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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414화 (414/424)

414화

제80장 아무 데도 못 가(4)

“…….”

“…….”

연구실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대결이 끝난 후 준후와 재현이 자리를 바꿨다. 상대방이 이식한 신경을 확인하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텔레파시라도 통한 걸까.

잠시 후.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데칼코마니 같은 반응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완패구나. 변명할 여지가 없어.”

재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승리를 확신했건만 이는 제자의 성장을 얕잡아본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일단 속도 면에서 준후가 재현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타이머로 정확히 시간을 측정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준후가 재현보다 대략 10분 정도 먼저 끝낸 듯했다.

준후가 전두엽 신경을 이식한 범위로 계산을 해보면 말이다.

이렇게 속도 차이가 날 순 없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준후는 오늘 처음 이식술을 해봤고 난 무려 2년 동안 연구하고 연습도 했는데 말이야.

혹시 준후가 속도에만 신경 쓴 건 아닐까.

……라고 재현은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전까지 준후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또한 재현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준후의 신경이식술은 퀄리티 마저 예술이었다.

인공 신경과 일반 신경이 문합된 자리에 빈틈이 없었다.

매듭이 튀어나오지 않았고, 헐겁지도 않았다.

그래서 재현은 생각했다.

적어도 손재주에 있어서는 준후가 국내, 아니, 세계적으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서전이 됐음을.

여기서 경험만 좀 더 쌓는다면.

굿 서전이 아니라 그레이트 서전이 될 것임을.

재현은 준후가 자랑스러웠고.

준후가 제자로 잘 자라줘서 고마웠다.

한편 감탄에 빠진 건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스승의 나이와 손목 상태를 감안했을 때.

스승이 보여준 성취는 놀라웠다.

비록 속도는 뒤쳐졌더라도 신경 이식술의 완성도만큼은 준후에게 손톱만큼도 뒤지지 않았다.

준후는 메이유에 근무하면서 수많은 정상급 교수들에게 배움을 구했으며.

또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보았다.

스승은 단지 그들보다 명성이 떨어질 뿐 실력은 그들보다 한 수 위였다.

스승의 솜씨라면 당장 수부외과.

그러니까 미세 접합 수술을 집도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 자신감이 넘치셨구나.’

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7년 전의 준후가 스승과 맞대결을 펼쳤으면 어땠을까.

결과는 참패였을 것이다.

속도와 완성도.

두 가지 측면에서 지금의 절반 수준밖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준후가 메이유에서 보낸 7년이 결코 헛수고가 아니라는 뜻도 되었다.

“아닙니다. 저야 한참 팔팔한 나이라서 그런 걸요.”

“글쎄? 난 네 나이 때 너만큼 못했단다. 네 실력이 압도적이었던 거지.”

말을 마친 재현이 준후에게 다가왔다.

준후가 자랑스럽다는 듯.

한 손으로 준후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성장한 너를 보니 안심이다. 이제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보자꾸나.”

* * *

“난 올해 안으로 서전을 그만 둘 생각이란다.”

소파에 앉은 스승이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놀란 준후는 눈만 깜빡거렸다.

두 귀를 의심했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스승은 명실공히 트리플 보드 신경외과 서전이자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 스타 서전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은퇴를 한단 말인가.

“은퇴를 하시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준후가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방금 인공 신경 이식술에 성공하셨습니다.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신데 어째서…… 혹시 손목 건강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준후야. 숨 좀 쉬고 말하거라. 나도 숨 좀 쉬고 대답하게.”

“아. 네. 죄송합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준후가 멋쩍게 웃으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생각해 보니 말이 너무 길었고.

또 질문 여러 개가 중첩되었다.

“수술하는데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란다. 손목도 아직은 쓸 만하고.”

“그럼 어째서…….”

“쉽게 말해서 좋은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지.”

스승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 좋은 기회란 게 대체 무엇인지 준후는 궁금했다.

스승은 이미 신경외과 서전으로 정점을 찍었다. 더 좋은 기회란 게 존재할까 싶었다.

“예전부터 내가 입이 닳도록 했던 말. 기억하니?”

“의료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의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저도 스승님과 같은 생각이니까요.”

준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과 서전들의 의무감, 희생정신으로 외과계가 유지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 대학 병원에서.

그것도 본인 병원 스태프가 뇌출혈 진단을 받았는데.

자체적으로 수술을 못 해서 다른 병원으로 전원 보내는 일이 벌어졌던 곳이 바로 대한민국 신경외과 계였다.

더욱 암울한 점은 그때만 메스컴이 반짝 했을 뿐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갈수록 더 악화되고 썩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게 좋은 기회와 무슨 상관입니까?”

“이제 슬슬 정치에 입문해 보려고 한단다.”

“아…….”

준후의 입술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스승님은 서전에서 정치인으로 변신을 시도 중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의료 시스템을 바꾸려면 그 편이 가장 빨랐다.

의사가 입으로 떠들어봐야.

법이 생기거나 법이 바뀌지는 않는다.

법이 생기거나 법이 바뀔 때는 항상 이미 대형사고가 터지고 난 뒤였다.

어쩌면 스승이 변신을 하기에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인지도 몰랐다.

평판과 명성이 정점이니까.

“어디서 제안 받으신 게 있나요?”

“1년 전쯤이었을 거다. 수술 환자 중에 국회의원이 있었거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단다. 그때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지.”

“축하를 드려야 할지, 아쉽다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왕이면 축하를 해다오.”

“그럼 축하드립니다.”

“이거 어째 엎드려서 절 받는 느낌인데?”

스승의 농담에 준후가 웃었다.

“은퇴 시기는 결정하셨습니까?”

