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제82장 응급(2)
“허…….”
이것은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군의관이 되고 처음 방문한 사단 의무대를 바라보며 준후가 처음 꺼낸 침음이었다.
사단급에서 운영하는 의무대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웬걸?
건물은 1층이었고 현대식도 아니었다. 건물이 허름해 보였으며 벽면곳곳에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었다.
“중대장님. 실망하셨습니까?”
동행한 의무병 정민이 준후의 반응을 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 많이?”
“저는 일단 환자들 접수시키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겠습니까?”
“그러자.”
“다들 이쪽으로 와주세요.”
정민이 병사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일정에 대해서 설명했다.
원하는 과에 진료 접수를 할 것.
진료 보고 진료 내용 기억할 것.
오후 6시까지 의무대 앞 공중전화 박스 앞에 모일 것.
사단 의무대 건물로 들어가면서 준후는 정민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내공으로 청각을 키운 덕분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몹쓸 곳은 아니네.’
막사를 돌아보며 준후는 사단 의무대에 대한 아쉬운 첫 인상을 다소나마 털어냈다.
피부과.
정형외과.
소화기 내과 등등.
몇 가지 진료 과목이 있었는데 의무대 의무병을 붙잡고 물어보니 해당 과목의 군의관은 다들 전문의라고 했다.
여전히 열악하기는 했지만.
연대 입원실보다 사단 입원실의 사정이 좀 더 나았다.
입원실이 두 개였으며.
환자가 생활관 바닥이 아니라 어엿한 베드에 누워 있었다.
사단 의무대 내에서 가능한 검사가 엑스레이뿐이라는 건 여전히 부실해 보였지만.
“중대장님.”
사단 의무대 탐방이 끝날 때쯤.
정민이 준후에게 다가왔다.
“슬슬 한국 도수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단 의무대에서는 비교적 경증 환자가 진료를 보고 중증 환자가 한국 도수 병원으로 간다고 했지?”
“네. 정확하십니다.”
“가기 전에 볼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사단 의무대 약제병을 만나고 싶다.”
준후가 담담하게 말하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종이에는 의무대 운용에 필요한 소모품이 적혀 있었다.
며칠 전 파악한 바에 따르면 연대 의무대에 소모품 보유량이 형편없었다.
항생제 연고가 하나뿐이었고 수액을 놓을 때는 카테터가 없어서 무식하게 수액 세트에서 제공하는 기본 바늘을 사용했다.
붕대랑 파스도 동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기본 물품마저 없다면.
의무대가 어떻게 의무대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
이는 총 없이 전쟁터에 방치된 병사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제가 얼마 전에 청구서를 보내긴 했습니다만…….”
“저번 달에도 보냈는데 못 받았다며. 그럼 이번 달에는 줄까?”
“아닐 것 같습니다.”
“안내해.”
준후의 지시를 받은 정민이 앞장섰다.
똑. 똑. 똑.
노크를 하고 행정실로 들어가는 정민.
그 뒤를 준후가 따랐다.
사단 의무대 행정실은 꼭 소규모 중소기업의 사무실 같았다.
파티션이 없었고 책상과 컴퓨터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리에서 병사들이 무표정하게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이름이 낯익은데?’
행정실을 둘러보던 준후의 눈에 직속상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직속상관.
사단장 소장 장해인.
사단 의무대장 대위 서태풍.
준후는 서태풍을 알고 있었다.
신원대학교 의대 동창회에서 얼굴을 보고 이름도 알게 되었다.
준후보다 8기수 아래였는데 준후를 존경한다며 먼저 와서 인사를 건넸던 모습이 선명했다.
물론 그 서태풍이 이 서태풍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저 얼마 전에 연락했던 연대 약제병입니다. 기억하시죠?”
정민이 사단 약제계 병사에게 다가 물었다.
사단 약제계 병사의 이름은 손승훈이었다. 착용하고 있는 뿔테 안경이 인상적이었다.
“네. 근데 왜요?”
“저희가 청구한 물품을 오늘 받아갈 수 있을까 싶어서요.”
“있으면 드렸죠. 없어서 못 드리는 거예요.”
승훈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정민이 준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연대 의무대장이다.”
“단결!”
승훈이 뒤늦게 준후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준후가 알았다는 의미로 가볍게 손을 들었다.
“정말 연대에 소모품이 없어서 그래. 오늘은 얼마라도 꼭 챙겨가야겠다.”
“그게…… 아무리 중대장님 말씀이라도…… 들어드릴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왜? 뭐 때문에?”
“아까도 병사한테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없는 걸 드릴 수는 없어서입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안 주는 게 아니라 못 줘.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승훈의 말이 진실인지 파악하는 중이었다.
연대 의무대에 소모품을 공급하는 일도 사단 의무대의 의무 아닌가. 그렇다면 사단 의무대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게 군대 행정 특유의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소모품을 빼돌리는 더러운 커넥션과 연결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전자라면 그나마 이해하겠지만.
후자라면 용서할 수 없었다.
앞으로 이런 부조리가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병사들이 받을 테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부탁을 해도 안 된다?”
준후가 외부로 은근히 내공을 뿜어내며 말했다.
위압감을 느낀 승훈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감히 준후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승훈의 대답을 순간 준후는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이건 승훈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사단 의무대장님은 어디 있지?”
