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화 (1/357)

#1.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삼류무사>

구름을 뚫고 치솟은 산맥 사이로, 깎아지듯 날카로운 절벽의 끝, 왜소한 남자가 구부정하게 앉아있었다.

남자는 말 없이 흘러가는 흰 구름을 아련하게 보고 있었다.

“……응?”

그러다 남자의 눈썹이 치켜떠지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허공을 맴돌았다.

“용소아……. 아니, 이제는 태청신검이라 불러야 하나. 고귀한 분께서 여기까지 오셨군?”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티 없이 맑은 순백색 무복의 사내가 표횰한 신법으로 남자 앞에 나타났다.

툭.

태청신검이라 불린 사내는 위엄 넘치는 외모만큼이나 굵직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소정대 대주 진소운이 맞는가?”

“대주, 대주라…….”

진소운이라 불린 남자는 여전히 구름을 보며 물었다.

“······소정대 인원들은 모두 죽었나?”

“······.”

“그럼 내가 대주가 맞겠군. 아니라면 대주가 아니고.”

"……진소운이 맞는지 물었다."

"알면서 찾아왔을 텐데 뭘 굳이 묻지?"

진소운의 말에 태청신검이 검을 꺼내어 들었다.

“돌려받아야 할 것이 있어서 왔다.”

“…….”

고개를 들어 태청신검을 본 진소운은, 다시금 시선을 눈앞에 떠다니는 구름으로 옮겼다.

명백한 살의가 보임에도 진소운의 목소리는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소실된 무림맹의 기록은 모두 되살려 주지 않았나.”

“그대가 가지고 있어선 안 될 기록들이 많다.”

“내가 복원해 준 것은 대부분 쓸모없는 기록과 자료들일 텐데?”

“그대가 심현각의 자료들을 기억하고 있음을 안다.”

“…….”

심현각.

무림맹의 최고 등급 기밀이 모두 모여 있는 자료실.

무림맹주를 비롯해, 총군사와 지정된 몇몇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무림맹의 최심처.

현 무림맹의 맹주인 태청신검을 이곳까지 움직이게 한 동력이었다.

진소운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병할 것들, 그렇게 보지 않겠다고 했건만. 내 이리 끝장날 줄 알았지.”

“…….”

“그래…… 삼류무사 하나 죽이겠다고 북해에서 이곳까지 온 건가? 마교놈들의 눈을 피해?”

“강호의 정의를 위해서, 무엇보다 확실하게 처결해야 할 일이기에.”

진소운은 끌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소정대 놈들은 어찌 되었지?”

“모른다.”

“후훗. 하긴 그렇겠지. 애초부터 우리 같은 쭉정이들은 그대들에게 도구에 불과했을 테니.”

“모두 대의를 위한…….”

빌어먹을 대의.

우리를 사지(死地)로 내몬, 그 허울뿐인 대의.

진소운의 음성엔 한껏 비아냥이 감돌았다.

“그 잘난 대의로 북해에서는 번영창성 하셨는가?”

태청신검의 검 끝이 파르르 떨렸다.

강호의 주인이 바뀌고, 무림맹은 멸망했다.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은 북해까지 도망쳐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쿨럭.

왜소한 소운의 몸이 들썩거리며 태청신검 쪽으로 쏠리자, 태청신검이 살짝 몸을 비켜섰다.

티 하나 없는 순백의 무복 자락도 함께 물러났다.

진소운은 그런 태청신검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 결국 실패했겠지.”

“무림맹은 다시 무림의 기지를 세울 것이다.”

“내가 비록 무림맹의 소속이긴 했지만, 부디 그런 끔찍한 세상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마교에 물들었군.”

그렇게 태청신검이 일검에 목을 베어 넘기려 하는 순간.

우뚝!

마치 등 뒤에서 귀신의 기척이라도 느낀 듯, 부르르 몸을 떤 태청신검이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나타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어찌 저자가!”

태청신검은 다시 진소운을 노려보았다.

“벌써 마교와 내통했던 것이더냐?”

