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문의 명예를 지키는 삼류무사(5)>
“내 그리 말했거늘!”
숙소로 돌아와 주연에서 일어나 일을 이야기했고, 날벼락이 떨어졌다.
강채석은 씩씩거리며 분을 숨기지 못했고, 진태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문을 모욕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참고 있었던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까?”
“이, 이…… 이 놈이 진정!”
흥분하여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강채석 대신 진태산이 말했다.
“너는 그들의 모략에 명분을 줬다. 그 명분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치 못한 것이냐?”
“명분은 일방적이었고, 억지스러웠습니다. 모욕을 견딘다 한들 그들은 결국 저를 끌어냈을 겁니다.”
“그렇다면 비무를 빙자한 일방적인 폭력은 없었을 것이다.”
“패배하여 다치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패배가 두려워 도망치는 제 모습은 두렵습니다.”
“…….”
진태산은 말없이 일어나 상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태산이 자네!”
사련이 함께 있음에도 무슨 생각인지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
“이게 무슨!”
옷을 벗고 드러낸 진태산의 등에는 깊은 상흔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상흔은 네 손가락 너비에 길게 뻗어있었고 끝은 뾰족했다.
“보아라. 이것이 무슨 상처 같으냐.”
아버지는 나와 한집에 살면서도 벗은 몸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아주 어린 시절에도 이 상처에 관한 기억이 없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었다.
“무슨 상처…입니까.”
“자세히 보아라.”
채찍이라 하기엔 상흔의 상처가 너무나 일정하고, 몽둥이라 하기엔 끝이 뾰족하다.
모양은 꼭 검을 꾹 눌렀다가 뗀…….
“설마…… 검면……입니까?”
“바로 보았다. 이십 년 전 철검문의 소문주인 성주탁이 새긴 상처다.”
뿌드득.
이가 갈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고통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말해주십시오.”
“…….”
진태산은 말없이 다시 옷을 걸쳤다. 그리고 그대로 숙소를 나섰다.
“그만하거라. 사련이도 어서 돌아가고.”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제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면, 앞으로 무슨 짓을 할 지도 알 수 없습니다.”
“…….”
“누구나 제 뼈가 부러지는 고통보다 가족의 살이 찢어지는 것을 더 크게 느끼는 법입니다. 이대로 그냥 잠이 든다면, 전 내일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성모현을 죽일 각오로 싸울 겁니다.”
“……같은 성취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태을문의 검은 철검문의 검을 이길 수 없다.”
철검문의 검법의 묘는 중(重). 철검문의 시조인 귀검선옹은 4촌짜리 거검을 사용했고, 지금에 검법들이 모두 완성에 가까워지며 3촌넓이의 검면을 가진 검으로 통일되었다.
태을문의 검법의 묘는 쾌(快).
빠름의 묘리는 무게가 가벼워 철검문의 검을 뚫을 수 없다.
속도가 더 압도적이라면 무게에 연연하지 않겠지만, 그러자면 상대보다 더욱 압도적 내공이나 성취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패자에게 저런 짓을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홍사련이 분을 참지 못해 말했다.
“지금과 같이 수많은 무림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였다. 사련. 넌 네가 하지도 않은 잘못을 순순히 인정할 수 있겠느냐?”
“…….”
“그렇기에 어떤 억지스러운 상황에서도 휘말리지 말라 한 것이다. 무림맹의 총군사와 남궁세가에서의 사람까지 와있는 상황에서 그 간안학 놈들이 어떤 억지를 부릴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
*
아버지는 결국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중앙 연무장에 있었다.
“…….”
“진태산 이 멍청한 놈.”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그의 모습에 강채석의 두 눈에선 불꽃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회갑 잔치에서 거나하게 대접을 받은 이들은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속속들이 중앙 연무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대체 어쩐 일이래?”
“태을문의 제자가, 철검문을 모욕했다고 하더군.”
“허허! 이런 겁 없는 녀석을 보았나. 감히 태을문이 철검문에서 그런 짓거리를 해?”
“그의 아비가 사죄하는 모양이야. 대범하게도 철검문주께서 진심으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며 용서하겠다 하셨다는군.”
철검문은 더욱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하인들을 시켜 간단한 안주와 술까지 연무장 주변에 배달시켜 주었다.
구경거리보다 술이 중요한 사람도 전각에서 헐레벌떡 나오기 시작했다.
