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제82장 응급(3)
시간을 거슬러 30분 전.
육군 본부 작전정보부 차장 서기열은 병원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직속 후임인 신해석이 앉아 있었다.
카페는 병사와 장교, 면회를 온 보호자들로 시장 통처럼 북적거리고 시끌시끌했다.
카페 특유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테이블에 놓인 커피가 없었다면 마치 고깃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요새 컨디션이 말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
해석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따로 관리라도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줄 서는 문제에 관리할 게 뭐가 있겠어. 적어도 한 달 안에는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기열이 얼굴을 찌푸리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가 소주보다 썼다.
기열은 요즘 인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을 해야 할 타이밍인데 누구의 동아줄을 잡아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용한 무당이라도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요즘 부쩍 얼굴이 푸석푸석해 보이십니다. 입술에 물집도 잡히지 않습니까?”
“자네가 보기에도 내 몰골이 영 아닌가?”
“네.”
해석이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기열이 피식 웃었다.
“건강 검진 받으신 지는 얼마나 지났습니까?”
“작년 봄일걸? 슬슬 받을 때도 됐지.”
“고혈압에 당뇨도 있으신데 빨리 받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잔소리가 수준급이군. 자네가 내 마누라라도 되는 것 같아.”
“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모님보다 제 얼굴을 더 자주, 많이 보지 않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라서 기열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건강을 걱정해 주는 해석이 고맙기도 했다.
“사실 건강 검진 예약을 해놓긴 했어. 빅5 병원 중 한 곳으로 말이야. 근데 3달 뒤에나 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
“그럼 도수 병원에서 받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도수 병원 검진은 훨씬 빠를 텐데요?”
“싫어. 군 병원은.”
서기열은 군 병원에 커다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딱히 군 병원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나랏돈으로 운영하는 병원 VS 민간 자본으로 운영하는 병원.
둘 중 누가 더 환자에게 더 신경을 쓸까.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의 압승이었다.
“볼 일도 다 봤으니 슬슬 일어나지.”
기열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군 사관학교 3기수 후배가 도수 병원에 입원을 해서 잠깐 문병을 온 것이니 더 이상 여기 머물 이유는 없었다.
“으으…….”
그런데 기열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 했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구역질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됐어. 신경 쓰지마.”
“도수 병원 온 김에 진료라도 받으시죠.”
“스트레스로 진료 받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어? 정말 괜찮아.”
기열이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어지러운 기운을 몰아내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걷는 도중 이상하게 한쪽 다리가 뻣뻣하게 느껴졌다. 왼쪽 입꼬리는 마비된 듯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기 실례합니다.”
젊은 대령이 기열의 앞길을 막았다.
기열과 해석이 넌 뭐냐는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연대 의무 중대장님입니다. 임철우 준장님, 지금 저랑 같이 응급실에 가보시죠.”
“자네 나를 아나?”
기열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대령이 걸친 전투복 상의에 서준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니요. 모릅니다.”
“모르는 사람을 보고 다짜고짜 응급실에 가자고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준장님은 모르지만 준장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죠. 제 말을 무시하면 후회할 겁니다.”
“군의관이 아무리 계급 개념이 없어도 그렇지. 준장님 앞에서 헛소리나 픽픽 해대고 말이야.”
해석이 준후에게 거칠게 삿대질을 했다.
“이봐, 자네. 원 스타가 우습게 보여?”
“지금부터 간단한 테스트를 할 겁니다.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곱게 보내드리죠.”
“뭐? 테스트?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해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해석은 당장이라도 준후를 칠 것처럼 준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준후는 손톱만큼도 주눅 들지 않았다.
담담하게 자기 할 말만 했다.
“준장님. 웃어 보시죠.”
“하…… 이 새끼 넌 진짜 말로 해서 안 되겠구나. 너희 연대장 이름 좀 대봐. 차장님, 제가 이 녀석을…….”
그러나 해석이 기열을 돌아보고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놀란 나머지 바보처럼 입도 벌렸다.
기열의 오른쪽 입가가 올라간 반면 왼쪽 입가는 축 내려가 있었다.
입꼬리의 대칭이 삐뚤어지면서 기괴한 미소가 피어났다.
꼭 영화에 나오는 악당 같았다.
그동안 해석이 기열의 오른쪽에서 걷느라 삐뚤어진 왼쪽 입가를 제대로 못 봤기 때문이다.
“차…… 차장님?”
“왜? 내가 웃는 게 많이 이상해?”
“심각할 정도로…… 이상합니다.”
“왼쪽 얼굴에 살짝 마비가 온 것 같기는 한데…….”
기열도 곧 말문을 잊어버렸다.
휴대폰 액정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래도 제가 헛소리 하는 것 같습니까?”
잠자코 있던 준후가 기열의 등 뒤로 돌아갔다.
“넘어지면 제가 잡아줄 테니까 까치발로 걸어보세요.”
주도권이 준후에게 완전히 넘어갔기 때문일까.
기열은 순순히 준후의 지시를 따랐다.
불 같이 역정을 내던 해석도 잠잠해졌다.
“어…… 이런!”
기열이 몇 걸음 못 걷고 취객처럼 휘청거렸다.
준후가 자신의 양팔을 기열의 겨드랑이 사이에 넣어서 부축해 준 덕분에 넘어지는 것은 간신히 면했다.
“이래도 그냥 가실 겁니까?”
* * *
한국 도수 병원 응급실.
준후는 대기실에 앉아 있었고 준후 곁에는 해석이 앉아 있었다.
