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문의 명예를 지키는 삼류무사(3)>
성모란은 손님을 맞으며 피로를 쌓고 있었다.
“하하, 소저! 소문대로 출중한 미모시군요!”
“서시가 따로 없군요. 아버님께서 아주 흐뭇하시겠습니다.”
“소저가 들어오는 순간 벌써 해가 뜨는 줄 알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남정네가 과도한 관심을 보이고.
“소저의 검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들었습니다. 후에 제가 한번 봐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 또한 검에 대해 조예가 깊으니, 나중에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논검(論劍)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희 가문에 교환 제자로 오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가 조부님께 말씀드릴 수가…….”
마치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양 거들먹거렸다.
“실전 한번 겪어 보지 못한 온실 속 화초들이.”
저렇게 거들먹거리는 게 본인의 실력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사문의 비호가, 가문의 투자가 없이 과연 가능할까?
최소 가문에서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이 자리까지 올라온 자신과 같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마음을 표현할 순 없었다.
자신과의 비무에서 압도하지 못했던 성모현의 얼굴이 얼마나 기괴하게 일그러졌으며, 가문 어른들의 눈동자가 얼마나 우려스러웠는지는 기억하고 있기에 성모란은 괜히 일을 만들지 않았다.
“진짜 무사는커녕, 변변한 사내도 없네.”
지루했다.
가문의 체면이 어쩌고 하면서 타다다다 잔소리를 쏟아내는 어머니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지만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성모현까지 뭔갈 꾸미고 있는 듯했는데, 이야길 해주지도 않았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
‘백팔봉이네 뭐네 하는 거겠지.’
사내들이 모여서 겨우 한다는 이야기가 작당에 관한 거라니.
차라리 화끈하게 결투라도 벌이든지. 이미 태을문의 힘은 압도한 지 한참이 아니었던가.
힘의 차이를 보이고 정정당당하게 상대를 품는다면 최소한 무사다워 보일 텐데 말이다.
“시시해.”
남궁선화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크게 아쉬웠다.
최소한 그녀라도 있었다면 이리 심심하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정신없겠지.”
남궁선화 대신 회갑에 참석한 남궁산의 주최하에 주연을 펼친다고 들었지만, 참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가봐야, 남궁세가와 철검문에 아양을 떨지 못해 안달 난 이들만 가득하니까.
한동안 들어야 할 칭찬과 아첨은 충분히 들었다.
“아가씨! 아가씨!”
하녀 하나가 성모란을 찾고 있었다.
“이크.”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성모란이 가볍게 바닥을 차올라 지붕에 소리 없이 내리 앉았다.
“어디 가셨지?”
조금 전까지 성모란이 있던 곳에 다다른 하녀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며 성모란을 찾고 있었다.
“도련님이 찾으시는데. 아가씨! 아가씨!”
하녀가 사라진 후에야 성모란은 작게 한숨 쉬었다.
“아으…….”
조신한 아가씨 흉내를 내느라 제대로 기지개 한번 펴보지 못했던 그녀가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는 순간.
그녀의 눈이 전각 사이의 두 남녀에게 고정되었다.
바로 계철영과 태을문의 어린 소저였다.
“흠…… 두 사람만 가는 건가?”
성모란은 낮에 보았던 진소운이란 자가 떠올랐다.
분명 내력은 미천해 보였고, 태양혈의 자국도 없었다.
가진바 일신의 무공은 미천하기 그지없어 보였음에도, 청죽보의 죽염 뭐시기를 단박에 제압했다.
“신기하단 말이야.”
그때 보였던 한 수만 신기한 건 아니었다.
사람은 가진 바에 따라 태도가 정해진다.
가문의 배경이 단단한 사람은 어깨가 절로 펴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허리가 숙여진다. 배경을 제외하고 일신의 노력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은 태도 또한 당당할 수 있다.
하지만 진소운이라는 사내는 배경은 태을문이고, 일가를 이루기엔 너무 젊었다.
거기다 자신의 아버지인 성주탁의 말에 따박따박 논리 정연하게 대답하여 말문을 막는 입담까지.