“…….”
내가 아버지에게 걸어가자 시선이 곧 나에게 쏠렸다.
“저 녀석이 그 녀석인가?”
“철없는 자식놈 때문에 아비가 치도곤을 당하겠군.”
내가 가까이 다가갔지만 아버지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내려가 있어라.”
“일어나십쇼. 왜 죄인처럼 있는 겁니까?”
“……세상에 어떤 아비가 아들의 몸에 상처가 생기는 꼴을 볼 수 있겠느냐.”
“세상의 어떤 자식도 아비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
내가 진태산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연무장 위로 철검문주와 소문주인 성주탁, 무림맹의 총군사인 제갈소명과 남궁세가의 남궁태원, 남궁산이 나타났다.
“네놈이 태을문의 진소운이렸다.”
철검문주가 깔보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렇소.”
“참으로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이로다. 네 녀석의 경망한 혓바닥이 지금 무슨 사단을 만들었는지 보았으면서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이냐.”
“세상의 어떤 무사가 제 아비의 원수에게 예를 갖춘단 말이오?”
“뭐라?”
“이와 같은 일이 이십 년 전에도 있었다 들었소.”
“……무슨 소리냐.”
“철검문의 잔치에 태을문을 초대하고, 우리를 모욕한 후 검을 들게 만들어 굴욕을 안겨주지 않았소?”
“……!”
내 이야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저게 무슨 소리래?”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이! 조용히 해! 지금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
말을 내뱉던 이들은 철검문도들의 서슬 퍼런 눈빛에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태을문을 제거하고 백팔봉에 들고 싶은 것은 알겠으나, 이따위 시정잡배들도 하지 않을 짓거리를 한 그대들에게 진정 무림맹의 맹방이 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소.”
소란은 더욱 커졌다.
분명 누군가는 20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 것이고, 지금과 너무도 닮은 두 상황에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이, 이놈이……!”
철검문주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제갈소명의 눈치를 보았다.
“…….”
하지만 제갈소명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가만히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고, 그에 더욱 용기백배한 철검문주는 안색을 바꾸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네놈이 저지른 일 때문에 네놈의 아비가 저런 꼴을 당하고 있다.”
바닥에 엎드린 채 구부정하게 굽은 등이 오늘따라 단단하고 거대하게 느껴졌다.
“아비가 자식을 걱정하는 행동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소. 하지만 이런 아비의 마음마저 이용하려 하는 그대들의 냄새나는 비열한 행동에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소이다!”
“저, 저놈이!”
난 성모현을 가리켰다.
“저기 성모는 내 말에 책임을 내가 지라 했소. 근데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이오?”
성모현은 제 아비와 조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제 놈들의 당초 계획과는 많이 어그러진 판.
더구나 무리맹의 총군사와 남궁세가의 사람까지 나온 이상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렸다.
나는 더 이상 놈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성모현! 네놈의 아비와 조부가 이 정도의 판을 벌여 주었다. 네가 이 판의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
난 검을 뽑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검은 이미 뽑았으니 이제부턴 아버지의 무릎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려가십시오.”
진태산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버텨낼 자신 있느냐?”
“각오는 이미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한 순간의 고통으로 스스로를 부끄럽게 할 행동은 하지 마라.”
난 대답 대신 사련을 바라보았다.
사련과 강채석이 연무장 위로 올라와 걷지 못하는 진태산을 부축하여 연무장 아래로 내려갔고,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 성모현이 올라왔다.
“의도대로 되지 않아 아쉽겠소.”
성모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구나.”
“설마 어른들의 의도가 뭔지도 모르고 움직인 건가? 미랑이 혈랑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성모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마 비무에서 날 이긴다 한들 원하는 바는 이루지 못할 거요.”
난 주변의 구경꾼들을 바라보았다.
“더구나 내게 지거나 비등하게 승부가 나버린다면 오늘의 일은 영원히 철검문을 부끄럽게 만들겠지.”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엔 의문감을 박아두었다.
철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내 말을 부정하겠지만, 철검문을 내심 싫어했던 사람들은 철검문을 비난할 좋은 계기를 가진 것이다.
“……웃기는 소리는 그만해라.”
성모현이 기수식을 펼쳤다.
철검문의 호전성을 보여주듯 앞으로 잔뜩 기울이고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자세.