진소운은 여전히 느긋하게 고개를 돌려 한 점을 바라봤다.

“글쎄 나 따위가 뭐라고 저런 거물까지 움직이겠는가? 우연이겠지.”

“…….”

“어쨌든 계속 있을 참인가?”

진소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청신검이 바닥을 박차고 사라졌다.

하지만 완전히 떠나진 않은 채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봉우리 위에 자리했다.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이번엔 흑색 무복의 사내가 천천히 진소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진소운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흑사자 곽궁.”

진소운의 부름에 곽궁이라 불린 사내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분명 돌아서 있었건만.

“어떻게 알았지?”

"오늘은 이상하게 손님이 많군. 날도 이렇게 좋은데 말이야."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다."

“마교 소교주의 독문 보법인 혈사무보에는, 세 번째 딛는 발을 비틀어 팔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묘리가 숨어있지.”

곽궁은 기함을 터트렸다.

“허,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

“우리 소정대가 천마흑검대를 막는 고기 방패로 선 적이 있었지. 기억나나?”

“후훗, 글쎄. 그 시절 무림맹의 모두가 우리에겐 고기 방패에 불과했으니. 어쨌든 세상 모든 것을 기억한다더니 놀랍군.”

“무인에겐 쓸모없는 재능이지.”

곽궁의 시선이, 봉우리 위에 오연히 서서 이편을 바라보는 태청신검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무림맹이 그대를 구하러 온 것인가? 북해에서 이곳까지?”

곽궁의 물음에 진소운은 고개를 저었다.

“내게서 받아 가야 할 것이 있다고 하더군.”

“?”

어딜 봐도 은전 한 냥 가지고 있지 않을 것 같은 몰골.

“그것이 무엇이지?”

“이 보잘것없는 머리.”

곽궁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알만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 머리에 무림맹의 모든 것을 담고 있어서 소정대가 그대를 끝까지 살리려 했다 들었는데?”

“그건 아니야······ 내가 가장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더군.”

진소운은 ‘바보 같은 놈들’이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눈물 나는 전우애군.”

곽궁의 말에 진소운의 눈에 불이 켜졌다.

“마인 따위가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놈들이 아니야.”

“재밌군.”

진소운이 살기를 흩뿌렸음에도 곽궁은 반응하지 않았다. 되려 더 해볼 수 있다면 더 해보라는 듯.

하지만 이내 진소운도 기운이 빠진 것인지 살기를 거두었다.

“……그대도 태청신검과 같은 것을 바라는가? 태청신검이 보고 있는 지금이라면 무림맹의 모든 것을 줄 수도 있는데.”

“지금의 신교에게 그따위 정보에 무슨 가치가 있지?”

“……그건 그렇군. 그럼 굳이 이곳까진 무슨 일이지?”

“우리 신교의 가장 끈질긴 적인 소정대의 대주를 잡으러 왔지.”

진소운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담담한 진소운의 태도에 곽궁은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두렵지 않은가?”

“……생(生)이 지옥인 이가 사(死)를 두려워하겠는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다면서 생이 결국 지옥이었다고?”

“그대는 유능하지 않은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삶을 상상해 보게나. 더없이 많은 죽음과 패배만을 기억하는 삶을…….”

잠시 뜸 들이던 곽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겠군.”

“크흐흐흐.”

“뭐가 우습지?”

“내가 증오했던 마인 새끼가 날 동정하니 웃음이 안 나겠는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소정대 그대들은 신교의 가장 끈질긴 적이었으니.”

“무림맹에서 버림받은 삼류무사들이 마교의 인정을 받다니, 무림맹의 멸망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었군.”

잠시 뜸을 들인 진소운이 입을 열었다.

“근데 궁금하군. 어찌 삼류무사 하나 잡는 데에, 소교주가 직접 온 것인가? 태청신검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나?”

곽궁은 인근에 있는 무림맹주인 태청신검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진소운의 손을 가리켰다.

“자네가 차고 있는 그 팔찌.”

진소운은 고개를 숙여 옥색의 팔찌를 바라보았다.

