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를 구하는 삼류무사>
일주일간 예정되었던 환갑 잔치는 이틀 차에 끝나버렸다.
다른 성에서 먼 길을 온 사람들은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탓에 불만이 많았지만, 욕을 내뱉는 자는 없었다.
철검문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흉흉해져 누구도 쉽사리 분을 표출할 수 없었다.
각지에서 중요 인사들이 참석했지만 철검문주인 성천월의 배웅을 받지 못했다.
사건 이후로 성천월은 두문불출하였고 성모현은 금옥에 갇혔다.
“흡성대법을 익혔습니다! 분명 흡성대법을 익혔단 말입니다!”
성모현은 미친 사람처럼 흡성대법을 외쳤지만, 밥을 가져다주는 하인들도 그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본래 숙소가 아닌 곳에서 깨어났다.
‘뭐지?’
아버지나 강채석은 저런 비단옷을 입을 형편이 안 될뿐더러 체형 자체가 워낙 곰 같은 체형이라 어울리지 않았다.
“일어났는가?”
“누구십니까?”
“그 질문은 나를 떠보려 함인가? 나를 놀리려 함인가? 어떤 것이 의도이든 불쾌하게 느껴지는군.”
“…….”
“자네의 그 웃기지도 않은 연극을 도와준 내게 그 정도의 행동밖에 하지 못하는가? 인의를 말하던 자가?”
역시나 제갈소명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태을심법은 정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난 심법이라 성천월이 혈도를 조금 휘젓는다 해서 내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총군사님.”
“됐고. 앉게나.”
제갈소명은 지금도 밀린 업무가 많은지 문서를 읽고 서명을 하기 바빴다.
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눈앞의 차를 따랐다.
“입 안의 상처가 크던데. 그냥 물을 준비하라 할까?”
“크흠……. 괘, 괜찮습니다.”
내상은 입지 않았지만, 극적 연출을 위해 피를 토해낼 필요가 있었던 나는 입안의 살점을 마구 뜯어냈다. 한동안 매운 음식은 냄새도 못 맡을 것이다.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 상태를 보고 확신했지. 그래도 내상을 입지 않은 건 놀랍더군. 태을문의 내공심법 중에 그리 뛰어난 심법이 있던가?”
“태을문의 근간이 되는 태을심법입니다.”
“태을심법으론 그만한 양의 내공을 모을 수 없을 텐데.”
굳이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
지금 중요한 건 제갈소명이 내막을 알면서도 왜 철검문주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입 안의 상처를 보고 확신을 했다면 그 전에 이미 예측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진즉에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도 제갈소명은 내 작전에 힘을 보태주었다.
“…….”
그는 한 개의 문서 작성이 끝나면 새로운 문서를 읽고 그곳에 서명하거나 다시 돌돌 말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어디서부터 계획한 것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전날에 있었다는 주연에서였나? 아니면 성모현이 금공에 대해 언급할 때였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군. 굳이 집행각을 들먹이며 자신의 연극에 무림맹을 끌어들인 죄가 얼마나 큰지를 이야기해야 입을 열 텐가?”
그제야 제갈소명이 알면서도 속아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단지 내가 짠 이 판이 재밌다는 이유로 끼어든 것이다.
머리가 좋은 이들은 기발하고 놀라운 것에서 강한 흥미를 느낀다는 천기의 말이 떠오르자, 총군사에게서도 뭔가 뜯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까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결국 매를 들어야 하는가?”
“자고로 상대의 입을 열기 위해선 편(鞭)보다 은(銀)이 더 효과가 좋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갈소명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옆에 세워둔 구중검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성모란이 처음에 주연을 가진다고 할 때 거절했다지?”
아마도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모두 알아본 모양이었다.
“철검문주가 철심단 세 알을 준다고도 이야기했었는데. 그건 없던 일이 된 겁니까?”
“허허.”
제갈소명이 품속에서 작은 목갑을 하나 꺼내었고, 나는 재빨리 목갑을 열어 철심단 세 알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 내 앞에서 확인하는 건가?”
“모든 일은 확실하면 좋지 않습니까.”
제갈소명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철검문이 계룡상단을 이용해 태을문을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였습니다.”
“뭐라?”