“철검문이 별로 무섭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밌겠다.”
지루했던 연회가 갑자기 즐거워질 것 같았다.
성모란이 지붕을 가볍게 차고 밤하늘을 날았다.
#
“……좀 이상하지 않나?”
진소운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 강채석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진태산에게 말했다.
“흠…… 좀 이상하긴 하군. 식당 자리며, 객실이며.”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진소운 말이야. 자네 아들.”
“소운이가?”
“아니 그 좀 이상하지 않나? 아까 자네도 보지 않았나, 성주탁 앞에서 고개 뻣뻣이 들고 말로 때리는 거. 보는 내가 다 아프던데.”
“…….”
“그러고 보면 계연승 때부터 시작해서 요즘 녀석이 좀 이상하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단 말이야.”
“……자네도 알지 않나. 소운이 녀석의 특기. 아마 예전에 서적에서 본 것들을 기억해 뒀나 보지.”
“그럼, 계연승은? 그 놈을 이긴 건?”
“단순한 초식 싸움이라 하지 않았나. 한번 본 것만으로 다 외울 수 있으니 뭔가 방법을 찾은 거 아니겠나?”
진태산의 이야기를 듣던 강채석이 고민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화산파의 매화검법을?”
“…….”
“그게 본다고 약점이 찾아지는 건가? 더구나 녀석은 소천검법을 사용했다는데?”
“……그건 모르겠군.”
“혹시 말일세.”
강채석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소운이 녀석 혼자 뭔가 수련하는 거 아닐까?”
“??”
진태산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그 놀기 좋아하는 놈이 수련이라니.
“아니, 그 부분을 말하는 거네. 녀석이 백날 천날 산으로 강으로 싸돌아다니는 거 말일세. …그게 혹시 개인 수련을 위한 게 아니겠느냐 말이야. 만약 매화검법을 이기기 위해 그 기억력을 사용해 수천 번 상상 비무를 해봤다면…….”
소운의 기억력은 상식을 초월한다.
어쩌면 강채석의 말대로 가능할지도 몰랐지만.
“훗.”
말 같잖은 소리.
어려서부터 뛰어난 머리 때문에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쉽게 배운 소운은, 그 때문에 게으름이 몸을 벴다.
책을 한 번만 봐도 외워버리고, 초식을 대충 봐도 따라 할 수 있으니 어쩌면 나태는 녀석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진태산이었다.
하지만 강채석의 생각은 좀 다른 듯 보였다.
“생각해 보게. 녀석이 계연승 그 작자와 내기를 걸 때의 조건이 뭐였는가? 부생당의 이수 아니었는가?”
“…….”
“부생당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며칠씩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고 쏘다니고 있다면서?”
“…….”
“그리고 내가 철검문으로 오는 내내 녀석의 뒤에서 지켜봤는데, 녀석의 체형이 조금 변했어.”
진태산은 믿기지 않으면서도 강채석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녀석이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분노?”
“그래, 태을문에 계철영이 들어온 뒤로, 위계가 얼마나 망가졌나. 더불어 알게 모르게 계철영이 사제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거기다 차후엔 무림학관에 갈 게 계철영으로 정해져 있다시피 하니 녀석이 화가 안 나겠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까도 말이야. 성주탁. 인정하긴 싫지만 그래도 절정에 오른 고수란 말이지. 아무리 기세를 뿜지 않고 있다고 한들. 소운이 정도의 아이가 떨지 않고 눈을 마주친다는 게 그게 쉬운 일인가?”
강채석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진태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들이 걱정인 거네. 담대함만으로 살아가기엔 무림은 태을문에게 너무 가혹해.”
“쯔쯧. 자네도 이제 늙었군.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두려움에서 한발 떼는 용기. 결국 그런 것들이 모여 다시 태을문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강채석의 말에 진태산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저 강채석이 했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을 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진소운이 한 손에 큰 보퉁이를 들고 나타났다.
강채석이 버럭 소리를 쳤다.
“멍청한 놈. 태을문을 이끌어갈 놈이 이런 중요한 임무에 왜 이리 시각을 허비하는 거냐?”
