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을 준비하는 이류무사(2)>
저벅저벅.
적막이 내려앉은 연무장 위로 한 사내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왕금산은 태을문의 사람들이 그토록 껄끄러워 하는 계연석 앞에서도 당당히 어깨를 편 채였다.
“계룡상단의 대사(大事)를 그릇쳤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오?”
왕금산의 말에 계연석이 이를 덜덜 떨었다.
“그, 그것이….”
하지만 계연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왕금산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계룡상단이 왕가장을 이리 무시 할 수 있었던 것이오?”
“아, 아닙니다! 무, 무시라니요!”
계연석이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내 오늘 은인들을 보러 이곳에 온 것인데, 그대가 추태를 부리는 광경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소.”
“네? 으, 은인이라니….”
왕금산은 대답 대신 계룡상단이 이끌고 온 무사들을 스윽 둘러 본 후 말했다.
“그만 돌아가시오. 더 기분이 안 좋아지기 전에.”
“…….”
갑작스런 왕금산의 등장에 혼이 나가버린 계연석은 ‘어버버버’를 외치다가 상단의 무사들을 끌고 돌아가 버렸다.
득의양양하던 계철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를 보다 아버지를 따라 계룡상단으로 돌아갔다.
얼떨결에 왕금산을 맞이한 홍문기는 어안이 벙벙한 참이었다.
“……소운이가 왕 장주님의 따님을…… 구했다고요?”
믿기지 않았던 홍문기가 두 번 물었고, 왕금산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홍문기도 왕소소 사건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안휘성, 아니 강동 전체의 상권을 틀어쥐고 있다시피한 황금왕 왕금산.
그의 금지옥엽 외동딸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은 속세의 일에서 좀 떨어져 있던 홍문기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니.
그런데 그 딸을 구한 게 소운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다짜고짜 대현전에 들어와서 차를 달라고 했던 때가 기억 났다.
설마 그때 구해줬다는. 아이가….
“제 아이인 것 같군요.”
“…….”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마을에 자리 잡지 못한 화전민이나 유목민들 사이에서 납치 사건이 많이 벌어진다.
그런 아이를 구한 줄로만 알았건만…….
“사실 그 점에선 좀 놀라긴 했습니다. 안휘성 일대에선 이 사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냥 아이를 왕부에 두고 가버렸더군요.”
“왕부에 그냥 두고 갔단 말입니까?”
이야기를 듣던 홍문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진소운이 왕소소의 이야기를 별것 아닌 듯 했던 것과, 왕부에 왕소소를 그냥 두고 갔다는 이야기가 서로 맞물려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랬군요.”
“뭔가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저 그 아이의 심경이 조금 이해됐을 뿐입니다.”
홍문기의 말에 왕금산이 작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마 소운이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요?”
“따님을 구한 것에 의미를 두어버리면, 가난한 집 아이의 납치 사건에 의미를 둘 수 없지 않게 됩니까.”
왕소소의 구출 행위에 대가를 받게 되면, 없는 집 자식의 구출 행위에도 대가를 바라게 될 것이다.
“태을문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왕금산도 조금 감명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 아이를 만나봐도 좋겠습니까?”
#
태을문은 왕금산이 가져온 선물들로 잔치가 열렸다.
각종 귀한 천이며 장식 등이 한가득 들어 있었고, 한편에는 미곡을 가득 실은 수레가 하나, 그 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가 실려있는 수레가 하나였다.
‘생각보다 통이 큰데.’
사문 내의 자금 걱정으로 미간이 펴질 줄 몰랐던 아버지의 입가가 씰룩씰룩 거리는 것만 봐도, 왕금산이 얼마나 많은 재화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장주님께서 잠시 뵐 수 있는지 여쭈셨습니다.”
행단의 내부에서도 꽤 직급이 되어 보이는 사람이 정중하게 나를 이끌었고, 나는 예의 남궁산이 기거했던 그 별채에서 왕금산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네.”
별채에 들어서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곳곳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은신술?’
내공이 일갑자에 이르면서 기감이 좋아진 탓인지 아니면 왕금산의 재력으로도 실력 좋은 호위를 구하지 못한 것인지 확연하게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난생처음 느껴보는 희미한 인기척에 천장 구석을 바라보고 있자, 왕금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느껴지나?”
“네? 무슨…….”
“방금 누가 있다는 걸 느낀 거 아닌가?”
“아…… 네.”
“허헛!”
왕금산의 너털웃음과 함께 인기척이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말일세. 납치범들은 저들을 피해 소소를 납치해 갔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시했다는 게 맞겠구만.”
무공은 기술을 갈음한다.
