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제81장 의무중대장(4)
그날 오후 중대장실.
창가에 쳐둔 커튼 사이로 노란 햇살이 쳐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5시 30분.
퇴근할 시간이 가까웠다.
군의관의 장점이 여기에 있었다.
특히 외과 전공의의 경우 병원에도서 못 해본 칼 퇴근을 하고 자기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타다다닥.
책상에 앉았던 준후가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오늘 진료를 본 환자들의 리스트였다.
환자는 총 10명.
준후를 긴장하게 만들거나 준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환자는 없었다.
환절기라서 감기 환자가 많았다.
정형외과, 그러니까 목과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그다음.
피부 질환, 복통 등을 호소하는 환자가 그다음의 순서였다.
개중에는 외진 환자도 2명 있었다.
외진이란 부대에서 치료하기 힘든 환자를 사단 의무대, 또는 한국 도수 병원으로 진료 보내는 것을 말했다.
외진은 일주일에 2번 간다고 했다.
‘이래서 나태해지는 건가?’
준후가 리스트를 살피며 한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군의관이 진료를 대충 보는 이유야 군의관의 나태한 마음가짐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둘째로는 응급한 환자가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환자에게 큰 질병이 없다 보니.
(왜냐면 군인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건강한 젊은이들이다. 위중한 질환이 있다면 애초에 군대에 징집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료가 느슨해지고.
느슨한 마음으로 진료를 하다 보니 정작 놓쳐서는 안 되는 환자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군대에서 생기는 각종 의료사고와 의료 문제에는 그런 성격도 있지 않나 싶었다.
‘나까지 그럴 수는 없지.’
준후는 가볍게 볼을 두드렸다.
원래부터 방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고자 마음먹었다.
인간은 연약했다.
망가지고.
다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죽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성호 형이 교통사고에 당해서.
뇌사에 빠질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리스트 정리를 마친 후.
문득 팔뚝이 따끔거려왔다.
준후는 양쪽 전투복 상의 소매를 훌러덩 젖혔다.
정상인 혈관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대부분 엉망진창이었다.
푸르딩딩하게 부어 있었다.
의무병들이 준후의 혈관으로 수액 놓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고생 좀 했을 거다.
준후의 팔뚝은 굵고 선명하고 도드라졌지만 내공을 운용해 혈관을 줄였다.
의무병들이 수액을 놓을 때.
혈관을 슬쩍 슬쩍 이동시키기도 했다.
-어? 어? 혈관이 미묘하게 움직이는데요? 중대장님?”
-혈관이 바늘을 튕겨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의무병들이 당황하던 당시를 떠올리면 웃음이 새어 나오는 준후였다.
의무병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일부러 수작을 부렸으니까.
의무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
그것은 수액 라인을 잡는 것과 주사를 놓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의무대는 의무대로서의 제 가치를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꿔 말해 제 가치를 다하려면.
그 어떤 환자가 오더라도 수액을 잡는데 성공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준후가 의무대에 있을 때는 괜찮지만 퇴근 후에는 의무병들이 병사들을 치료해야 하니까 말이다.
준후는 책상에 앉은 채.
청풍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들숨과 날숨이 오갔다.
자연진기가 몸 안으로 스며들면서 탁한 기운이 바깥으로 빠져 나갔다.
진기는 마나 하트와 단전.
각각 두 곳의 장소로 나뉘어서 이동했으며 정순한 기운을 머금고 기경팔맥과 세맥으로 퍼져 나갔다.
가을바람처럼 선선한 기운이.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를 훑고 지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준후가 눈을 뜨고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흡사 마약 중독자의 팔뚝처럼 형편없었던 팔뚝이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청풍심법의 자연 치료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하루 만에 혈관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하면 의심을 받을 테니.
이틀 뒤 쯤에 의무병들에게 다시 팔뚝을 제공(?)하면 될 듯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전화기.
번호를 확인한 준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아영의 전화인 줄 알았다.
퇴근 후 저녁 약속을 잡았으니까.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인물이 전화를 걸어왔다.
“네. 여보세요?”
준후가 전화를 받았다.
* * *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가 연대장실로 들어섰다.
연대장실은 중대장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평수부터가 3배 가까이 차이 났다.
손님을 맞을 수 있는 테이블과 가죽 소파가 가운데 놓였고 책장에는 각종 전술서가 꽂혀 있었다.
벽면에는 부대 지도, 작전 계획 등이 붙어 있었으며 이곳에서 회의를 위한 화이트보드도 갖추고 있었다.
“단결.”
준후는 적당한 군기를 담아 연대장에게 경례를 올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연대장이 손을 들어 준후의 경례를 받았다.
연대장의 이름은 서철순.
계급은 대령이었다.
연대장이라 함은 준후가 속한 연대를 지휘하는 최고 지휘자이자 연대 아래에 소속된 세 개의 대대를 통솔하는 간부였다.
철순은 한마디로 군인답게 생겼다.
피부는 가무잡잡했으며 이마와 얼굴에 주름이 많았다.
턱 선은 날카로운 편.
눈매는 가느다랗고 매서웠다.
나이는 50대 정도로 보였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게 새치가 꽤 보였다.
“거기 앉아.”
“네.”
준후가 맞은편 소파에 앉자 철순이 탐색하듯 준후를 위아래로 살폈다.
“군대에 늦게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꽤 젊어 보이는걸?”
“젊어 보이는 게 더 문제죠.”
준후가 편하게 대답했다.
군의관은 상급자라고 해도 말끝에 ‘다나까’를 붙일 필요가 없다고 인수인계를 받았다.
“어려 보이면 좋은 거 아닌가?”