“갑자기 뭔 소립니까. 이끌긴 뭘 이끌어요. 그리고 이게 무슨 임무씩이나 된답니까.”
진소운은 주방에 섞여 들어가 일반 잔칫상에 나오지 않는 귀한 술 몇 병을 꺼내오는 중이었다.
“이게 다 철검문의 재력을 측정해 보는 중요한 과정의 일환이니라.”
강채석은 후다닥 진소운에게 다가가 보퉁이를 빼앗다시피 건네받은 후, 우뚝 멈춰 서서 진소운을 바라봤다.
“킁킁.”
“……으흠. 아우 답답해 바람 좀 쐐고…….”
“너, 술 마셨냐?”
“목숨을 걸고 정보를 캐온 제자에게 그게 할 소립니까? 술을 들고오다 살짝 쏟았습니다.”
강채석은 나가려던 진소운의 뒷덜미를 콱 잡아챘다.
“너 하~ 해봐.”
“어찌 하늘 같은 쾌화당주님의 용안에 제 오구를 들이밀수 있겠습니까.”
강채석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태산, 내가 방금 했던 이야기는 잊게나. 내가 잘못 본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 중요한 이야기 입니- 아악! 아악!”
진소운이 우악스런 강채석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전각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똑똑-
강채석과 진소운의 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이 쏜살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채석은 침구 안쪽으로 술을 숨기고, 진소운은 보퉁이를 안 보이는 곳에 숨겨놓았다.
“모란 소저?”
문을 열자 문 앞에 나타난 건 철검문의 관리인이나 하인이 아닌 미랑철검 성모란이었다.
“밤 늦게 무슨 일이십니까?”
“안휘성의 젊은 후기지수들끼리 주연을 마련했어요. 함께 참여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진소운은 뒤쪽을 바라보며 진태산을 보았고, 진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감사합니다만, 하루 종일 걸었던 탓에 심신이 지친 상태라 자리는 다음에 갖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진소운의 거절에 성모란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홍 소저는 벌써 가 있는 모양인데.”
진소운과 진태산, 강채석의 시선이 서로 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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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
호호호호.
연회장엔 웃음소리가 넘쳤다.
아름다운 남‧녀들이 마치 기쁜 일이라도 있는 양,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비단옷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무복을 입은 사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어디 가서도 대우받지 못할 것이란 걸…….
아니, 무시당하고 조롱받지 않으면 다행이란 걸.
그걸 각오하고 있었기에 이 자리에 참석했다.
최소한 문주의 자식인 자신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에서.
“안 그래도, 검을 든 자로서 태을검제님의 검을 견식하는 것이 내 꿈이었소. 언제 한번 문주님과 약속을 잡아 줄 수 있겠소?”
“…….”
옥색의 비단을 걸친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의 옷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예끼 이 사람아! 적당히 놀리세.”
한쪽에선 말리는 듯 하지만.
“태을검제 그거 다 백팔봉에 들려고 만들어 낸 이야기 아닌가.”
“허어! 그렇단 말인가?”
과장되고 허황된 행동들.
그 몸짓에 궁장의 여인들이 입을 가리고 웃음 짓는다.
“아니, 애초에 그런 이야기로 백팔봉에 들 수 있단 말인가?”
“이야기가 아주 사실적이지 않나. 어지간하니 들 수 있었던 거겠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라면 아무 문제 없었을 이야기들.
“…….”
각오했던 바다.
“그만들 하게, 홍 소저가 무안하겠네.”
가장 많이 놀렸던 자가 가장 먼저 나서서 말린다.
“미안하외다 홍 소저. 사내들이라 농이 지나치오.”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다.
소운 사형이라면 아마 참지 못했을 테니까.
마구 분개하고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까불다 뚜둘겨 맞았을지도 모르지.
‘근데 철영 사형은 어떻게 이긴 거지?’
문득 딴생각을 하니 좀 더 마음이 편해졌다.
어쩐지 더 편안하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다.
소운 사형 대신 내가 온 게 정말 다행이다.
사련은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