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지배하는 이류무사>
태을문은 아침부터 낯선 이들의 방문에 소란스러웠다.
동일한 복장을 차려 입은 수십의 사람들은 태을문 경전 내를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커다란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삶은 냄새가 아이들을 절로 깨웠으며, 무거운 마음으로 문 내에 들어서던 외부의 제자들도 코를 찌르는 향긋한 고기 냄새에 어느새 근심은 지워진 표정으로 냄새의 근원을 찾았다.
“대체 뭐지?”
내 혼잣말에 옆에 섰던 왕소소가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시험 날에는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 한다면서 챙겨주신 것들이에요.”
“장주님께서?”
“네.”
“이거 너무 부담을 드리는 건 아닌가 싶은데.”
“호호, 소를 잡아 잔치를 열고 견성사자님들을 태을문의 이름으로 접대하겠다고 하신 걸 엄청나게 뜯어 말렸답니다.”
“……감사하다고 전해드리렴.”
“아버지께서 언제 한번 왕가장에 놀러 오시라 하셨어요. 개인적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으시다고.”
“조만간 가도록 하마.”
태을문의 모든 인사들이 식당에 모였다.
각자의 앞에는 단촐하지만 든든한 고깃국이 놓여 있었고, 아이들은 벌써부터 참기 힘든지 군침을 넘기며 문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훌륭한 식사를 준비해 주신 장주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먹자꾸나.”
“““감사합니다.”””
문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일제히 외쳤고, 왕소소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잠시 기다려도 계철영이처럼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본래는 한참 계철영의 잘난척을 들어 주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다들 식사를 안 하시나요?”
왕소소의 말에 다들 머뭇거리다 이내 수저를 뜨기 시작했다.
식당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하게 흘렀다.
식사를 마치고 다들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계룡상단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계연석과 계철영, 그리고 처음보는 삼 인의 특색 있는 사람이었는데.
학사풍의 사내 하나, 무사풍의 여인 하나, 그리고 그 중간에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년의 사내까지. 꼭 견성사자들의 구성과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흥! 어디 싸구려 고깃국이라도 먹었는지 장내의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구나.”
계연석이 코를 붙잡고 말하자 왕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요. 아버지께서 특별히 절강성의 특산물인 녹청돼지를 잡으셔서 비린맛은 나지 않았을 텐데요?”
녹청돼지란 절강성에서 나는 안길백차와 죽염청주를 먹여 기른 돼지를 이야기한다. 어쩐지 비린맛이 하나도 없이 진하게 국물이 우러난다 했다.
“…….”
결국 왕소소에게 암 말 못 한 계연석의 불똥이 나에게 튀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고깃국이 넘어가더냐?”
“싸구려 돼지 여러 마리를 먹은 것보단 역시 비싼 돼지 국을 먹는 게 부대끼지도 않고 괜찮군요.”
계연석이 항시 잔치를 열 때면 새끼를 실컷 낳다가 폐사시키는 돼지를 잔뜩 사온 것을 꼬집은 것이다.
“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철영이가 시험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절에 가서 치성이라도 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흥! 네놈은 아직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구나.”
“소문요?”
“저기 저 세 분 중 가운데 선 분이 그 유명한 일타강사 장사군 선생이시다.”
계연석의 손짓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도 장사군 일행을 향했다.
“저분께서 특별전형에 불합격시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시다. 네놈이 뭔 수를 쓰든 결국 태을문은 우리 철영이의 들러리에 불과할 것이다.”
계연석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벌써부터 풀이 죽은 듯 하나둘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 보니 정말 태을문과 인연을 끊으시려는 가 봅니다.”
“흥! 고깃국 한 그릇에 인연을 저버리는 자들과 더 이상 상종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
난 그의 말에 슬슬 살기를 흩뿌렸다.
“잘 생각하십시오. 허울뿐이긴 하지만 철영사형은 속가제자로 들어온 몸입니다. 마음대로 나가려 한다면 응당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살기에 노출된 계연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 일타강사 장사군이 나섰다.
“허허, 무공을 익힌 자가 일반인을 겁박하다니 참으로 못 배워 먹은 티가 나는구나. 태을문의 가르침이 그러하더냐?”