때론 한 가지 깊게 판 길이 곁가지를 수용한다는 강호의 격언이기도 했다.
남궁세가의 정예들이 호위를 위한 수련만 해온 이들을 무시하는 건 일도 아니었나 보다.
“저들을 무시할 정도의 고수들, 그 사람들 손에서 딸아이를 구한 약관도 안된 청년. 사실은 믿기 힘들지.”
왕금산은 여전히 나를 관찰하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투기도, 살기도 없었지만 축척된 삶의 경륜이 그에 못지않게 부담스레 덮쳐오고 있었다.
“더구나 우연히 구하고 가버렸다니. 그 사실조차 믿을 수 있어야지.”
어쩐지 그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행동이 되려 그에게 오해를 제공하고 있어 보였다.
“오해를 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오랜만에 아주 뿌듯한 감정이 들었네. ……물론 그게 어디까지나 오해였다면 그렇겠지.”
이제는 완연한 냉기를 품은 그의 말투.
아무래도 그는 이번 사태를 겪으며 뭔가 단단히 망가져 버린 것 같았다.
사실상 오해를 살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아니었으면 왕소소는 다시 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기에 내 말투도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자네에 대해서 면밀히 조사를 했네. 허나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그렇겠지. 이전 삶의 나는 너무나 명확하게 속이 들여다보이는 인간일 뿐이니까.
“그러니 내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네. 내가 저지르고 있는 이 무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겠네.”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을 과연 뭐로 치료할지 모르겠군요. 뭐가 제일 궁금하십니까?”
왕금산의 얼굴은 이미 흔들림 없었다.
“우선은 왜 함께 왕부에 오지 않았는지 알고 싶네.”
왕금산으로선 막대한 보상을 곧장 받지 않은 이유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우선은 일의 전말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왕금산의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제가 따님을 구했을 때가 납치범들을 쫓은 지 삼 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당시 따님은 무척이나 상태가 좋지 않았고, 살인멸구를 할 순간이었기에…… 알릴 생각도 못 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죠.”
“……크흠.”
아무리 간담이 대단한 자라도 자식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해있었다는 사실은 듣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로는 예상되는 막대한 보상 때문입니다.”
“보상 때문에 자신의 일임을 알리지 않았다?”
왕금산이 주는 막대한 보상이 가시적으론 좋아 보일 수 있다.
허나 그것을 당장 지킬 힘이 없다면 그것은 재앙이나 다름없다.
“셋째로는 제게 왕소소를 구한 일은 개인적인 다짐에 의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다짐이란게 뭐지?”
“불의를 보고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내게 불의를 끼친 사람을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지만.
어차피 내게 필요한 건 계룡상단을 떼어낼 수 있을 정도의 후원자였기에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굳이 왕소소를 택한 것은 어디까지나 남궁상원에 대한 개인적 원한에 연관된 일이었을뿐.
더구나 이제 와선 남궁산에게서 얻은 칠채보주까지 있다.
이젠 왕가장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오늘 가져와 주신 선물만으로도 제가 원하는 것 이상의 대가는 치르셨으니 더 이상 찾아오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불쾌했나?”
“선의의 행동이 의심으로 돌아온다면 어떤 이도 다음 선의의 행동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러고 싶지 않기에 장주님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평생을 이익을 위해 싸워온 사람이고 그 정점에 오른 사람이기에, 인간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부족할지는 잘 알고 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입장. 그로 인해 기분이 불쾌해진 건 어쨌든 내 입장 아니겠는가.
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털썩.
그의 행동에 내 입이 쩍 벌어졌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곧이어 천장에서 은신술을 하고 있던 이들마저 눈앞에 나타났다.
자신의 고용주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있는 와중에 그들이 계속 은신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하늘이 내려주신 은인을 몰라뵙고 의심을 먼저 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더불어 귀한 딸을 살려주신 은혜. 평생 뼈에 새기며 매일 아침마다 감사의 마음을 올리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호위들까지 일제히 큰 절을 올리는 통에 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상대가 누구인가 금으로 산을 쌓을 수 있으며, 천하의 사람들의 경세를 책임지는 거물 아닌가.
북경의 거물 귀족들도 어찌 함부로 할 수 없는 그가 무릎을 꿇고 큰절까지 하는 모습에, 난 얼른 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키려 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어찌 한낱 무사에게 절을 하신단 말입니까.”
“첫째로 저의 딸을 구하셨고, 둘째로 그로 인해 저를 구하셨습니다. 그 덕에 제 식구들이 구제를 받았고, 식구들의 가족들까지 구제를 받았습니다. 이러니 어찌 제가 절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옴짝달싹도 안 하는 이를 억지로 일으킬 수도 없고, 나는 결국 고개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으니 얼른 일어나십시오. 행여나 사람들이 볼까 두렵습니다.”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알겠으니 얼른 일어나십시오.”
