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화
제80장 아무 데도 못 가(2)
“뭐라고?”
성덕이 얼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병원장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허리가 꼿꼿하게 퍼졌다.
준후가 말만 예쁘게 한다면.
메디컬 리포트에서 건방진 말을 했던 일을 너그럽게 넘어갈 작정이었다.
신경외과 의료계는 아직 준후의 진가를 모르는 듯한데.
성덕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메이유 부스트 업 프로그램의 교육 과정은 지옥과 같았다.
그 지옥에서 수석을 차지한 준후의 실력은 어떨까.
성덕은 감히 준후가 현재 신경외과 서전 중 No.1라고 생각했다.
그 잘난 박재현.
신경외과 최초의 트리플 보드 서전인 재현도 준후의 상대가 안 될 거라고 판단했다.
왜냐고?
준후는 무려 헵타(7) 보드 서전이니까.
즉, 준후는 걸어 다니는 신경외과 그 자체였다.
아직 발휘하지 않은 엄청난 실력.
메이유라는 강력한 후광.
스타성을 가진 잘생긴 외모.
준후는 아직 남들이 긁지 않은 당첨된 복권이었다.
준후를 손에 넣는다면.
부산 신원대 병원은 다시 한번 부흥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종국 교수 덕분에.
성주 대학교 병원의 이름이 한반도에 널리 퍼졌던 것처럼(물론 이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긴 했지만).
‘대가리가 컸다는 건가?’
그런데도 성덕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은근하게 싫은 티를 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준후는 노골적으로 성덕을 밀어냈다.
자신이 한국 신경외과 부협회장에 부산 신원대학교 병원장이라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방금 들은 그대로입니다. 저는 부 협회장님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준후가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내가 네 업적을 평가절하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참고로 저 역시 부협회장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을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자세히 말해보아라.”
성덕이 다리를 꼰 채 물었다.
사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준후가 화난 포인트를 성덕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
성덕도 메디컬 리포트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때 기자가 준후에 대해 물었다. 메이유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수석으로 졸업한 준후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신경외과 펠로우 과정을 1년 만에 끝낸다는 게 가당키나 해요? 그것도 모자라서 세부 전공을 7개나 배운다니…… 어처구니없는 발상입니다.
성덕은 일부러 준후를 깎아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만 준후를 손에 넣는 일이 쉬워질 테니까.
그 자리에서 준후를 칭찬했다면.
벌써 수많은 대학병원이 준후에게 러브콜을 보냈을 것이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일단 철저하게 망가뜨려라.
그것이 성덕의 신조였다.
-제 평판을 깎아서 저를 영입하려던 것 아닙니까? 비슷한 기사를 낸 서전도 아마 부협회장님의 후배일 테고요.
“크크크크.”
대답에 앞서 성덕은 고개를 천장으로 젖힌 채 호통하게 웃었다.
아니, 이 수법을 꿰뚫어본다고?
그렇다면 준후의 정치 감각은 최소 자신과 동급이라는 소리였다.
의술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곰인 척하는 여우였단 말인가.
“뭐, 네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딱히 부정은 하지 않으마. 그래서 내가 미운가?”
-부협회장님이 저라면 부협회장님을 좋아하겠습니까?
준후가 당돌하게 되물었다.
“미워하더라도 손은 잡을 수 있지. 인생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법이란다.”
-부협회장님께서 제 마음이 확 끌릴 만한 제안을 하신다면 부산에 갈 생각도 있습니다.
“진심이냐?”
-저도 보기보다 실리주의자거든요.
준후의 대답에 성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다툼만 하다가 통화가 끝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분위기가 좋았다.
정말 준후를 영입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아니야, 너무 쉽게 믿으면 안 돼.
이래 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칠 수도 있으니까.
성덕은 머릿속에 그렸던 장밋빛 미래를 지우개로 싹 지웠다.
평점심을 되찾았다.
-그런데 당분간은 그 어디에서도 일하기 어렵겠습니다.
“왜지? 메이유에서 막 돌아왔으니 날개를 펼칠 일만 남은 것 아닌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준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시무룩해졌다.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성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 말이나 핑계가 아니라.
그 어느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치명적인 이유가 준후에게 있었다.
* * *
준후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심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 양 옆으로 상가가 펼쳐졌고 상점 간판들이 화려한 불빛을 뽐내고 있었다.
늦게 퇴근하는 직장인들.
약속이 잡힌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거렸다.
성덕과의 통화를 끊은 지도 벌써 1시간이 넘었다.
그럼에도 여운이 길게 남았다.
준후는 괜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성덕과의 통화는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사람을 장기 말로 여기는.
순수하게 이용가치만 따지는 태도가 역겨웠다.
하지만 세상은 이상한 곳이었다.
저렇게 이기적인 사람들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곳이었으니까.
네가 나를 이용하겠다고?
웃기지 마.
널 이용하는 건 나다.
준후의 입가에 냉소가 피어났다.
성덕이 구린내 나는 놈이라도 준후는 언제든지 성덕과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충분한 보상만 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단물을 쭉 빨리고 토사구팽당하는 쪽은 분명 성덕이 될 것이다.
