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8화 (8/357)

#8. <사문의 명예를 지키는 삼류무사(2)>

“좀 전엔 경황이 없어 인사가 늦었습니다. 철검문의 성모란이라고 해요.”

반달 같은 눈썹이 둥글게 말리며 미소를 지어 보이자, 오는 내내 밥 대신 똥이라도 집어 먹은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계철영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철검문의 늑대들 사이에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 있다. 들었는데, 이거 소문이 실제 미모를 한참 따라가지 못하는군요.”

“칭찬이 과하시네요. 계 공자. 안으로 드시지요. 소문주님께서 계룡상단과 태을문 분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계철영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과하게 어깨를 펴서 얼간이처럼 보였다.

철검문 내부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전각에 창문과 문은 모두 열려 있었고, 그 안으로 빼곡히 앉은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나눠 먹으며 왁자지껄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하하, 어서 오시게 상단주! 어이구 철영이도 왔구나! 이거 얼마 만인가!”

성모란과 비슷한 눈매를 가진 중년의 남자 성주탁이 웃으며 계연석과 계철영을 맞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문주님.”

“허허! 그참 격식은 그냥 치워 두라니까. 자네나 나나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왜 이리 벽을 세워!”

성주탁은 말은 그리하면서도 얼굴엔 만족감이 가득했다.

“그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내 아직도 철영이 자네 같은 인재를 놓친 걸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밤에 잠을 못 이룬다네.”

“과찬이십니다.”

“정말이지 그 부조리한 백팔봉의 특혜만 아니었으면 내 제자로 들였는데 말이야. 하하하하하.”

슬쩍 고개를 돌려 강채석과 진태산을 바라보니, 두 사람의 얼굴도 좀 전의 계철영처럼 뭔가 이상한 걸 씹은 표정이었다.

“아버지, 태을문의 사람들이세요. 인사하셔야죠.”

성모란이 겨우 주의를 끌어준 뒤에야 성주탁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태광장의 당주 강채석이라 하외다.”

“……진태산입니다.”

두 사람이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했지만, 성주탁은 그저 고개만 까닥하고 말 뿐이었다.

“강채석 그대야 무림맹에서 몇 번 봤고, 진태산 그대는 정말 오랜만이군. 한 이십 년 만인가?”

“……그렇군요.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습니다.”

“끌끌. 자네들은 참으로 좋겠어. 우린 지난 이십 연간 그리 노력해도 철영이 같은 아이를 받지 못했는데, 그대들은 가만히 있어도 저런 복덩이가 들어오니 말이야.”

“…….”

칭찬 같으면서 칭찬 같지 않은 비꼼에, 진태산과 강채석의 얼굴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이쪽이 홍 문주의 딸이겠고, 이 친구는…… 누구지?”

계철영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외당주님의 아들입니다.”

“아아, 자네 아들이었나? 어디 보자 근데 오성은 영 아니 올시다구만. 자네들도 괜히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철영이나 열심히 밀어주게. 내가 태을문의 무공에 대해선 잘 알지 않는가. 클클.”

지금 이 상황은 전생의 이 순간과 많이 달랐다.

의도를 숨기고 있던 철검문은 태을문을 본체만체하다 뒤통수를 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와중에 망신을 주지도 않았다.

이런 노골적인 의도가 보이면 차후에 굴욕을 주는 계획이 어긋날 테니까.

철검문이 바라는 건 태을문을 무릎 꿇리는 일이지, 자신들이 뒷골목 잡배 소리를 듣는 건 아닐 테니까.

더구나 이십 년 전에 철검문을 방문했단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애초에 성주탁은 계룡상단을 챙기기 바빴고 대화다운 대화를 해보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전생의 나는 쌍랑철검과 남궁산을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래. 너는 태을문의 무공을 어디까지 익혔느냐?”

이걸 어찌해야 할까, 어차피 결말은 파국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참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낫겠지?

“어디 말하는 것도 못 배운 것이냐? 허허, 참으로 태을문의 미래가 어찌 될는지.”

“거참 뒷골목 왈패도 아니고 내뱉는 말마다 더럽게 거슬리게 만드네.”

“…!”

소음으로 가득하던 일대가 정적에 잠겼다.

사람들은 한낮에 나타난 귀신이라도 본 듯,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떨구기 일 쑤였다.

“뭐, 뭣이라?”

말을 내뱉고도 아차 싶었다.

전생의 나는 결코 이렇지 않았는데, 바닥 인생인 소정대 놈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나쁜물이 들어버린 것이다.

참으로 도움 하나 되지 않는 빌어먹을 놈들이다.

“이놈이! 지금 뭐라 지껄인 것이냐?”

어차피 이리 된 거 멈출 필요 없다. 화살이 쏘아진 후 멈추게 할 방법이 있던가.