나는 지지 않고 말했다.
“군자가 배운 것을 돈과 바꿔 생활하니 군자가 아니라 상인이라 해야겠군요.”
장사군의 얼굴이 뜨끔해졌다. 허나 이내 금방 신색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공자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칠 때 곡기를 챙기기 위해 월사금을 받으셨다.”
“일타강사 선배께선 월사금으로 대저택 한 척을 받으신다지요?”
장사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명성만큼이나 그를 고용하는 것엔 막대한 돈이 드는 법이었다.
수요와 공급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져 묵인하에 이뤄지는 거래라 한들 군자를 사칭하는 장사군의 입장에선 자랑스러울 것이 없었다.
“네 녀석의 혀가 아주 사이하기 그지없구나. 실력 또한 그러한지 결과를 보면 알 일이지.”
그때, 강채석이 장내에 쩌렁하게 외쳤다.
“잡담은 그만하고 모두 모이거라! 견성사자께서 오셨다.”
이미 문주를 비롯한 장로들과 각당의 당주들이 모두 모여있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이 한곳에 모여들자 조그마한 행단이 천천히 들어섰다.
“무림맹이다.”
누군가 외치자 고개가 행단의 선두로 향했다.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무림맹기를 들고 자신들이 무림맹의 사자임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무림맹의 견성사자 이자곤이 인사드립니다.”
“인사드립니다.”
자신을 이자곤이라 밝힌 이가 문주인 홍문기에게 인사하자, 그를 따라 함께 왔던 사자들이 일제히 인사를 했다.
호위를 제외하고 사자들의 숫자는 총 열한 명.
이자곤을 제외한 문사풍의 인원들이 다섯, 무사풍의 인원이 다섯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이번에도 훌륭한 기재를 선발하여 주시길 바라겠소.”
“백팔봉의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무림맹으로서도 중차대한 일입니다. 시험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열 명의 사자들이 일제히 나뉘어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사들은 등에 메고 있던 나무로 만든 등짐을 풀고 그 안에서 빽빽하게 글자가 적힌 시험지들을 꺼내어 탁자 위에 쌓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시험이라는 것을 보는 사제들은 안색이 벌써부터 좋지 않았다.
계철영은 조그마한 종이로 엮은 손바닥만한 서책 같은 것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험이 무섭더냐?”
“……사형은 무섭지 않습니까?”
“네놈들이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두려운 것이다. 나처럼 제대로 준비를 했다면 무섭지 않지.”
계철영의 대화 상대는 금표, 은호, 동룡. 삼 형제 중 가장 어린 동룡이었다.
“혹시나 정이나 모르겠으면 내가 몇 가지 문제를 찝어주랴?”
“…….”
동룡은 계철영에게 분에 찬 듯한 표정을 보였고, 그 대화를 함께 듣고 있던 금표와 은호는 얼른 동룡이를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문사들이 첫 번째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무사들은 당주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기초 검법과 기초 심법에 대한 것만 보는 겁니까?”
강채석의 물음에 여 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팔봉의 무공시험은 늘 같습니다. 기초무공의 깊이와 활용도를 보는 것이죠. 무림학관에서 다른 무공들을 배우겠지만. 어찌 되었든 결국 뿌리를 얼마나 단단하게 이루었는가를 보는 것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기초무공과 기초심법에 대해선 저희 당주들이 봐야 할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채석의 말에 여 무사가 고개를 저었다.
“태을문의 무공에 대한 건 이미 무림맹에 자료로 다 파악하고 왔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 무사의 말에 강채석은 꽤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기초무공이라 하더라도 그 문파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보다 잘 알 수 없을 텐데.
자료만으로 모든 것을 파악했다면 이미 이 시험관으로 온 무사들의 실력이 자신들보다 훨씬 아득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으니까.
“끙…….”
강채석은 더 이상 말을 않고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이자곤은 시험관들의 준비를 살피다가 장내의 한 인물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상대방 또한 이자곤과 눈이 마주치자 목례를 하였다.
“선배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이자곤과 장사군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후배님, 잘 지내셨는가?”
