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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423화 (423/424)

423화

제82장 응급(4)

그날 저녁, 당직실.

민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하얀 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화끈한 라면 스프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라면이 익는 동안.

민석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자신의 우상과 같았던 준후를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사인도 받았다.

준후와 찍은 사진은 벌써 메신저 프로필로 설정되어 있었다.

‘실물이 훨씬 동안이시던데. 얼굴만 보면 나랑 동갑인 줄 알겠어.’

민석이 준후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국내에서 명의라고 불리는 서전들은 보통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마주한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준후에게서는 그런 분위기가 먼지 한 톨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특이한 케이스였다.

준후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민석은 의외로 준후가 불쌍(?)했다.

왜냐고?

준후가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준후는 메이유에서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마쳤다.

신경외과의 세부 전공 7분야를 마스터 하는 경이로운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썩고 있었다.

연대 의무중대에서는 수술을 할 수 없으니까.

준후 선생님이 집도하는 걸 직접 보거나 어시스트할 수 있다면 더 영광일 텐데…….

민석이 젓가락으로 라면을 뒤적거리던 바로 그때.

따르르릉~

당직실 전화기가 귀찮게 울려댔다.

“신경외과입니다.”

전화를 받는 민석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곧.

“네, 네.”

-…….

“네?”

당구공 크기로 커지는 눈동자.

쩍 벌어지는 입술.

수화기를 붙들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금 내려갈게요.”

수화기와 젓가락을 내팽개치고 민석은 전속력으로 응급실을 향해 달렸다.

의사 가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헉헉거리며 도착한 응급실.

민석은 한 침상 앞에 서서 당황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4시간 전만해도 멀쩡했던 환자가 다 죽어가고 있었다.

사지가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옅은 신음만 반복해서 토해낼 뿐이었다.

환자의 이름은 서기열.

허혈성 뇌졸중으로 입원해서 혈전 용해제를 투여 받고 있었던 환자였다.

“저희 차장님 상태가 왜 점점 나빠지는 거죠? 치료 중인 거 아니었습니까?”

보호자로 곁에 있던 간부 해석이 따지듯 물었다.

민석을 향한 눈빛도 매서웠다.

민석은 하마터면 ‘나도 몰라요’라고 솔직하게 대답할 뻔했다.

분명 치료는 제때 이루어졌다.

치료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준후조차 민석의 치료법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일이 터졌단 말인가.

“저기요, 선생님. 아직 답변을 못 들었는데요?”

“그게…… 특이한 케이스라서 확인이 필요합니다. 정 선생님. 이 환자분 바이탈 좀 체크해 주세요.”

“네. 갑니다.”

민석이 근처에 있던 정 간호사를 호출했다.

정 간호사가 환자의 바이탈을 확인하고 알려주었다.

체온은 37도.

혈압이 160mmHg/120mmHg

맥박은 분당 130회.

호흡은 분당 9회.

체온은 정상이었지만 혈압과 맥박이 살짝 높은 편이었고, 반대로 호흡수는 조금 적었다.

환자가 고혈압·당뇨 환자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정상으로 보기 힘든 수치였다.

‘하필이면…….’

민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계급으로 환자를 차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계급이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환자는 원 스타 차장이었다.

만약 대참사가 터진다면 민석은 큰 곤혹을 치르게 될 것이다.

“선생님. 저희 차장님이 왜 나빠지는 거냐고요! 제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해석이 다시 한번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이번에도 대답을 안 하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자세한 이유는…… 추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일단 Brain CT부터 추가 촬영하겠습니다.”

“하아…… 수술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죠?”

“수술 여부는 검사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낮에는 수술 안 받아도 된다면서요.”

“그때하고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민석이 환자에게 성큼 다가갔다.

가볍게 환자의 어깨를 흔들었다.

“누구…….”

“제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아보겠어요?”

“의사?”

“여긴 어디죠?”

“병원.”

환자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환자에게 아직 의식이 있었다.

“잠시만요. 환자분 이동하겠습니다.”

호출을 받고 온 병동 보호사가 환자의 침상을 이끌고 응급실을 떠났다.

민석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한국 도수 병원에 뇌 파트 전공 교수는 단 2명뿐이었다.

한 명은 오후 5시에 수술에 들어갔고, 다른 한 명은 세미나 참석차 자리를 비웠다.

민석은 자리를 떠나 두 번째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답답한 수신음이 이어지다가 사서함을 남기라는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순간 팔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환자가 왜 악화됐는지도 모르겠고 환자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한 기분이었다.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왜 내가 당직일 때 이런 감당하기 힘든 일이 터진단 말인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당직을 바꿔 달라던 선배가 얄미웠다.

마지막으로 그 부탁을 받아준 자신이 바보 같았다.

힘없이 떨어져 있던 민석의 고개가 다시 빳빳하게 치솟았다.

아직 동아줄이 하나 남아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동아줄이.

* * *

한국 도수 병원 주차장.

승용차에서 군복을 입은 사내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를 따라 4명의 병사가 내렸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돌아와서. 급한 환자가 생겨서 어쩔 수가 없었어.”

사내가 말을 이었다.

“너희끼리 저녁 사 먹고 병원 근처에 있는 PC방에 가 있어. 볼일이 끝나는 대로 그쪽으로 갈 테니까.”

