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제81장 의무중대장(3)
드르륵. 드르륵.
준후의 손이 바빴다.
손에 쥔 마우스의 스크롤이 쭉쭉 내려갔다.
마치 웹툰이라도 보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노트북 모니터에 떠오른 것은 의학 논문이었다. 그것도 한글 논문도 아니고 영어 논문이었다.
중요한 부분만 훑으며 논문을 보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속도가 실로 눈부셨다.
무림 출신으로서 준후의 안력.
그러니까 눈으로 물체를 파악하고 반응하는 능력은 발군이었다.
악당이나 사파인의 무기를 피하는 일이 독서와 일맥상통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빠른 리딩 능력.
넓은 시야각.
거기에 속독의 요령이 붙으면서 준후의 속독은 경이로운 경지에 올랐다.
마음만 먹으면 5분 안에 책 한 권도 뚝딱이었다.
“휴~”
논문 하나를 독파하고 준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눈에 힘이 없었다.
뇌사와 식물인간 환자의 치료.
오래 전부터 염원하던 목표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메이유에서 무려 7년을 수련하지 않았던가.
내심 기대를 했건만 그동안 뇌사와 식물인간 치료에 관한 의료 기술은 발전이 없었다.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국내외를 포함해서 발표된 논문이 채 50개를 넘지 않았다.
논문 내용도 치료법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했다.
뇌사 환자와 식물인간 환자의 데이터로 통계를 낸 논문이 가장 많았다.
환자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차렸다.
근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적어봤다.
……라는 논문도 적지 않았다.
‘누구한테 기댈 문제가 아닌 건가?’
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불길한 예감으로는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아니, 100년이 지나도 뇌사·식물인간 환자의 치료법은 발견되지 않을 듯 했다.
그렇다면 뇌사·식물인간 환자의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현대 의학의 한계가 아니라 운명인지도 몰랐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잘난 의술도 이미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는 것처럼.
준후가 고개를 숙여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은빛 팔찌가 조명을 반사하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성호가 세상을 떠난 후.
준후는 단 한 번도 팔찌를 제거한 적이 없었다.
‘약속했으니까 포기하지 않아.’
준후의 눈동자에 다시 의욕이 샘솟았다.
포기가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꼭 포기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뇌사·식물인간 환자의 치료법을 찾는 일에 관해서 만큼은 준후는 포기를 할 수 없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1년 동안 발생하는 뇌사 환자만 1,000명에 육박했다.
즉, 치료법을 찾으면 1,000명을 살리고 그들의 보호자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의미 있는 일에 어찌 쉽게 손을 뗄 수 있을까.
찰싹.
준후가 양손으로 가볍게 볼을 두드렸다.
관련 논문들이 하나 같이 실망스러웠지만 어쩌다 보물 같은 정보가 얻어걸릴 수 있었다.
그러면 그때 해당 정보에 내공과 무공을 응용해서 획기적인 치료법을 개발하면 좋을 것이다.
딸칵. 드르륵.
준후는 다시 논문의 세계에 빠졌다.
* * *
끼이이익!
준후가 중대장실을 나와 치료실에 들어섰다. 치료실에는 약제계 일병 정민 혼자뿐이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갔니?”
“입원실에 수액 놓으러 갔습니다.”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을 하나 꺼내 물을 마셨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중대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중대장님은 왜 신경외과 전공을 택하셨습니까?”
“내가 신경외과 전공인 건 어떻게 알았는데?”
준후가 오히려 되물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의무병들에게 본인의 전공을 말해주었던 기억은 없었다.
“아까 중대장님 이름으로 검색을 해봤습니다. 엄청 대단한 분이라서 놀랐습니다.”
“대단할 것까지야. 이 사실을 아는 건 아직 정민이 너뿐이지?”
“네. 중대장님.”
“그럼 입 다물고 있어.”
“의무병들도 알고 있어야 자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정민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포털 사이트 정보가 아니라 몸과 눈으로 경험해야 되는 거야.”
“…….”
“권위는 100퍼센트 믿을 게 못 된다는 거지.”
“오. 뭔가 멋있는 말씀입니다.”
“너 나한테 콩깍지가 쓰였구나.”
준후는 피식 웃으며 약재함으로 발길을 돌렸다.
약재함은 철재였으며 4단의 찬장과 4개의 큰 서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약재함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구비된 것들이 열악했다.
진통 해열제 계열 4종.
항염증제 3종.
근육 이완제, 소화제, 피부과 약제 등등은 1종 정도밖에 구비가 되지 않았다.
연고류 또한 3종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소모품들도 다 부족했다.
군의관이 게으른 것과 별개로 의무대 환경이 낙후된 것도 사실이었다.
제대로 된 치료를 하려고 해도 치료를 할 만한 약재나 소모품이 지극히 모자랐다.
준후는 필요한 물품들을 기억했다가 포스트잇에 적어서 정민에게 내밀었다.
“이것들을 구하고 싶은데?”
“그게…….”
물품을 훑는 정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안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치료물품은 사단 의무대에서 지급을 받는데 물건을 잘 안 줍니다. 자기네들도 쓸 게 부족하다고…….”
정말 물량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뒤로 빼돌리는 게 있는 걸까.
군대라서 그런지 설명에 썩 믿음이 가질 않았다.
“관계자가 누군데?”
“사단 의무대 약제병입니다.”
“병사 말고 간부.”
“사단 의무대장님 아닐까요?”
“그럼 그 양반을 만나야겠네. 다음 외진 때 얼굴 좀 봐야겠다.”
내공과 무공이 진료와 검사. 치료에 사기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내공과 무공만으로 환자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손가락에 찰과상이 났을 때 필요한 건 내공이 아니라 한 장의 밴드인 것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애들이 함흥차사네?”