“어려 보이면 경력도 없어 보이거든요. 지금이야 덜한데 나중에 교수 달고 외래 진료 보면 무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철순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이 첫 출근이었지?”
“네.”
“간단한 소감을 듣고 싶군.”
“소감이라기보다는 각오를 말씀드려도 될까요?”
“거창하게 각오씩이나? 어디 한 번 해봐.”
철순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부대에 있는 병사들 전원이 건강하게 전역할 수도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준후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듣고 철순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비현실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입 발린 소리를 한다고 못 마땅하게 여기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네는 군의관으로서 소명의식이 있군. 마음에 들어.”
“얼굴을 찌푸리시던데 말은 좋게 해주시네요?”
“아. 그건…….”
철순이 다시 인상을 썼다.
“요새 치통이 있나봐. 왼쪽 광대뼈 쪽이 욱신거리더군. 가끔 떨리기도 하고. 안 그래도 치과 예약을 잡아놨지.”
“그렇군요.”
준후가 애매하게 웃었다.
치과 쪽은 준후 전공이 아니었으니까.
“다행히도 자네 목표와 내 목표가 일치하는 듯해.”
“…….”
“내가 올해에 진급 심사가 있거든? 잘하면 이 지긋지긋한 무궁화를 떼어버리고 별을 달 수도 있다고.”
철순이 어깨 견장에 달린 무궁화 계급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진급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부대 내에서 사고가 없는 거지.”
철순의 설명이 이어졌다.
부대 사고란 사람에게 벌어지는 사고를 뜻하며.
중에는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죽는 일도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제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눈치가 빨라서 좋아.”
철순이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대 내 가혹행위나 따돌림 같은 건 내가 신경을 쓸 수 있는데 병사들 건강에 관한 부분은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지.”
“…….”
“그러니까 자네가 잘해줘야겠어. 그런 의미로 내가 자네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겠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다른 군의관이었으면 철순의 말을 듣고 천군만마를 얻었다면 좋아할지도 몰랐다.
연대장.
그러니까 부대 최고 지위자가 뒤를 봐주겠다며 선언을 했으니까.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준후가 환자 관리에 부실하거나 실패하는 순간.
준후를 지켜주던 칼날이 준후의 목으로 날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후는 개의치 않았다.
꼬투리를 잡고 싶어도 못 잡을 정도로 병사 관리를 잘하면 그만이었다.
준후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내공과 무공을 통해서 사단 의무대나 한국 도수 병원에 가지 않고도 각종 검사 및 치료를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봐.”
“포상 휴가증은 넉넉하게 챙겨주실 수 있습니까?”
“흐음…… 벌써부터 휴가증을 신경 쓰는 이유가 있나?”
“군국 병원에서 해결이 안 되는 질환은 사회 병원에서 해결해야 하니까요.”
군 병원의 악명은 자자했다.
주사제를 잘못 투여해서 환자가 불구가 되거나 주기도 하고, 수술이 오히려 환자를 악화시키고 등등.
그래서일까.
위중한 환자의 경우.
준후는 환자가 군병원이 아닌 사회 병원에서 치료 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드는 생각.
스승 재현은 외과 계열의 폐단을 고치고 시스템을 개혁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군 병원에도 이런 시스템적인 개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군 복무를 하는 수많은 청년이 언제까지 군 병원을 불신하고 피하고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좋아. 휴가증도 퍼줄 수 있는 데까지 퍼주지.”
“감사합니다.”
“으으으…….”
그러던 중 철순이 신음을 흘리며 왼손을 뺨에 갖다 대었다.
구겨진 얼굴을 보면 치통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만…….
준후는 철순의 얼굴을 살피다가 유통성 틱을 발견했다. 유통성 틱이란 갑자기 얼굴을 움찔거리는 증상을 말했다.
심한 치통을 앓고 있다면 얼굴을 움찔거릴 수도 있다지만 분명 꺼림칙한 구석도 있었다.
해당 증상이 신경외과 질환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철순이 치과 질환이 아니라면?
신경외과 질환을 치과 질환이라고 착각하는 거라면?
질문이 바뀌자 해석도 바뀌었다.
“연대장님. 제가 연대장님 치아를 봐도 되겠습니까?”
“자네는 치과 전공이 아니지 않나?”
철순이 피식 웃었다.
“아니어도 치아의 염증 여부와 썩은 정도는 살필 수 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데?”
“보여주시죠.”
준후가 강하게 나오자 철순이 그러라고 했다.
철순이 턱을 들고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딸칵!
준후는 가지고 있던 펜 라이트를 켜서 철순의 입안을 살펴보았다.
왼쪽 광대뼈 쪽에 틱이 있었으니 왼쪽 윗니 쪽을 세심하게 확인해 나갔다.
확실히 어금니 쪽 잇몸이 부어 있긴 했다.
철순이 괜히 치과에 가겠다고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다.
이 정도 염증으로 유통성 틱이 발생한다는 건 과한 감이 있었다.
유통성 틱이 발생하려면.
최소한 사랑니 통증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치통은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한 달 정도 됐지. 처음에는 따끔따끔하다가 요즘은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더군.”
“지병은 있으십니까?”
“고혈압만 있다네. 5년 전부터 꾸준히 먹고 있지.”
이 정도 문진으로 ‘그 질병’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진단을 하려면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준후는 걸어 다니는 CT이자 MRI이자 초음파 기계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검사가 가능했다.
“입을 다시 한번 벌려주시겠어요? 잇몸이 붓기는 했는데…….”
준후는 철순의 얼굴을 고정시키는 척하면서 오른손바닥을 철순의 관자놀이에 올렸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