“아, 사죄드립니다. 속으로 말한다는 게 그만 입 밖으로 나와 버렸네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방금 전 제 사매의 부친이자 태을문의 문주님을 마치 친구처럼 부르셨고 저의 사문인 태을문의 무공을 헐뜯으셨으며, 마지막으로 강호인에게 함부로 물을 수 없는 상대의 성취에 관해서 묻지 않으셨습니까.”

“……허, 이, 이놈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찌 검을 든 이로서 분이 안 들겠습니까? 그래도 성현의 말씀이 오만무례한 자라도 비례로 대하지 말라 하셨으니, 이건 제 잘못이 맞습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난 대충 포권을 쥐었고, 성주탁의 얼굴은 보기 좋게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저 성모란은 자기 애비가 굴욕을 당하는데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지?

어쨌든 내 이야기에 동조한다는 듯 이편으로 눈과 귀를 집중하던 이들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너, 너…… 너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성주탁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뭔가 욕지기를 내뱉으려는 찰나.

“무림맹의 총군사님 드십니다!!”

장내에 쩌렁한 소리가 울리고, 앉아 있던 이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각에선 철검문주인 성천월과 그의 가신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예서 뭘 하느냐. 당장 따라나서지 않고!”

성천월의 호통에 나를 번갈아 보던 성주탁이 이를 빠득 갈고 성천월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고, 계연석과 계철영도 그 뒤를 따랐다.

“저, 저희도 가야 하는 걸까요?”

어안이 벙벙하던 홍사련이 문득 그리 말했고, 내가 답했다.

“어차피 총군사님과 한번 인연을 맺자고 달려드는 사람이 수백일 테니 그냥 들어가서 좋은 자리 차지하는 게 백배 나을 거다.”

“…….”

결정을 바라듯 사련이 진태산과 강채석을 바라봤지만 두 사람 또한 어안이 벙벙한 상태.

결국 성모란이 결정을 내려주었다.

“여기 공자님 말씀이 맞아요. 제가 좋은 자리로 안내할 테니 가시죠.”

성모란이 앞장서자 다들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중하라 하지 않았더냐!”

뒤쪽에선 강채석이 두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솔직히 말씀하십쇼. 제가 안 끊었으면 검 뽑으셨을 거 아닙니까?”

“…….”

부정해도 소용없다. 내가 분명 검에 손 올리는 거 다 봤다.

내가 봤다면 성주탁이 모르지 않았을 것.

어쩌면 잔치 마지막 날이 아니라 첫째 날 무릎 꿇고 사과할 뻔 했다.

“…….”

강채석은 합죽이라도 된 양, 입을 꾸욱 다물었다.

“제발 경거망동하지 마십쇼. 철검문의 속셈이 뭔지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

“최대한 군자처럼 행동하고 굳이 똥을 밟지 말란 말입니다.”

“이 자식아! ……나도 안다.”

“그럼 그 표정이나 좀 푸십쇼. 대체 이십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표정으로 성주탁을 보는 겁니까? 부모님 원수라도 되는 겁니까?”

강채석은 머뭇거리더니 진태산을 한번 보았다.

진태산이 고개를 젓자 강채석도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발걸음을 빨리했다.

전생과 똑같은 위치에 다다르자, 철검문의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태을문의 자리는 이쪽입니다.”

우리가 움직이자 철검문의 사람이 안내한 곳은 연무장의 한 켠, 술꾼들이 잔뜩 한 자리였다.

내가 먼저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성모란이 입을 열었다.

“그 자리는 다른 분으로 채우도록 하세요. 이분들은 제가 안내할 테니까요.”

성모란은 전각의 가장 깊은 곳 넓은 탁자로 향했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의 뒤를 계속 쫓아왔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소저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진태산이 처음으로 한마디를 꺼냈고, 성모란은 웃으며 내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

“……!”

이런 큰 행사에서 주역이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준다는 건, 상대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우리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우릴 보던 이들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여기! 술 먼저 가져다줘요!”

성모란이 이야기하자, 술과 안주가 쏜살같이 나왔고, 우리보다 앞서 먼저 와 기다리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 중 불만을 터트리는 자는 없었다.

아버지와 강채석 당주는 긴장감에 음식을 앞에 두고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닭 다리 하나를 집어 입에 가져갔다.

“공자께선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진소운이라 합니다.”

“아까 보니 실력이 출중하시던데…… 아차 이거 실례인 질문인가요?”

성모란의 과한 관심과 친절.

전생의 나였다면 미랑철검을 만났다는 감격에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네. 철검문의 미랑께서 눈앞에 앉아 먹는 걸 지켜보시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군요.”

“어머나? 호호, 사죄드려요.”

“그나저나 총군사님께서 오셨는데, 가보셔야 하는 건 아닙니까?”

“글쎄요. 어차피 중요한 일에 여자는 끼워주지 않는 것이 철검문의 규율인지라 이런 자리에 없다고 해서 치도곤을 맞진 않겠지요.”