“지금 의무대장실에 계십니다.”
“잠깐 얼굴 좀 뵙자.”
“그럼 이쪽으로.”
준후는 승훈을 따라 행정실을 나왔다. 복도 끝에 있는 의무중대장실 앞에 섰다.
무림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업무를 추진하려면 일단 윗대가리를 들이받아야 했다.
사실 아랫사람은 윗사람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중대장님.”
승훈이 준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왜?”
“소모품 지급을 줄이라는 게 저희 중대장님 지시 사항이었습니다. 아마 중대장님이 말씀하셔도 안 통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다.”
“알겠습니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가 위풍당당하게 의무중대장실로 입장했다.
사단 의무중대장실은 확실히 연대 의무중대장실과 달랐다.
진짜 집무실 느낌이 났다.
집무실 평수가 3배 가까이 차이가 났으며 소파나 테이블, 책장 같은 가구들이 제법 눈에 띠었다.
“…….”
“…….”
준후와 의무중대장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순간 집무실에 흐르는 정적.
준후는 예감했다.
연대에 소모품을 가지고 돌아갈 확률이 100퍼센트라는 것을.
* * *
“와…… 이게 되네.”
정민은 감탄하며 혼잣말을 했다.
사단 의무대 막사 바깥으로 나오는 정민의 양손에 비닐 봉투가 들려 있었다.
비닐 봉투에는 소모품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비닐 봉투가 드래X볼 마이 부의 뱃살처럼 볼록했다.
“서정민 일병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앰뷸런스 운전병 찬영이 허겁지겁 정민에게 달려왔다.
소모품이 담긴 봉투 하나를 냉큼 낚아채서 들었다.
“소모품은 못 받을 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도 그럴 줄 알았지. 근데 중대장님이 해결했어.”
“아무리 중대장님이라도 사단에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그게 되더라.”
“어떻게 말입니까?”
“사단 의무중대장님이 우리 의무중대장님 까마득한 후배래.”
정민이 혀를 차며 말했다.
집무실 바깥에서 들은 내용 중 그것만 기억이 났다.
사단 의무중대장의 목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준후 선배님? 지금 군의관이십니까? 와. 대박! 여기서 뵐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뒷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이후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을지 파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 증거가 바로 두둑하게 챙겨온 소모품이었고.
“근데 사단 의무대 녀석들. 생각해보면 괘씸합니다. 결과적으로 소모품이 있는데 안 준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정민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자기네들만 잘 살자고 숨겨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치사한 녀석들.”
“어쨌거나 중대장님이 있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소모품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까.”
정민은 손에 들린 봉투를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소모품만이 아니라 가뜩이나 숫자가 모자랐던 진통제와 해열제, 근육 이완제도 잔뜩 챙겨왔다.
약제계로서 이보다 더 흐뭇할 수가 없었다.
“역시 군대는 윗사람을 잘 만나야 돼. 안 그래?”
* * *
그날 오전 11시.
준후는 혼자서 한국 도수 병원 1층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병사들은 진료를 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고.
의무병과 운전병, 후송 반장은 가까운 PC방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준후는 한국 도수 병원에 온 게 처음이라 규모를 알아보고 싶었다.
한국 도수 병원은 확실히 사단 의무대와 차원이 달랐다.
최고의 군 병원답게 웬만한 대학 병원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건물도 최신식이었고 1층에 매점과 식당가가 있었으며, 대학병원에 있는 진료과는 다 갖추고 있었다.
검사 역시 CT, MR,I 초음파 등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전국에 있는 아픈 병사와 간부들이 모이는 곳인 만큼 이곳을 찾는 군인들도 많았다.
국방색 얼룩무늬가 병원 온 천지에 가득했다.
한국 도수 병원을 둘러보는 동안.
준후의 가슴 속에서 다시 한번 집도에 대한 열망이 들끓었다.
상상 훈련이 실전과 거의 흡사했지만, 실전과 똑같지는 않았다.
상상 훈련이 준후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반면.
실전은 준후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돌발 상황.
위기 대처 능력.
스태프 간의 갈등 같은 요소들은 상상 훈련으로 채우기 힘들었다.
‘어디에 집도 좀 맡겨달라고 조를 수는 없나?’
준후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잘하면 자신의 진심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빅 5병원에서조차 응급수술이 가능한 신경외과 서전이 없어서 비극이 터졌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 도수 병원의 처지는 더 처참하지 않을까.
적당한 누군가를 찾아서 이야기를 잘 해보면 여기서 수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준후는 1층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다가오는 두 명의 사내를 발견했다.
한 명은 나이 지긋한 원 스타였고 곁에는 대령급 간부였다.
두 사람이 맞은편에서 준후 쪽으로 다가왔다.
준후가 주목한 쪽은 원 스타 쪽이었다.
계급장에 달린 원 스타 준장의 이름은 임철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왼쪽 입꼬리가 경직되어 움직이지를 않았다. 걸음걸이도 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기 실례합니다.”
준후가 일부러 두 사람의 앞길을 막았다.
두 사람이 넌 뭐냐는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연대 의무 중대장님입니다. 임철우 준장님, 지금 저랑 같이 응급실에 가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