무림의 배분과 수준을 따져 양보하는 것 따위는 없었다.
예가 사라진 비무는 이름만 남았고, 서로의 기세는 금방이라도 상대의 목숨을 취할 기세였다.
“차앗!”
성모현의 먼저 움직였다.
손가락, 네 마디에 달하는 굵은 검에는 거력이 실리고, 그 검이 사방을 휘저을 때마다 날카로운 검풍이 휘몰아친다.
한 번이라도 철검문의 검을 받아낸 자들은 마치 거대한 철퇴를 얇은 검으로 받아내는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태을문의 가볍고 쾌활한 검으론 받아내기 불가능한 검법이다.
이 점을 강채석과 아버지는 가장 우려를 했던 것이고.
‘하지만 그건 같은 수준일 때의 이야기지.’
정마대전시절 십이성에 이르다 못해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던 소천검법.
영약으로 키운 내공을 운공하기 시작하자, 온몸에 기운이 가득 퍼졌다.
쐐액.
스걱.
스산한 절삭음과 함께 검을 내려치던 성모현의 얼굴이 파랗게 물들었다.
“헙!”
“바, 방금 봤어?”
사람들은 바닥에 떨어진 성모현의 옷자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비무가 시작했음에도 소란이 감돌던 연무장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것과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난 지체하지 않고 성모현을 향해 중진보법을 밟아 나갔다.
소천검법의 초식인 일초파검에 이어 이초삭검이 뻗어나간다.
성모현은 제대로 방어식을 펼치지도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검봉과 옷자락을 내어주며 검을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태을문이 압도하고 있는 거지?”
“이거 완전 개망신이구먼. 그렇게까지 일을 벌여놓고.”
“조용히 해. 문주 표정이 좋지 않으니.”
애당초 전생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전쟁터 맨 앞에서 마교의 주구들을 상대하며 필사적인 실전을 쌓아온 나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벌모세수와 영약으로 범벅된 삶을 살아온 성모현.
내공이 더 압도적이라면 분명 성모현이 이길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이젠 내 내공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그렇게 계략을 다 꾸며놓고도 겨우 결과가 이렇다니. 분명 사문 사람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겠군요.”
“닥쳐라!”
거리를 벌린 성모현이 파석검법을 포기하고 파산검법을 펼칠 준비를 한다.
파산검법은 철검문의 정수.
파석검법으로 압도해야만 철검문이 태을문 위에 있음을 명시 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러다 져버린다면 모든 것이 안 하느니만 못 한 일이 되어버리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대로 끝내는 것이 합당한가.’
파석검법이 아닌 파산검법일지라도 지금의 성모현은 나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성모현을 이긴다 한들, 앞으로 철검문의 음모를 완전히 틀어막을 수 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나는 두 번의 삶으로 엄연히 규격 외의 실력을 가진 것 뿐이고, 그것을 곧 철검문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하겠지.’
무림맹의 총군사까지 초대한 채로 당한 망신은 얼굴에 뻔뻔한 인두겁까지 쓰고 패악질을 부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다시는 철검문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붕붕붕.
성모현의 검이 휘둘릴 때마다 바람 터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기파가 움직인다.
돌로 만든 연무장의 바닥이 덜덜 떨릴 정도의 범상치 않은 거력.
난 다시 한번 소천검법을 쏘아내어 파산검법에 맞섰다.
챙. 채채챙.
빠르게 회전하는 팽이에 바늘 하나 던진 것처럼 튕겨 나오는 나의 검에 성모현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어렸다.
“이제 알겠느냐? 이것이 바로 격의 차이다!”
붕붕붕.
퍼퍼퍼퍼퍽!
더욱 의기양양한 성모현의 검이 바닥을 휩쓸자,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며 관객석까지 날아갔다.
“피, 피해!”
“이런 위력이라니!”
“역시 철검문은 철검문이군.”
약점을 공략하지 않고 내공의 양을 줄여 일부러 계속 검이 통하지 않게 했다.
그리고 검이 파산검법에 막힐 때마다 뒤로 물러나 종국에는 연무장 끝까지 몰려 나갔다.
“이걸로 끝이다!”
성모현이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그의 품을 파고들어 왼손을 대고 청룡환을 발동시켰다.
“……!”
그는 갑자기 힘이 풀린 사람처럼 검을 바닥에 떨구었다.
“헙!?”
성모현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귀신이라도 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