일어나 자리에 앉은 왕금산의 얼굴엔 해맑은 미소가 어렸다.
상계 거물이라는 칭호가 그냥 붙은 것이 아니었다.
이 인간 아주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다.
“감사합니다.”
“이제 그런 존대도 그만하시지요. 진짜 자꾸 이러시면 나가겠습니다.”
“흠흠, 미안하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내 인식의 끝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이리 무례를 저질렀네. 다시 한번 사과하네.”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범접 못 할 것 같은 묘한 기세도 사라지고, 얼굴엔 피곤함과 편안함이 뒤섞여 괴리감을 자아내는 표정만 남아있었다.
그는 호위들에게 이야기했다.
“잠시 자리를 물러주게.”
“네.”
호위들은 눈앞에서 귀신같이 사라졌고, 천정이나 건물 안에서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나?”
“약 때문에 그러시겠죠?”
그가 굳이 이런 연극까지 해가며 내 속을 알아본 이유는 결국 그 약에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약이 없었다면 굳이 내 속을 알아볼 필요도 없었겠지. 내가 설사 납치극의 일당이었다 한들,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언젠간 그 속이 들통났을 테니까.
“호오, 영특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더니 사실이었군.”
“그냥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은 겁니다.”
“그…… 약은 대체 어찌 된 건가? 전임 의원들도 약의 정체를 모르네. 다만 약에 들어간 독초들 때문에 걱정을 하더군. 중독의 여지가 있다고 말이야. 헌데 소소가 죽어도 그 약을 먹겠다더군.”
소소와 헤어지기 전 매일 먹어야 하는 단약 조제법을 적어서 넘겨주었다.
하루 한 알 평생 먹기만 하면 태양지체 때문에 고생을 할 일은 없을 터이니 왕소소로선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독초가 들어있는 건 사실입니다. 중독의 여지도 생각해야 하고요.”
“……그럼 위험한 게 아닌가!”
“그걸 중화하기 위해 태을심법을 알려준 겁니다. 공릉이 더높은 심법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하여 그 당시엔 그것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그럼…… 평생 그 약만 먹고 심법만 익히면 된단 말인가?”
“물론 태을심법을 이미 익혔기 때문에 다른 심법은 익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따님께 허락을 득하였더라도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아니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닐세. 그 약만 먹는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단 말인가?”
약이 영약도 아닌데 내가 어찌 인간의 명을 안단 말인가.
“점쟁이도 아니고 ……인간의 천수를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왕금산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럼, 천수를 누릴 수 있다는 건가?”
“큰 병이나 사고가 없다면 그리하겠지요?”
“대체 그런 조제법을 자네가 어찌 알고 있는 건가?”
여기선 작은 각색이 필요했다.
무림맹의 만통부 기밀 문서였다는 것을 밝힐 순 없으니까.
“예전에 산속에서 독사에게 물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노인분께서 독초를 사용해 구해주셨습니다. 그 뒤 그 약초술이 하도 신묘하여 계속 끈질기게 따라 붙어 여러 가지 약 제조법을 익히게 된 겁니다.”
“독초로 독사의 독을 잡았다고?”
만초보록에 들어있는 이독제독 법의 일환에 이야기를 곁들어 들려주자, 왕금산은 한참이나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자네는 기연을 얻었군.”
“기연이요?”
“그래, 천하에 독을 독으로 제독하는 이는 예전 생사신의 선생밖에 없었네. 그분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아 진전이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인연이 있었군.”
딸이 병을 가지고 있던 탓에 왕금산 또한 의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탑재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야기는 술술 넘어갔다.
그러다 왕금산이 덥썩 손을 부여잡았다.
고개를 숙이는 왕금산.
“고맙네.”
“이제 한 번만 더 들으면 귀에 못이 박히겠습니다.”
내 손 위로 뜨끈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내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자네를 위한 기도를 올리겠네. 그리고 이 은혜를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네.”
손 위로 떨어지는 그의 눈물에 그에게 가졌던 억하심정은 이내 금방 풀려버렸다.
#
결국 왕소소가 태을문에 입문하기로 결정 났다.
왕소소에게 큰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조심스러울 텐데도, 왕소소의 주장이 너무 강하였고 어쩐지 왕금산도 별말 하지 않는 눈치였다.
대신 호위무사를 대동시켜도 되겠냐는 말을 조심히 전달했고, 계룡상단이 부생당에 교관으로 당주를 박은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심정으로 당주들 모두 동의했다.