기열은 MRI 촬영을 위해 검사실로 이동해서 자리에 없었다.
“차장님이 위독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해석이 준후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뇌경색에 전형적인 증상이 있습니다. 안면 마비와 몸의 균형을 제대로 못 잡는 증상이죠.”
“혹시 전공이 어떻게 돼요?”
“신경외과입니다.”
“아…….”
해석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두 사람을 묶어줄 공통분모는 딱 거기까지였기에.
준후는 벤치에 등을 기댄 채 맞은 편 벽을 응시했다.
기열의 문제점을 발견한 데는 무림에서의 버릇이 크게 도움이 됐다.
무림에서 준후는 관찰력을 키워왔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적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됐다.
첫눈에 보자마자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 파악을 하고, 상대의 눈동자와 발을 먼저 읽고 등등.
준후의 관찰력은 넓었다.
게다가 나무를 보되 숲도 잊지 않았다.
한 번은 사람 많은 광장에서 자객에게 기습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점에는 이미 화경의 경지를 달성했기에 별 탈 없이 자객을 반격하고 현장에서 목숨을 빼앗았지만.
그런 경험들이 축적된 덕분일까.
아까 병원 로비를 걸어 다닐 때.
준후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빠르게 훑으며 특징들을 잡아냈다.
그 와중에 걸린 게 기열이었다.
한쪽 입꼬리가 부자연스럽고 한쪽 다리를 살짝 저는 게 뇌졸중의 전조증상이었기 때문이다.
‘뭐 별일은 없겠지.’
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그러니까 도수 병원 신경외과 의사가 진료를 보기 직전.
준후는 은근슬쩍 기열의 머리에 손을 얹어 내공 두개 조영술을 펼쳐봤다.
기열의 MCA(middle cerebral artery, 중대뇌동맥)에 60퍼센트 협착이 있었다.
방치됐다면 뇌경색으로 초 응급 상황이 펼쳐졌겠지만 준후가 제때 발견한 덕분에 대참사는 면할 수 있을 듯 했다.
기열의 증상이 워낙 뚜렷해서.
도수 병원 신경외과 의사와 피곤하게 말다툼을 할 필요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MRI를 찍어야 하네 마네 하고 입씨름을 벌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보호자분 이쪽으로 오세요.”
간호사가 대기실로 다가와 말했다.
준후와 해석이 간호사의 뒤를 따랐다.
응급실 좌측면에 위치한 침대 위에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기열이 누워 있었다.
그 곁에는 수도 병원 신경외과의 민석이 서 있었다.
“MRI 촬영 결과 뇌동맥에 협착, 그러니까 좁아진 게 발견됐습니다.”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나요?”
해석이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 정도면 ‘혈전 용해제’라는 약물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수준입니다.”
“…….”
“단, 하루 정도는 응급실에 입원을 하셔야겠지요.”
설명을 마친 민석이 준후의 눈치를 봤다.
꼭 ‘내 말 맞지?’하고 확인을 받으려는 것처럼.
준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석은 준후를 알고 있었다.
아니, 신경외과 서전이 준후를 모른다면 간첩으로 의심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세계 최고라고 손꼽히는 메이유 클리닉에서, 그것도 7년 만에 신경외과와 관련된 세부 전공 7개를 모조리 숙달했으며.
그 와중에 압도적인 실력을 인정받아 그랜드 마스터 칭호까지 받은 준후였다.
현 시점에서 외적인 성취를 기준으로 했을 때.
준후는 전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서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술을 안 받아도 된다니 다행이군요.”
“휴. 한시름 덜었습니다. 차장님.”
기열과 해석이 한마디씩 했다.
“근데 뇌졸중은 왜 생기는 겁니까?”
“환자분의 경우 고혈압과 당뇨가 원인이라고 봐야겠죠. 스트레스도 뇌졸중을 악화시키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민석이 또 준후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단 용해제 투여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는 제가 아니라 준후 선생님께 하셔야죠. 발견이 늦었으면 큰 일 났을 겁니다.”
“고마워요. 군의관. 오늘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별말씀을요.”
준후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준후 입장에서는 그다지 대단한 활약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눈썰미로 환자를 일찍 찾아냈을 뿐.
준후가 됐다고 하는데도 기열은 자꾸 막무가내로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준후는 못 이기는 척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군대 인맥도 의사 인맥 못지않았다.
언제 어떻게 도움을 받을지 모를 일이었다.
* * *
“선생님.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상황이 끝나자 민석이 준후를 불렀다.
준후가 민석을 따라 응급실 바깥으로 따라 나갔다.
“제가 사실 선생님 팬입니다. 사인하고 사진 좀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네. 그러세요.”
졸지에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다.
준후는 민석이 내민 종이에 사인을 하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도수 병원 신경외과는 어떻게 운영되나요?”
준후가 궁금했던 것 중 하나를 물었다.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일단 신경외과 의사는 저를 포함해서 여섯 분 정도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신원대 병원 신경외과 서전은 레지던트를 제외해도 10명이 넘었다.
보나마나 레지던트 숫자도 열악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여섯 명뿐인데 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나요?”
준후가 혀를 차며 물었다.
“힘들긴 하지만 의외로 괜찮습니다. 군 병원이라 이미지가 안 좋은 탓에 수술 받으려고 하는 간부나 병사들이 많지 않거든요.”
민석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례지만 민석 씨 경력은 어떻게 되나요?”
“전문의 자격증 따고 바로 수도 병원으로 왔죠. 제가 제일 막내입니다.”
“그렇군요.”
준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사실 제일 궁금했던 건 따로 있는데요.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