사내, 준후가 한 병사에게 카드를 쥐어주며 말했다.

착각인지 몰라도 병사들은 지금 이 상황을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병사들과 헤어진 후 준후는 허겁지겁 응급실로 달려갔다.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한국 도수 병원 외래 진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민석의 전화였다.

민석은 준후가 찾아냈던 허혈성 뇌경색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했다.

그 길로 준후는 곧장 핸들을 돌렸다.

번개처럼 도수 병원으로 복귀했다.

심각해질 상황이 눈에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병원도 당직 스케줄이 꼬이면 응급 환자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판국이다.

그보다 못한 도수 병원의 사정이야 말해봤자 입만 아팠다.

“어떻게 된 겁니까?”

준후가 환자의 침상 앞에 서서 물었다.

보호자 해석과 민석이 동시에 준후를 쳐다보았다.

환자는 잠이 오는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잠깐 나와서 이야기 하시죠.”

민석이 침상과 떨어진 복도에 자리를 잡았다.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몇 시간 만에 다시 본 얼굴이 수척해보였다.

“일단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쉽지 않은 결단이셨을 텐데.”

“제가 번거로운 건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환자 상태부터 노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민석의 노티가 시작되었는데.

민석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치료 시기도, 치료 방법도 문제가 없었는데 왜 환자가 악화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 실수라도 한 겁니까?”

“아뇨. 황 선생님이 잘못한 건 없습니다.”

“그럼 왜…….”

“쉽게 말하면 재수가 없었다고 봐야죠.”

“재수요?”

준후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가 구성한 이번 참사는 다음과 같았다.

혈전 용해제가 혈전을 녹인다.

그 와중에 다 녹지 않은 혈전이 얇은 혈관벽을 찢는다.

또는 혈관이 넓어지면서 빨라진 혈류의 흐름이 혈관벽을 손상시킨다.

이로 인해 뇌출혈이 발생한다.

둘 다 극히 희박한 케이스였다.

준후의 한국과 미국에서의 수련 기간을 통틀어서 단 2번 밖에 일어나지 않은 케이스였다.

속담으로 비유하면…….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지는 케이스였다.

“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어요?”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환자의 MCA(middle cerebral artery, 중대뇌동맥)에서 PCA(posterior cerebral artery, 후대뇌동맥)로 가는 통로에 출혈이 발생했습니다. 수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영상 보면서 이야기 하죠.”

“네. 선생님.”

준후는 민석을 따라 스테이션으로 이동했다.

민석이 띄운 환자의 브레인 CT를 관찰하며 턱을 쓸어내렸다.

혈관 분지에 출혈이 일어났다면, 출혈과 혈종이 자연 흡수되기를 기다려도 좋았다.

하지만 하늘이 매정하게도 출혈 부위와 출혈량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 당장 조치가 필요했다.

“집도할 사람은 있습니까?”

“그게…….”

민석이 말끝을 흐리며 뒷목을 긁적거렸다.

생략된 부분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황 선생님은 집도 못 해요?”

“혼자 감당하기에는 자신도 없고. 제가 수술에 들어가면 응급 환자를 볼 사람이 없어서요.”

“응급 환자 진료는 레지던트에게 맡겨도 되잖아요.”

“어…… 솔직히 그냥 제가 자신이 없습니다.”

민석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준후는 민석을 꾸짖지 않았다.

면허증을 따고 이제 막 신경외과 전문의가 된 민석 아닌가.

충분히 집도가 부담스럽고 두려울 만했다.

비유가 부적절할 수도 있지만…….

이제 막 운전면허를 땄는데, 부산 도로에서 초행 운전을 하라고 하면 얼마나 식겁할까.

“그럼 제가 집도해도 되나요?”

“솔직히 저희 입장이야 대환영인데…… 절차상으로는 용납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상식이긴 하죠.”

준후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A 대학병원 서전이 B 대학 병원으로 이동해서 환자를 집도하는 케이스는 없었다.

왜냐면…….

환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결국 책임은 환자가 입원한 B 병원에서 지기 때문이다.

실력이 모자라서 다른 병원 의사를 데리고 왔다며 B병원의 평판에 금이 갈 수도 있었고 말이다.

보통 이런 경우 환자를 전원 보낸다.

“그럼 빨리 후송수단을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바람이 세서 헬기가 못 뜬답니다. 그럼 앰뷸런스로 이동해야 하는데 서울까지 가려면 최소 2시간은 걸릴 거예요. 출퇴근 시간이니까요.”

“…….”

“그 시간이면 환자는 영구적인 신경 손상을 입을지도 몰라요.”

민석이 말을 마치고 입술을 깨물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못 하고.

그렇다고 이송도 못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하긴 오죽하면 초면인 준후를 다 호출했을까.

결단을 못 내리는 사이에도 황금 같은 시간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고 있었다.

이젠 정말 결단이 필요했다.

준후는 환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수 병원 병원장님 전공과목이 어떻게 되나요?”

“신경과입니다.”

“연락처는 아세요?”

“네. 저희 의대 동문 선배님이셔서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의료계는 인맥이 좁긴 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세요?”

“전화 좀 걸어주세요. 이 기회에 단판을 지어야겠습니다.”

“단판이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아시잖아요?”

준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환자, 제가 집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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