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제82장 응급(1)
“미안. 갑자기 응급수술이 잡히는 바람에…… 연락이라도 했……”
“잠깐!”
“응?”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래.”
약속시간보다 3시간 뒤에 신원대학교 본관 앞에서 아영을 만난 준후가 한 말이었다.
“뭐야? 갑자기 느끼하게?”
아영이 피식 웃었다.
“너 만나기 전에 버터 좀 먹어봤지.”
준후도 웃었다.
작전 성공이었다.
아영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서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아영의 성격이라면 데이트 내내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다녔을 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준후는 아영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기도 했다.
메이유에서 보낸 7년 동안.
준후의 실력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지만 아영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다는 건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영의 지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미안한 걸로 따지면 준후는 아영과 데이트를 할 때마다 삼보 일배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피곤하지는 않아?”
“심하지는 않고 살짝. 그 내공 수액술이라는 거 효과가 참 좋더라. 그거 받고서 진짜 하루 종일 쌩쌩해졌어.”
아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준후가 무림 출신이라는 건 사실상 아영밖에 몰랐다.
처음엔 준후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지만 준후가 보여준 압도적인 활약을 생각하면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니었다.
내공 수액술 또한 준후의 신비 중 하나였다.
내공 수액술을 받으면 몸 안에서 든든한 에너지가 하루 종일 용솟음 쳤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방금 막 끝난 응급 수술을 포함해서 아영이 집도한 수술은 무려 3개였다.
평소 같았으면 쓰러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공 수액술을 받고 나서부터 수술 3개까지는 너끈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매일 해줄게. 애인에게 초능력이 있으면 초능력 덕을 보고 살아야지.”
“내공 수액술.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쓰고 있어?”
“보통은 잘 안 쓰지. 환자한테 사용하거나 아주 가까운 지인한테 가끔 쓰는 정도?”
“그렇구나. 그럼 하루에 몇 번 정도 쓸 수 있어?”
“한 번에 5명. 하루에 10명 정도?”
준후가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화경의 내공.
심장의 내공 6서클.
이 두 가지를 보유했음에도 내공 수액술을 펑펑 써댈 수는 없었다.
내공 수액술에 소모하는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내공의 회복 효과를 높이고 그 효과를 한나절 동안 지속되게 만드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다만 효과와 지속시간을 줄인다면 더 여러 번 사용할 수 있기는 했다.
터벅. 터벅.
아영과 병원을 빠져나가면서 대화가 이어졌다.
아영이 무슨 수술을 했는지.
수술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를 준후는 물었다.
아영이 아기 새처럼 지저귀었고 준후는 열심히 들어주었다.
본심을 편하게 털어놓고 이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연인 관계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준후도 아영에게 무림 출신이라는 것을 털어놓고 얼마나 속이 편했는지 모른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 이쪽에는 식당 없지 않아?”
“식당 가기 전에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서.”
“너 설마 엉큼한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영이 팔짱 낀 채 실눈을 떴다.
가는 방향이 모텔 촌이었다.
“없어, 오늘은. 그리고 엉큼한 생각 좀하면 안 되나? 우리 사이에?”
“그건 인정.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궁금해. 빨리 말해줘.”
“안 알려줌.”
준후는 끝까지 얄밉게 굴었다.
아영의 반응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
한 10분 쯤 걸었을까.
상가 빌딩들이 쭉 늘어선 지역에 진입했다. 준후가 검지로 1층의 한 가게를 가리켰다.
“저기.”
“홍삼 파는 가게?”
“손가락을 잘봐. 거기 말고 그 옆에.”
아영은 그제야 준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설마 준후가 이런 부분에도 신경을 쓸 줄이야.
솔직히 많이 의외였다.
“갑시다.”
준후가 멈춰서 아영의 등을 떠밀며 가게로 이동했다.
* * *
다음 날 오전.
준후는 의무 중대장실에서 논문을 살피고 있었다.
군 생활의 목표는 두 가지.
하나는 뇌사 및 식물인간 환자의 치료법을 연구하는 것.
다른 하나는 부대 병사들이 건강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진짜 답도 없네.’
준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제도 느낀 바지만 뇌사 및 식물인간 환자에 관한 논문은 대부분 쓸모가 없었다.
치료법을 연구한다기보다는 통계 자료 같은 것을 내는 방식이 더 많았다.
예를 들면 외상(外傷)일수록 식물인간 환자가 될 확률이 높다거나, 수술 중 일정량의 출혈이 발생하면 뇌사가 발생하더라 등등.
아니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환자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차렸다는 식이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다른 외과의들의 노력을 폄하할 건 아니었다.
뇌사와 식물인간 상태.
이는 나날이 발전하는 현대 의학과 뇌 과학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숙제였다.
치료가 간단했으면.
진작 치료법이 나왔으리라.
‘아무래도 독자적인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겠어. 맨땅에 헤딩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별 도리가 없다.’
마우스에서 손을 때는 준후의 손가락 하나가 유독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금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어제 아영과 맞춘 커플링이었다.
커플링 따위 무슨 의미가 있나.
서로를 배려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지.
……라고 준후는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근래 생각이 바뀌었다.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는 상징물이 있다는 건 예상보다 큰 위안이 되었다.
그 증거로 성호가 준후에게 준 건강 팔찌가 있었다.
건강 팔찌 덕분에.
준후는 성호를 잊지 않았다.
뇌사와 식물인간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포부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준후는 아영과도 비슷한 상징물을 간직하고 싶었다.
똑. 똑. 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들어와.”