“소문에 미랑의 이빨이 혈랑보다 날카롭다 들었는데, 저희 태을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히려 잘된 일일까요?”

혈랑철검 성모현은 철검문의 다음 계승자로 어린 시절부터 벌모세수를 비롯해 각종 영약을 독점하며 자란다.

반면 미랑철검은 아홉 살에 처음 내공에 입문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학과에 혈랑철검과 나란히 입학한다.

훗날에도 혈랑철검이 철검문을 반쯤 말아 먹은 후에, 미랑철검 성모란이 철검문을 끈질기게 이끌고 북해까지 쫓아가 무림맹에 집어넣어 명맥을 유지했다.

“호호호. 재미난 분이시군요. 좀 전의 일은 아버지를 대신해 제가 사죄드리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계룡상단과는 왕래가 있었던지라 철영 오라버니에 대해 아쉬움이 크셔서 그럴 거예요.”

“지금이라도 데려가셔도 될 텐데 말입니다.”

“호호호.”

성모란은 괴롭다는 듯 배를 부여잡으면서 웃고 있었고.

갑작스런 분위기 전환에 강채석과 진태산은 음식에 손도 못 대고 대신 술을 연신 들이켜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뭐죠?”

“철검문은 왜 태을문을 초대한 겁니까?”

진태산과 강채석의 고개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성모란은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잔치란 많은 사람이 모여 축하해 줄 때 그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게 아니던가요?”

“역사 속의 많은 암살이 주연을 베풀다 일어나곤 했지요.”

내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 성모란은 금세 웃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후후, 진 소협은 정말 재밌으신 분이시군요.”

성모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 소저께선 함께 식사하지 않으십니까?”

“의심을 덜어 드리기 위해 저도 함께 들고 싶지만, 이제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거 같아요.”

성모란은 그렇게 아버지와 강채석 당주에게 인사를 건네곤 돌아갔다.

“……소저요?”

옆자리에서 한참이나 말이 없던 홍사련이 불만스럽다는 듯 툴툴거렸다.

“응? 그럼 소협이라고 해야 했던 거냐?”

“흥!”

나로선 철검문이 얼마나 준비했는지 캐보려 했던 건데, 사련은 사정도 모르고 미랑과 대화를 나눈 나를 원수 보듯 하고 있었다.

역시나 아직 어려서 눈치가 없는 건가?

#

“소~~저? 헹!”

홍사련은 성모란의 배려로 따로 받은 숙소에 짐을 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태도는 상당히 거칠었다.

“‘재미난 분이시네요? 호호호?’ 어디 불여시 같은 게…….”

홍사련은 좀 전에 봤던 성모란을 기이하게 흉내 내다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급 비단으로 지은 아름다운 빛깔의 옷, 눈이 번쩍하게 시선이 쏠리는 장신구, 기품이 어린 꼿꼿한 자세와 자신감 넘치는 눈빛. 거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쏘이는 아름다운 미모까지.

무엇 하나 비교해 이길 자신이 없었다.

“휴…….”

태을문의 분위기가 철검문과는 대척하는 분위기였기에 대놓고 표현할 수 없었지만, 미랑철검의 소문은 자신도 들어 알고 있었다.

비슷한 나이대에 훌륭한 실력을 갖춘 그녀의 소문은 안휘성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으니.

타고난 바가 다르기에 각자의 성장세가 다른 거라 알고 있지만.

실제로 만나본 그녀에게서 보이는 모습들은 질투보단 닿을 수 없는 부러움을 느끼게 했다.

“…….”

태을문에서 제일 깨끗한 무복을 입고 왔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손에 닿는 감촉이 거칠었다.

똑똑.

사련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누구세요?”

“나다.”

“철영 사형?”

문을 열자, 무복을 벗고 비단옷으로 갈아입은 철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걸로 갈아입거라.”

계철영은 색색이 알록달록한 비단옷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남궁산 공자를 비롯해 안휘성의 쟁쟁한 가문의 후학들이 따로 주연을 가진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하려면 그런 무복으론 힘들 거다.”

“……피곤해요. 사형 혼자 가세요.”

“난 엄밀히 따지자면 계룡상단의 대표로 가는 것이다. 네가 가지 않으면 진소운이 참석할 텐데. 괜찮겠느냐?”

철검문과 친분이 있는 자들이 모이는 자리일 것이고, 태을문에겐 불편한 자리일 것이다. 그들의 시선과 이야기들이 전혀 편하지 않을 텐데. 과연…….

철검문의 소검주에게도 바락바락 대들었는데, 쟁쟁한 가문들의 후학들이라고 고분고분 있을까?

“…….”

“최소한 나랑 같이 가면 분위기가 훨씬 좋을 거다.”

홍사련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좋아요. 가요.”

“어서 갈아입어라.”

사련은 철영이 내미는 옷을 보다 도로 밀어내었다.

“됐어요. 그렇게 입고 싶으면 사형이나 입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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