“단순히 친선을 위한 일이었다면 정중하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태을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계룡상단을 이용해 억지로 참석하게 했습니다. 뭔가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벌일 이유가 무에 있겠습니까?”
“허…….”
전생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던 일이니, 난 솔직하게 말했다. 굳이 총군사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 했다간 몽땅 탄로 날 테니까.
“그럼 성모현이 금공을 언급할 줄 알았나? 그리고 성모현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건 어떻게 한 것이었지?”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궁금하신 겁니까?”
“난 두 가지 다 궁금하네.”
“그럼 계산이 맞지 않습니다.”
“무엇이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건가? 자넨 내가 없었으면 구중검도 철심단도 얻지 못했을 거야. 더불어서 목숨도 잃었을지 모르지.”
“대신 철검문과 무림맹은 이번 사건에 의해 두고두고 욕을 먹겠지요. 철검문은 다시는 태을문을 누르고 백팔봉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고요.”
“어찌 되었든 내 도움이 있었기에 이리 잘 풀릴 수 있었던 것이지.”
“총군사님께선 애초에 당연한 일을 하지 않으셨고, 뒤에 문제가 커진 후에야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은 도움받았다 할 수 없죠.”
“당연한 일을 하지 않았다?”
“저희 태을문은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었고, 총군사님께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대신 무림맹에 누가 더 이득이 될지 계산하고 계셨지요.”
“…그게 내가 할 일이지.”
“그러니 저는 총군사님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고 제가 총군사님께 빚진 것도 없으니 총군사님의 물음에 모두 답하는 것은 계산에 맞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제갈소명의 입이 처음으로 벌어졌다.
“강호에선 나와 일각의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만금을 가지고 몇 날 며칠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네. 자네는 그저 몇 가지의 대답으로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도 거절하는가?”
“그건 그들이 만금보다 더 얻을 것이 있기에 만나려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 자네는 내게 아쉬울 것이 없다?”
“저희 태을문은 두 끼 먹던 끼니를 세 끼 먹기 위해 계철영을 받아 들였습니다. 저희 태을문이 총군사님과 함께 하여 얻을 이익이 무에 있겠습니까.”
“허….”
노골적인 불쾌감의 표출.
그래 봐야 앞으로 만날 일 없으면 그냥 아저씨 아닌가. 설사 무림맹에 들어간다 한들 내가 만통부의 높으신 분을 만날 일이 무에 있을까.
“아마 오늘이 제 생에서 총군사님을 뵙는 마지막 날이 되지 않겠습니까?”
“…….”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모현이 금공을 언급할 줄 알았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게.”
역시 총군사답게 무(武)에 관한 것보단 전략에 관한 호기심이 더 컸다.
“굳이 금공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성모현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고, 그것은 태을문의 사람들조차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진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을 겁니다. 아마 저와 검을 맞대는 뛰어난 기재들은 제가 사술을 쓴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그냥 이길 수도 있었다?”
“그건 총군사님께서도 아시는 것 아닙니까?”
제갈소명은 머리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뛰어난 무사다. 젊은 시절 그의 설화철선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사방에 흩뿌려지는 흑도의 피가 강을 이뤘었다.
“그럼 깔끔하게 비무를 승리로 이끌었으면 될 일 아닌가?”
“단순히 이기기만 해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 않습니까.”
“…….”
“압도적으로 비무를 이기고 나면 차후에 또 어떤 방법으로 피해를 끼칠지 모르잖습니까. 하지만 이런 사건이 한번 터지면 못해도 최소 10년은 잠자코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끝까지 무시할 수도 있었네.”
“그랬다면 무림맹의 유지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천하에서 모인 술꾼들이 구경하는 와중에 기를 쓰고 무시를 한다? 가뜩이나 안 좋아지는 무림맹에 대한 여론만 악화될 뿐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금공을 익힌 것으로 누명을 쓴다면?”
“아마 그랬다면 제 시체를 무림맹의 집행각에서 가져갔을 것이고, 검안을 통해 제가 금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냈겠죠.”
꿀이라도 먹은 듯 입을 꾹 다문 제갈소명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겨우 이만한 일로 목숨까지 건 것인가?”
