사람이나 할 법한 발상이었다.

성덕은 치밀하고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나름 분명한 의도와 계약을 가지고 준후에게 접촉한 것이 분명했다.

“혹시 제 소식은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네 입을 통해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아니고. 메디컬 리포트에 네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더구나.

“아. 네.”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낮에 서연과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최소 이틀은 지나야 기사가 나올 줄 알았거늘 오늘 바로 헤드라인으로 때릴 줄이야.

서연이 그만큼 준후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교통사고 때문에 죽다 살아났고 응급처치도 같이 했으니까 말이다.

-인터뷰 내용은 다 좋았는데 네가 나를 은근히 저격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착각이겠지?

본론은 이거였나?

한때 자기 밑에 있던 꼬맹이 레지던트가 반박을 하니까 기분이 나빴던 건가?

개인적으로 사과라도 받고 싶은 건가?

준후는 피식 웃으며 전화를 고쳐 쥐었다.

“착각 아닙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준후는 돌직구를 때려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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