준후가 출입구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수액을 놓고 있는 거야? 수액을 만들고 있는 거야?”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아냐. 넌 가만히 있어.”
준후가 정민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치료실을 떠나 입원실 안으로 들어갔다.
입원실은 환자의 고함으로 떠들썩했다.
“태원이 너 뭔데? 너까지 실패하자면 어쩌자는 거야?”
환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승범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태원은 붉어진 얼굴로 아무 말도 못했다.
상황을 알 만했다.
이등병이 수액을 놓다가 실패하고 바통을 이어받은 상병마저 실패한 모양이었다.
“주…… 중대장님?”
“뭐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환자 팔이 가늘고 혈관도 잘 안보여서 그만…….”
“됐으니까 나와봐.”
태원을 자리에서 쫓아내고 준후가 앉았다.
이등병과 상병에게 차례대로 당한 탓일까.
환자는 준후마저 불신의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준후가 간부라서 대놓고 말을 못하고 있을 뿐.
“고생 많았다. 팔이 아팠겠구나.”
“네. 중대장님. 팔이 찌릿찌릿한 게 벌침에 쏘인 것 같습니다.”
“괜찮아. 내가 왔으니까.”
준후는 자연스럽게 대하며 검지를 번개처럼 움직였다.
팟! 팟! 팟!
환자의 부은 팔 주변에 진통 점혈을 펼쳤다.
당연하게도 누구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준후의 손속은 감히 일반인이 쫓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 근데 갑자기 팔이 괜찮아졌습니다. 왜 그러지?”
“안 아프면 좋은 거 아니니?”
“그래도 너무 신기합니다.”
환자가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준후도 웃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태원이 말문을 열었다.
“중대장님. 제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태원은 준후의 혈관 잡는 솜씨를 믿지 않았다.
물론 다 이유가 있었다.
태원이 알기로 의사들은 짬이 찰수록 처치를 안 한다.
인턴 때는 주사도 놓고, 혈관도 잡지만 레지던트가 되면 그런 잡무를 인턴이나 간호사에게 맡기는 걸로 알았다.
그렇다면 준후의 손은 지금 끔찍할 정도로 녹슬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진짜 그것만은 피해야 해.’
태원이 남몰래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가뜩이나 의무대 평판이 바닥이거늘 중대장마저 혈관 잡는 일에 실패하면 의무대가 설 곳이 없었다.
“기회는 있다가 주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싫어도 알 게 될 거야. 자, 끝났다.”
‘오잉?’
태원은 놀라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분명 중대장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중대장은 이미 환자의 왼쪽 팔뚝에 바늘을 꼽아 넣었다.
그러니까 입으로 말을 하고.
눈으로는 태원과 아이컨택 하며.
정작 손은 따로 움직여 혈관을 잡았다는 뜻이었다.
세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게 가능한가.
심지어 인호의 팔뚝은 혈관 잡기에 최악인 혈관인데도?
뚝. 뚝. 뚝.
점적통에서 수액 방울은 잘만 떨어졌다.
환자의 팔은 붓지도 않았다. 바늘이 근육이 아니라 혈관에 제대로 들어갔다는 증거였다.
“와! 역시 중대장님이십니다! 한 번에 해주실 줄 믿고 있었습니다!”
인호가 호들갑을 넘어 오두방정을 떨었다.
“넌 열도 높은데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구나.”
“몸은 힘들어도 입은 쌩쌩합니다.”
“오늘 저녁쯤이면 괜찮아질 거야. 푹 쉬고 있어.”
“단결!”
“너희들은 뒷정리 하고 치료실로 따라와.”
준후가 먼저 치료실로 돌아갔다.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환자의 혈관이 라인을 잡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해도 의무병들의 솜씨는 기대 이하였다.
ABGA(동맥혈 채혈)도 아니고 혈관을 잡는데 환자 팔뚝을 8번 가까이 쑤셨다.
군대였길래 망정이지.
민간 병원이었으면 환자와 보호자가 길길이 날뛰며 컴플레인을 걸었을 것이다.
수액 치료는 필수 치료 중 하나였다.
병원에서 치료 중인 환자가 수액을 달지 않은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퇴원 언저리일 것이다.
그만큼 수액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혈관에 직접적으로 약물을 투여해서 빠르고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했으니까.
또한 수액 치료는 의무대에서 가능한 최상의 치료였다.
그 이상의 치료는 사단 의무대나 한국 도수 병원에서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의무병이 수액을 제대로 못 놓는다?
이건 서전이면서 수술을 못한다고 하는 것처럼 넌센스인 상황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내가 하루 종일 의무대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라도 빨리 의무병들을 혈관 박사로 만들어 놔야겠어.
준후의 결심이 굳어질 때쯤.
입원실에서 뒷정리를 마친 승범과 태원이 치료실로 복귀했다.
좀 전 사건 때문에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둘 다 감히 준후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제 자리에 서서 쭈뼛거리기 바빴다.
“너희가 가장 잘 느꼈겠지만 오늘 같은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되겠지?”
“네.”
“네. 중대장님.”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특훈이다. 아마 혈관이 잘 안 보이는 환자는 접할 기회가 없어서 요령이 안 붙었을 거야.”
“네. 맞습니다.”
태원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교보재가 되어주마.”
준후가 의무병들을 향해 팔뚝을 내밀었다.
본래 준후의 팔뚝은 잔 근육이 발달하고 혈관도 굵직했다.
간호사들이 환장하는 팔뚝이었다.
하지만 지금 준후의 팔뚝 혈관은 숨바꼭질을 한 것처럼 완전히 숨어버렸다.
내공 순환 속도를 높이며 혈관을 수축시켰던 것이다.
“누가 먼저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