기묘한 용의 문양이 새겨진 옥색의 팔찌.

남루한 그의 복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신교의 신물이다.”

“……그런가?”

진소운은 팔을 들어 팔찌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회상하듯 그의 눈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수없이 스러져 간 생명, 그들이 생(生)과 맞바꿔 이뤄낸 것들.

“호교법왕을 잡았을 땐…….”

무림맹도, 세상도 바뀔 거라 생각했지.

참으로 바보 같게도.

이내 자신을 비웃듯 코웃음을 내뱉는 진소운.

“남길 말이 있는가? 신교인의 손에 죽으면 마신께서 소원을 이뤄주시지.”

“후훗, 그따위 말 같지 않은 교리로 믿음이 생기는 걸 보니 진짜 미친놈들 집단답군.”

“우리의 신은 진짜니까.”

“소원이라…… 그래, 다음 생엔 우릴 버린 무림맹과 우릴 죽인 천마신교가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고 싶군.”

“저런, 참으로 어려운 소원을 비는군. 세상은 이제 천마신교의 것이니.”

진소운의 몸이 두둥실 떠올라 곽궁의 손에 쏙 끌려 들어갔다.

‘큽.’

곧이어 진소운은 온몸으로 곽궁의 마기가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신경이 갈가리 찢기고 뼈마디는 산산이 부서져 가는 듯한 고통.

‘아아, 후회 많은 삶이여. 현생의 업은 부디 현생의 것으로 끝나길 바라노라.’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세상이 어두워졌다.

#

“……분명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분명 죽었다.

본래도 기억력이 좋았지만 특히, 죽음을 맞이한 그날의 기억은 바람 냄새마저 생각날 정도로 또렷하다.

그러니까, 분명 그 새끼가 나타나서 죽였…….

등허리가 간지러워 손을 뻗었다.

긁적긁적.

시원한 청량감, 너무나도 생생한 감각.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흑사자 곽궁의 손에 죽었던 나는 당혹스럽게도, 무려 삼십 년 전 열아홉 살 시절로 돌아왔다.

무림맹 소정대의 진소운이 아닌.

태을문의 진소운이던 시절로.

천마신교가 세상을 뒤집어 놓은 시대가 아닌.

무림맹이 강호를 지배하던 시절로.

“소원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건가?”

곽궁과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려 본다.

애당초 사이비와 구분이 불가능한 그따위 잡신이 소원을 들어주리라곤 믿지 않았는데…….

진짜 효험이 있긴 했단 말인가?

“근데…… 확실히 마신답게 사람 말을 제대로 처 듣지를 않네.”

‘무림맹과 천마신교가 없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다’했는데……. 그 지옥 같은 정마대전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려 보내다니.

역시나 마교건, 마인이건, 마신이건, 마(魔)자가 들어가는 것들이랑은 상종을 하면 안 된다.

“휴우…….”

젊음을 되찾았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다.

머릿속에는 앞으로 삼십 년 간 벌어질 지옥 같은 현실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나는 여전히 잘해야 이류무사가 될 수 있는 태을문의 제자일 뿐이니까.

이렇게 과거로 돌아온 사실이 딱히 나더러 세상을 구하라는 신호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랬다면 최소한 뭔가 특별한 능력을 주거나 장삼봉 조사의 영혼 같은 거라도 붙여줬어야지, 안 그래?”

빌어먹을 마신.

장차 천마신교가 재림한다.

아니, 천마신교는 이미 재림해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걸 모를 뿐이지.

자신들의 힘을 절대적으로 믿던 무림맹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간다.

그런 무림맹을 믿던 이들도 함께 쓸려나간다.

내 사문인 태을문도 무림맹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함께 쓸려나갔다. 젠장.

“기억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그 끔찍한 장면을 또 봐야 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내게 있었던 일들을 모두 종합하여 결론 낸 답은 하나.

그러니까, 한마디로-

“망했네.”

왠지 마신 새끼가 어딘가에서 이런 내 꼴을 보며 쪼개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냐고? 내가 마신의 입장이었다면 그러고 싶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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