“대략 올해 말쯤 되겠구나. 내 후년에 선거가 있는데 그때 비례대표로 뽑힐 수도 있고.”

“의원 배지를 단 스승님은 어쩐지 상상이 안 됩니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스승이 테이블에 놓인 생수병을 마셨다.

스승을 바라보면서 준후는 문득 그런 걱정이 생겼다.

스승이 과연 정치계에 입문해서도 잘할 수 있을까.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

속칭 ‘환자 바보 의사’는 보통 우직하고 타협을 몰랐다. 그래서 본의 아닌 게 사방에 적을 만드는 일이 허다했다.

무림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속칭 협객은 중간 간부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사건에 휘말리거나, 본인이 사건의 중심이 되어 좌천되기 일쑤였다.

그래서일까.

스승이 청무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 날개가 물결에 젖어서 서글픈 나비꼴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스승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설마 서전 생활을 더하라고 설득하려는 건 아니겠지? 난 이미 뜻을 굳혔단다.”

“아니요. 전 스승님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그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혹시라도 정계에 입문하고 곤란한 일이 생기면 꼭 저를 찾아주세요.”

“준후 너도 정치에 관심이 있었니? 상상도 못했는걸?”

스승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눈썹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관심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쪽에 재주는 있죠.”

준후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정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이 없는 무림맹 생활이었다.

명분과 실리 싸움.

세력 다툼.

음모, 간계, 협잡질, 이간질 등등.

준후는 무림에서 무공만 배워온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정치질까지 배워왔다.

무림맹 서열 10위 안에 듣는 청룡단주 자리는 절대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준후가 남긴 유일한 오점은…….

아버지의 원수 적일도와 관련된 일에서 이성을 잃었던 것 하나뿐이었다.

“그거 하나만 약속해 주시면 저는 기꺼이 정치인이 된 스승님을 지켜보겠습니다.”

“흐음…… 네가 그렇게까지 나온다면야 들어줘야지.”

스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준후 너를 가장 먼저 찾으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도 너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단다.”

스승이 헛기침을 하고 뜸을 들였다.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걸까.

침묵이 생각보다 길었다.

“복귀 당일에 이런 말을 꺼내기는 좀 그렇지만 네 거취에 관한 문제란다.”

“괜찮습니다.”

“나는 준후 네가 신원대 병원이 아니라 제원대 병원으로 와줬으면 좋겠구나.”

스승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단 제원대에서 부교수로 1년 정도 지내봐라.

그리고 재현이 정계에 진출하면 자연스럽게 과장직을 맡아서 신경외과를 이끌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현의 제안을 받고도 준후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그래서 재현은 준후가 은근하게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역시 다니던 병원으로 복귀하는 게 좋겠지? 그쪽 스태프들은 다 아는 사람이라 편할 테니까 말이야.”

“아뇨. 사실…… 저도 스승님 제안이 더 마음에 듭니다.”

준후가 모처럼 말문을 열었다.

“제원대에 오면 스승님 곁에서 배울 것도 많을 테고 과장 승진도 빠를 테니까요.”

“근데 왜 그렇게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니?”

재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하지만 스승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응? 분명 방금 전에 내 제안이 더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았니?”

“네. 하지만 마음에 든다고 꼭 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허. 날 놀리는 게냐?”

“그럴 리가요. 제가 아무 데도 못 가는 상황이라 그렇습니다.”

준후가 씁쓸하게 웃었다.

* * *

그로부터 2달 뒤.

하늘이 유독 파란 어느 날이었다.

준후는 승용차를 끌고 경기도 파주시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외곽 지역이라서 그럴까.

이른 아침 출근 시간임에도 도로는 한산했다.

내려가는 차는 없고 서울로 올라가는 차만 간간히 보일 정도였다.

산길의 경치는 끝내줬다.

푸른 산봉우리가 물결처럼 파도쳤다.

길가 주변 풀숲에 알록달록한 봄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도심이 아니라서 공기가 훨씬 쾌청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운전 중인 준후의 얼굴과 마음은 그리 밝지 못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마음이랄까.

밟고 있는 엑셀에 힘이 안 들어갔다.

아냐, 좋게 좋게 생각하자.

이것도 환자를 보는 일의 연장선에 있으니까.

준후는 삐뚤어졌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서는.

준후의 힘이 가장 필요한 곳이.

준후의 능력을 100퍼센트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지금 향하고 있는 장소였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차가 신호에 멈췄을 때 준후가 전화를 받았다.

아영의 전화였다.

-오늘이 첫 출근이지? 기분이 어때?

“별로였다가 지금은 좋아졌어.”

-다행이네. 준후 네가 거기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정말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그동안 미뤄뒀던 일이니까.”

준후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퇴근하고 보자. 저녁에 맛있는 거 먹게.”

-정말? 그래도 돼?

“아마 우리가 제일 많이 데이트할 수 있는 시기가 이 시기일 거야. 이 때를 놓치면 안 돼.”

-알았어. 끝나는 대로 연락할게.

“응. 이따 봐.”

통화를 끊고서 준후는 운전을 계속했다.

30분 쯤 지났을까.

든든한 돌담이 한 구역을 빙 에워싸고 있었다. 돌담 위에는 가시가 달린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장소였다.

이윽고 준후가 도착한 곳은 위병소였다.

위병소는 바리케이트가 설치된 군부대의 입구였다.

준후가 위병소 앞에 차를 주차시키자 위병 근무를 서던 병사가 준후에게 다가왔다.

“단결! 누구십니까?”

준후가 차 미러를 내리며 말했다.

“오늘부터 부대에서 근무하게 된 의무 중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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