준후는 환자와 의술밖에 모르는 의사 쪽에 가까웠지만 그들이 갖지 못한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성덕을 맞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뭐, 앞으로 3년은 뒤에 펼쳐질 일이니까 벌써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잡념을 떠도는 사이 택시가 횡단보다 앞에 멈췄다.
“수고하세요.”
택시비를 지불한 준후가 택시에서 내렸다.
웅장한 병원 건물 앞에 멈춰 서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영의 집을 떠나 준후가 도착한 곳은 제원대 병원이었다.
제원대 병원과는 준후도 제법 인연이 있었다.
스승 박재현이 근무하는 병원.
스승 박재현과 함께 몰래 수술을 해본 병원.
어머니가 뇌출혈 수술을 받은 병원 등등.
준후가 불쑥 제원대 병원을 찾은 이유.
그것은 스승의 전화가 걸려와서였다.
공교롭게 성덕과 통화를 끝낸 지 10분 만에 스승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간이 되면 병원에 와줄 수 있냐고.
준후는 흔쾌히 수락했다.
안 그래도 이번 주 중으로 약속을 잡고 뵐 생각이었다.
준후가 제원대 병원 입구를 통과했다. 본관 건물을 지나쳐 연구동 쪽으로 향했다.
스승의 연구실은 502호였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 재현이 책상 앞에서 작업하다가 준후를 알아보았다.
재현의 입가에 스치듯 지나간 미소를 준후는 놓치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준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준후에게 다가와 준후의 등을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말보다 감동적인 환영 인사였다.
“거기 앉거라.”
“네.”
스승과 제자가 소파에 마주 앉아 7년 만에 재회했다.
스승의 별명 중 ‘뱀파이어 서전’이라는 별명이 있다.
환자들의 피를 빨기 때문에 뱀파이어 서전…… 인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세월이 흘러도 스승의 외모가 좀처럼 변하지 않아서였다.
외국 배우로 따지면 톰 행크스나 키아누 리브스 같은 느낌이랄까.
오랜만에 만난 스승님은 적어도 외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목과 얼굴에 있던 주름이 조금 선명해졌을 따름이었다.
“스승님은 여전하시네요.”
“겉으로만 그래 보일 따름이야.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지.”
재현이 피식 웃으며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쓰다듬었다.
스승의 오른 손목에 흉터자국이 있었다.
“손목은 좀 괜찮으신가요?”
“굳이 네 앞에서는 쌘 척을 하고 싶지 않구나. 솔직히 안 괜찮다. 수술 들어가기 전에 항상 진통제를 먹거든.”
스승의 말에 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스승은 손목 터널 증후군으로 수술을 받았다.
신경외과 과장임에도 불구하고 평교수처럼 수술 스케줄에 시달린 탓에 손목에 무리가 갔던 것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준후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영에 이어 준후의 2번째 정신적인 지주가.
신경외과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별이 무너지는 건 아닌가 싶어서.
“수술 스케줄을 줄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을 너무 혹사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꾸나.”
재현이 화제를 피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어 보였다.
하지만 눈치 빠른 준후조차도 그 속내를 엿보기는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못했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귀국 축하한다고 말이야.”
“아. 네. 감사합니다.”
준후가 쑥스러워하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사실 스승과는 메이유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가족과 아영.
그다음으로 준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눈앞의 재현이었다.
메이유에서 보내는 7년 동안.
준후는 재현과 자주 통화하고 이메일도 교환했다.
“내가 이 밤에 왜 너를 불러냈는지 궁금하지 않니?”
“궁금합니다. 혹시 응급환자라도 생겼나요?”
준후가 기대감에 물었다.
과거 스태프로 위장해서 재현을 도와 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호출의 이유라면 환자와 관련됐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준후 너도 어지간하구나. 귀국 당일에 수술 생각을 하다니.”
“그것 말고는 따로 떠오르는 게 없어서요.”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따라오거라.”
재현이 소파에서 일어나 연구실 옆에 있는 실험실로 향했다.
준후가 재현의 뒤를 따랐다.
재현의 실험실은 간이 수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술방에서 볼 수 있는 수술기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썩션기. 전기 소작기. 내시경 도구.
기타 포셉과 니들홀더.
거즈를 비롯한 소모성 물품 등등.
이는 재현이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의사라서 지원을 받는 것들이었다.
일반 서전들이 개인 실험실을 수술방처럼 꾸미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술방을 훑는 동안.
준후의 의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환자 때문이 아니라면.
스승님은 왜 자신을 불렀을까.
새로운 연구 결과라도 보여주시려는 걸까.
재현이 멈춰선 곳은 직사각형 형태의 테이블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두 마리의 실험쥐가 배를 바닥에 깐 채 누워 있었다.
미리 마취를 해놓았는지 미동도 없었다.
테이블 옆에는 쥐와 마찬가지로 2개의 드레싱 카트가 놓여 있었다.
준후는 재현의 의도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스승님 이게 다 뭔가요?”
결국 준후가 호기심에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리렴.”
재현이 의사 가운 주머니에서 약봉투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생수병을 들고 물과 약을 함께 마셨다.
“네가 생각한 전개와 달라서 많이 당황했지?”
“네. 스승님.”
“자. 지금부터 우리가 할 건 대결이란다.”
“대결이요? 갑자기?”
놀란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야밤에 느닷없이 스승과 대결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