“중대장님. 외진 준비 끝났습니다.”
“그래. 외진은 누가 나가니?”
“제가 나갑니다.”
약제계 정민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런데?”
“외진 환자가 총 11명입니다. 앰뷸런스에 다 태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정민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조수석에 후송반장이 탑승하고 정민은 앰뷸런스 뒷좌석에 탑승해야 한다.
그럼 후방에 무려 12명이 타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려면 환자를 종이처럼 구기거나, 환자의 무릎 위에 환자를 앉혀서 태우는 방법 밖에 없었다.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준후의 대답에 정민은 실망했다.
병사를 그렇게 정성껏 돌봐주시는 분이 후송에는 왜 그렇게 둔감하실까 싶었다.
닭장 속의 닭처럼.
비좁은 앰뷸런스 뒷좌석에 앉아서 이동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말이다.
하지만 정민은 준후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나도 같이 갈 거거든.”
“중대장님도 말씀입니까?”
정민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왜 내가 가면 안 되니?”
준후가 피식 웃었다.
“보통 중대장님은 남고 후송반장님이 외진을 갑니다.”
“이유는?”
“연대에 응급환자가 생길 수도 있어서입니다.”
“네가 언급하는 응급 환자 수준이면 내가 연대에 남아 있어도 의미가 없어. 바로 군 병원으로 후송해야지.”
준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응급 환자 생기면 다른 의무병한테 곧장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그럼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외진 환자 네 명은 빼서 내 차로 보내고. 그럼 앰뷸런스 뒷좌석도 널널하지?”
“네. 중대장님.”
준후의 판단에 정민은 자신의 섣불렀던 판단을 후회했다.
준후에게는 다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중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뭔데?”
“저도 중대장님 차 타고 이동하면 안 됩니까?”
정민의 부탁에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민에게 다가가 정민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농담조로 한마디 했다.
“넌 앰뷸런스에서 환자들 통솔해야지. 이 녀석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죄…… 죄송합니다.”
정민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준후는 눈치도 100단이었다.
* * *
부우우웅.
준후의 승용차가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중대장이 되어서 처음으로 나가는 외진길이었다.
외진이란 말 그대로 부대가 아닌 군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것이었다.
경증 환자는 사단 의무대에서 진료를 받고.
중증 환자는 한국 도수 병원에서 진료 받는다고 했다.
환자들을 각각 병원에 내려주고 오후 5시쯤부터 환자들을 다시 앰뷸런스나 준후의 자동차에 태워서 부대로 복귀하면 오늘 일정은 끝이었다.
준후가 외진에 동행한 데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사단 의무대에서는 치료에 필요한 약제와 소모품을 적당히 받아올 계획이었다.
약장과 수납장을 뒤져본 결과.
치료실에 없는 게 너무 많았다.
항생제 연고도 하나뿐인 탓에.
끝을 돌돌 말아서 다 쓴 치약을 짜듯 힘겹게 짜서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 도수 병원에서는 한국 도수 병원의 규모와 치료 수준을 직접 목격하고 싶었다.
한국 도수 병원은 누가 뭐래도.
군 병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각종 의료 장비를 갖춘 곳이라고 손꼽히는 곳이었으니까.
“…….”
부대를 떠나 온 지 10분 째.
자동차 안은 고요했다.
병사들은 정자세를 유지한 채 바짝 긴장해 있었다.
“왜 이렇게 얼어 있어? 네가 너희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아?”
“아닙니다!”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평범한 방법으로는 병사들의 긴장을 풀어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준후는 비장의 수법을 사용했다.
휴대폰으로 최신 음악을 재생했던 것이다.
걸그룹이 풍년이라고 하던데.
정말 그랬다.
음악 차트 상위권 음악의 70퍼센트가 걸그룹 노래였다.
“좋아하는 걸그룹 있어?”
준후가 조수석에 앉은 병사에게 물었다.
“저는 나진스 좋아합니다.”
“나진스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노래도 좋고 멤버들도 매력적입니다. 나진스는 요새 가장 뜨겁고 잘 나가는 그룹입니다.”
병사가 괜히 뿌듯해하며 말했다.
“그래? 그럼 슈퍼걸스 정도랑 비슷한 정도인가?”
“슈퍼걸스는 무슨 그룹입니까?”
“슈퍼걸스의 텔미 몰라?”
준후가 도리어 놀라며 물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으음…….”
준후가 침음성을 삼켰다.
그러고 보면 준후도 벌써 30대 후반이었다. 요즘 병사들과 세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뒷좌석에 앉은 병사 하나가 대화에 껴들었다.
“나이 터울 많은 형이 있는데 형은 예전에 슈퍼걸스 인기가 압도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나진스 인기는 비교도 안 된다고.”
“에이. 너무 나가셨다. 형님이 나진스를 몰라서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래도 추억 보정 같은데.”
조수석에 앉은 병사가 바로 반박했다.
뒷좌석에 앉은 병사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아저씨야말로 예전 인기를 너무 후려치는 거예요. 그런 식이면 나진스가 비틀즈보다 더 대단하겠네요?”
“그건 오버고. 최소한 나진스가 슈퍼걸스인가 하는 그룹보다는 한수 위라는 거죠.”
“인터넷에 텔미 쳐봐요. 그 때 인기가 어땠는지 알 테니까.”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나진스를 검색해 보시라고요.”
본의 아니게 나진스 VS 슈퍼걸스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덕분에 냉랭했던 외진길 분위기가 화끈 달아올랐다.
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뜨거워지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