“‘겨우’라 하셨습니까? 그 ‘겨우’ 때문에 철검문은 계룡상단을 이용해 태을문을 압박했습니다. 그 ‘겨우’ 때문에 제 아비는 이십 년 전 성주탁에게 맞은 상처가 아직도 흉터로 남아 있고, 그 ‘겨우’ 때문에 태을문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철검문 전체와 싸우려 했습니다.”
“…….”
“제갈세가에게 금보다 중요한 것이 그 이름 아닙니까? 작은 문파라고 다를 게 무엇입니까?”
“흠…….”
높으신 분들은 이게 항상 문제다. 저들의 이름은 무엇보다 숭고한 가치이지만, 우리들의 이름은 목숨까지 걸 정도의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편협함.
그게 전생의 무림맹을 그따위로 만든 거겠지.
“그럼 하나 묻겠네. 작은 문파의 이름에 그리 가치가 있다면 태을문과 제갈세가가 서로 대척점에 서 있을 때. 태을문은 제갈세가를 어떤 방법으로 상대하겠나?”
“…….”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봤다.
그가 금세 의중을 알아차리고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었다.
“끌끌. 계산이 맞지 않는다 이건가?”
“네.”
“그래. 계산이 맞으려면 무엇을 주어야 할까. 난 행단에 의탁하여 온 몸이니 돈이 없어 돈을 줄 수도 없고.”
품속을 뒤지던 제갈소명이 상아로 만든 작은 패를 꺼내었다.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상아패에는 ‘입관(入關)’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존재한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정작 실물을 봤다는 사람이 드문 물건.
지옥정시라 불리는 ‘정시’를 치르지 않고도, 백팔봉이 가지는 특혜인 ‘특채’를 이용하지 않고도, 무림학관에 무혈입성할 수 있는 입관패였다.
억만금의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입관패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이 정도면 되겠는가?”
난 재빨리 입관패를 집어 품속에 넣었고 제갈소명은 이번에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제갈세가와의 대척점이라.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오대세가 중 가장 골치 아픈 상대를 골라보자면 전 제갈세가를 뽑겠습니다.”
“아첨은 되었네. 이야기나 해보게.”
“글쎄요. 일단 저는 가산을 있는 대로 다 팔겠습니다.”
“그런 후엔?”
“그리곤 가산을 나누고 어른들과 어린이들을 나누어 천하에 뿔뿔이 흩트려 놓겠습니다. 그래도 백도 문파인 제갈세가가 추격자까지 보내 살인멸구하진 않겠죠.”
“…….”
제갈소명은 똥을 먹는 개를 보는 눈빛이었다.
“그게 단가?”
“네.”
“…….”
“질문의 답을 하길 바라신 거지 꼭 정답을 말하라 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이것도 작전을 짠 건가?”
“계산이 안 맞습니다.”
“……그 계산 이야기 지긋지긋하군.”
“그만 일어나 봐도 되겠습니까?”
“무림학관에 올 테지?”
“……그 혹시 꼭 제가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입관패는 자네에게 준 것이니 어떻게 쓰든 자네 마음이지. 그것은 이미 그것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있으니.”
“알겠습니다. 무림학관엔 도전할 생각입니다.”
“만통부에 들어오기 위해선 무림학관을 이수하는 것이 유리하지.”
“네…… 뭐, 그렇죠.”
기재 중에 기재.
특히나 머리가 좋지 않으면 갈 수 없는 특급 직위가 만통부다.
하지만 정작 난 제일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자네가 무림학관을 이수한다면 만통부에 자리 하나를 만들어 놓도록 하지.”
“??”
제갈소명의 뜬금없는 개소리에 기함을 터트렸다.
만통부라니 무슨 소리인가 전생에서도 서류를 보느라 사제들과 함께 싸우지도 못했는데 이번 생에도 그 짓을 하라고?
죽어도 안 한다.
어차피 전쟁이 지속되면 나도 전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럴 바엔 미리부터 현장에서 경력을 쌓아 계급을 올리는 것이 나에게도 사제들에게도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도 좋을 것이다.
“아…… 전 만통부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갈소명이 처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무 때부터 생각한 건데. 자네 조금 미친 건가?”
아니 솔직히 말해서 사제들이 죽어가는데, 책상에 앉아 있겠다고 하는 놈이 더 미친놈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