나를 왕금산에게 안내했던 이는 나를 따로 불렀다.
자신을 왕가장의 총관이라 소개한 이는, 왕금산이 돌아간 후에 수레 하나에 가득 실려있던 의문의 상자를 별채에 모두 옮겨 놓은 상황이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장주님께서 공자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
이미 태을문에 가져온 선물들도 막대했고, 앞으로 후원금도 약속했는데 더 선물할 것이 있단 말인가?
총관은 첫 번째로 고태미가 흐르는 길다란 상자를 먼저 선보였다.
“장주님의 보고(寶庫)에서 가장 귀한 물건 중 하나입니다. 이름은 흑룡검이라고 하지요.”
상자 안에는 검신부터 검병까지 온통 묵색의 검이 놓여 있었다.
“허…….”
흠 없이 완벽한 검신과 두 마리의 용의 승천하듯 휘감은 검병은 무기라기보다 예술품에 가까웠다.
“검병과 검갑은 현철로 제련되어 있고 검신은 금강무괴철로 제련되어 그 어떤 신병이기와 부딪친다 해도 날이 상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장식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았기에 어찌 보면 수수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그 자체로 시선을 빨아들이는 마기를 품고 있었다.
내가 검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행수는 다음 상자를 열었다.
“이것은 천잠보의라는 왕가장 내에 대대로 내려오는 특수한 제조 과정을 걸친 의복입니다.”
처음 보는 모양의 착 달라붙는 보의는, 움직임이 자유로워야 하는 무림인들이 옷 안에 입기에 안성맞춤인 의복으로 보였다.
“천잠사와 금강사, 은사를 각기 꼬아 만들어 신축성이 있고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며 동시에 엄청난 방호력도 갖추고 있는 물건입니다. 일례로 무림맹에서도 몇 차례나 구매하고 싶어 했지만 수량이 많지 않아 팔지 않았던 물건입니다.”
설명을 하는 총관은 자신이 더 신난 듯 줄줄 이야기를 꺼냈다.
“이리 귀한 것이라면 장주님이나 소소 아가씨가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물론 두 분께선 이미 사용하고 계십니다. 만들기가 워낙 까다로운지라 왕가장 내에선 재료가 확보될 때마다 만들어 놓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일가족들이 모두 착용하고 한 벌 남는 것을 선물하시는 겁니다.”
총관이면 가문 내의 재산을 관리하는 중책과도 연관되어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이 기쁘다는 듯 설명하는 모습이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의아한 내 모습을 인식했는지 총관이 주름진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마 저희가 얼마나 감사하는 지 모르실 겁니다.”
“……아뇨, 충분히 알 거 같습니다.”
“사실 장주님께서 젊은 날에 부모님을 여의시고 부인분은 소소 아가씨를 낳다 돌아가셨습니다. 장주님께 가족은 소소 아가씨 한 분이시고, 그렇기에 더욱 애틋하신 것이지요.”
계룡상단의 주인인 계연석이 처와 첩을 합쳐 다섯이나 둔 것에 비하면 참으로 비교되는 모습이다.
“저희는 아가씨를 잃고 진짜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장주님께선 문파 세 곳을 동시에 청부 살인 하려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산을 정리하는 중이었고요. 그렇게 됐다면 아마 저희도 더 이상 왕가장에 남아있지 못했겠죠. 공자께선 수만 명의 사람을 살리신 겁니다.”
총관은 감사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라 하셨습니다. 장주님께 말씀드리기 힘드시다면 이 총관에게 말씀해 주십쇼.”
“하하…… 이거 참 너무 좋긴 한데 부담스럽군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 모두 구명지은을 받았다 생각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이 이상 하시면 제가 너무 부끄러우니 그만하시죠. 근데 이 나머지 것들은 뭡니까? 혹시 장주님의 보고를 다 털어온 겁니까?”
아직도 다섯 개의 상자들이 남아있었다.
“그건 아니고 아가씨께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필요가 없는 거라고요?”
첫 번째 상자를 여는 순간, 상자 안에서 얼음 창고에 들어온 듯 찬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그건 설리(雪鯉)의 내단이라고 하더군요.”
탁.
너무 놀라 상자를 닫아버렸다.
“그럼 이건?”
“설련실이라고 하더군요. 그걸 구하겠다고 도룡표국이 북해에서 고생 꽤나 했다고 들었습니다.”
상자 내부엔 연꽃의 열매가 푸른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평생을 얼음 창고 같은 곳에서 지냈다고 하더니, 이런 냉기를 뿜어내는 기물과 영약들로 만든 곳이었나 보다.
“그럼 이것들이 다?”
총관은 예의 왕금산의 그 미소처럼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예.”
부자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