“아무렴요. 선배님께서 철저하게 가르쳐 주신 덕분에 이렇게 견성사자 향주까지 맡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는 그리 될 줄 알았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이자곤과 장사군은 과거에 막역한 사이로 보였다.
“혹시, 이번 시험에서 가르침을 주신 학생이 있으신겁니까?”
“아차차, 내가 소개를 안 했군.”
장사군이 자신의 오른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태을문의 속가제가이자 계룡상단의 적자인 계철용이란 아이네. 안휘성 합비에 철검문의 쌍용말고도 대단한 잠룡이 있어 이렇게 오게 되었네.”
계철영이 어깨를 쫙피며 한 걸음 나아가 포권지례를 올렸다.
“계룡상단의 계철용이라 합니다.”
“아주 헌앙한 청년이군요. 선배님이 택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허허허, 자네 그동안 시험만 보았다더니 어째 말솜씨만 더 좋아진겐가?”
“글쎄요. 사실 선배님께서 가르치신 아이들은 모두 무림학관에 가지 않았습니까. 저희로서야 옥석을 좀 더 쉽게 가릴 수 있으니 편하다고 봐야죠.”
“껄껄걸. 그래그래. 알겠네. 바쁘지 않으면 시험이 모두 끝난 후에 술 한잔하세나.”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아이들의 거리와 두 사람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속속 다 들렸다.
이야기를 듣던 왕소소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당장 아버님께 말씀드려 이의 제기를 하겠어요.”
왕소소의 심정이 우리 모두의 심정과 같았다.
허나 난 왕소소를 말렸다.
“아직 시험에 특혜를 주거나 한 것이 아니니 앉아있거라.”
“오라버니, 시험관과 수험생이 친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공정한 거예요.”
그때 사련이 끼어들었다.
“사형.”
“네?”
“오라버니가 아닌 사형이라 칭해야지?”
“아…… 죄송해요. 아무튼 사저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죠?”
“응. 하지만 대사형에게 생각이 있을 거야. 그렇죠?”
사련은 이제 와서 ‘없는데’라고 이야기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둘 다 내가 준 서책은 공부했지?”
“열심히 봤는데…….”
“네. 다 외웠어요.”
사련은 자신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고, 소소는 자신만만해했다.
“다 외웠다고? 양이 적지 않았는데?”
“매일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책 읽는 것밖에 없었거든요. 그 정도는 다 외울 수 있죠.”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아이들도 다르지 않겠지?”
“소소 사매가 이해를 못 하는 아이들을 개인 지도해 줬어요.”
“호오. 그럼 됐다.”
내 자신만만한 모습에도 사련과 소소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험이 시작될 겁니다. 수험생은 착석해 주십시오.”
제자들이 각자 거리를 벌린 채 오와 열을 맞춰 작은 돗자리 위에 자리하자, 문사들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시험지를 뒤집어 놓아 주었다.
“시험 시간은 총 한 시진입니다. 수험생 여러분께선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만에 하나 남의 답안지를 몰래 보거나 베껴 쓸 경우 탈락이니 이 점 명심하십시오. 시작합니다.”
문사가 작은 징을 뎅 하고 치자, 일제히 제자들이 시험지를 뒤집기 시작했다.
계철영은 벌써부터 자신만만한 듯 시험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반면에 제자들은 여전히 풀 죽은 모습으로 물끄러미 시험지를 바라보며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먹이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눈치채라!’
일각이 흐르자 계철영의 눈동자에도 당혹이 어리기 시작했다. 뭔가 예상치 못했던 문제를 만난 것이다.
그런 반면에 풀 죽어 있던 제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답지를 쓰기 시작했다.
“뭐지?”
연무장 아래에서 장사곤이 이상함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태을문의 모든 제자들이 쉬지 않고 답지를 쓰는 모습을 본 것이다.
계철영은 그제야 자신만이 문제가 막혀있음을 알게 되었다.
“허…….”
다른 제자들의 모습에 작게 탄식을 하자, 문사 하나가 다가와 나직이 속삭였다.
“수험자, 탈락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시험에 집중하시오.”
“아…… 네네.”
계철영은 다시금 고개를 박았지만 여전히 시험에 집중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