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9화 (29/357)

#29. <전설을 찾는 이류무사>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전의 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평소 듣지 못했던 저 멀리의 새소리와 바람이 가로지르는 이파리 소리가 마치 옆에서 들리는 듯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뜬 순간.

고개를 뻣뻣하게 들어야 꼭대기가 보일 정도로 높은 절벽이 모래성으로 쌓인 듯 작게 보였다.

쿠릉쿠릉

삼백육십오 개의 혈도가 일제히 공명하며 양팔에선 벼락이 친 듯 묵직한 기가 발광하기 시작했고.

“광천신장!”

콰콰콰쾅!!

손안에서 뻗어나간 광천신장이 거대한 절벽에 집채만 한 구멍을 만들어 냈다.

“후우.”

단전이 텅 비어버린 탄력감을 느낀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취가 높지 않으면 실전에선 쓸모가 없겠구나.”

희대의 장법을 익혔지만 소모한 내공의 양이 너무 막대 하다.

무려 일 갑자.

그 파괴력만큼은 내공의 값을 하지만, 실전에서 이런 것을 썼다간 장법을 피한 상대가 단박에 목을 잘라낼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성취가 높을수록 강한 파괴력을 내는 것과 달리, 광천신장은 성취가 낮을수록 파괴력이 강했다.

그러니 적당한 내공을 분배하여 광천신장을 쓰고 싶다면 광천신장의 성취를 높여야 했고, 광천신장의 성취를 높이려면 광천신장을 써야 하고…….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처연한 내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개미 오줌같이 약한 검법이랑, 장강같이 거대한 장법이라니. 이게 무슨 무사람. 차라리 도박사라 소개하는 것이 낫겠네.”

자조적인 투덜거림과 함께 품 안에서 목함을 꺼내 들었다.

평소 자주 다니는 화운산이 아닌 제법 위치가 떨어진 돌산까지 와서 장법을 시험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천묘신의의 단약이 특별전형 시험 2등의 상품인 걸 후에 알게 되면 다들 정신이 아득해지겠지.”

특별전형 시험의 2등 상품은 무림맹 의원각에서 만든 정심단이란 단약이었다.

3등 상품이 무림맹 병기창에서 만든 정도검이란 의아함을 가질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건 지금 사람들이 약의 진정한 효능을 몰라서 그렇다.

정심단은 차후 천묘신의가 자신만의 조제법으로 만든 단환이었는데, 이 단환 안에는 무려 단전을 단단하게 해주는 영험한 효능이 있었다.

문제는 이걸 만든 사람도, 먹는 사람도 이 약의 효능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 약의 숨겨진 효능은 한 번에 걸쳐 단전이 깨지지 않도록 방비해 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철영이처럼 주화입마에 걸리거나 내상을 입은 후에나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에 이 정심단의 효능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물론 약의 조제를 담당했던 천묘신의도 알지 못했던 비의.

더구나 효능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제조하는 데 들어가는 가격이 너무 비싸, 이번에만 만들어지고 다음 회차부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결국 이번 특별전형 시험에서 2등 한 놈들만 노나는 거지.”

나는 정심단을 입 안에 넣고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이 약은 특히 나처럼 영약으로 인해 단전이 급성장한 이들에게 더욱 효능이 좋다.

말랑해진 단전을 단단하게 감싸주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운기행공을 시작하자, 텅 비었던 단전에서 조그만 기운이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한 줌의 기운은 몸 구석구석을 다니며 조금씩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인 기운은 한 마리의 생명체처럼 팔맥을 두드리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삼백육십오 개의 혈도가 일제히 공명하며 십이경락을 타고 기경팔맥을 거친다.

그렇게 온몸의 일주를 모두 마친 기운은 단전을 이 할 정도 채우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상태로 운기행공을 몇 번 더 해야 단전을 채울 수 있었겠지만, 나는 주변에 느껴지는 기감에 운기행공을 멈추었다.

“왔으면 왔다고 말하지 않고.”

눈앞에는 검을 패용한 사련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허허, 대사형을 보는 눈빛에 역심이 가득한 걸 보니 네가 곤장을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럼 곤장을 때리시지 뭐 한다고 여기까지 도망쳐 오셨어요?”

“으흠. 누가 도망을 쳤다고.”

“날마다 죽치는 화운산이 아닌 석주산엔 왜 오신건데요?”

“커허험. 이놈. 말을 가려 하거라. 그래도 내가 대사형이…….”

“됐고! 왜 그랬어요?”

“뭐가 말이냐.”

“왜 비무에서 포기를 했냐고요.”

세 번째 시험에선 결국 사련이 1등을 했다. 점수가 조금 모자랐지만, 결승까지 올라간 내가 2등.

대진표가 좋았던 동룡이 3등.

제 몸에 맞지도 않은 정도검을 받은 동룡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고, 1등이 된 사련도 마찬가지였다.

“포기를 하다니. 엄연히 패배한 것이지.”

“그게 패배라고요? 검에 매가리도 없이 몇 수만에 검을 떨군게?”

“너도 보지 않았더냐? 사력을 다해 계 사형과 결전을 벌이느라 내공을 다 소진해 버린 탓이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대진운도 실력이다. 결국 사련이 네가…….”

“아아악! 그만! 그만 해요! 됐고. 난 가서 무림학관에 가지 않겠다 말씀드리겠어요. 그러니 사형이 가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전생의 일까지 생각하면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계철영을 막는 것이다. 난 사련에게 본래 자신이 가졌어야 할 것을 되돌려 줬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더구나 내 계획대로라면 정마대전에서 태을문의 제자들을 지키자면 최소 3에서 5명의 인원이 무림학관에 들어가야 했다.

근데 이건 사실상 말이 안 된다고도 보는 게, 백팔봉의 상위 문파에서도 전력을 다해야 겨우 5명의 인재를 무림학관에 넣을 수 있다.

사련이 무림학관 정시를 치를 게 아니라면 지금 한 명이라도 보내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홍사련. 거기 서라.”

내 낮은 목소리에 사련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시험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바. 그것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문주님이라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네가 가지 않는다면 태을문에선 아무도 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 같은 행동은 그만두어라!”

사련의 심정은 아나, 미래를 아는 나는 이런 식으로밖에 사련을 이해시킬 수밖에 없었다.

내 일갈에 사련이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부생당을 이수한 제자들이 쾌화당을 이수한 후엔 어찌 되느냐?”

“……?”

“모두 무림맹에 의무복무를 하러 가지 않더냐.”

“……네.”

사련은 평소 쓰지도 않던 존대를 갑자기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림맹에 간 제자들이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할 것 같으냐?”

“…….”

사련이 아직 겪어보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알 리 없었다.

가끔 당주 대의 일들을 이야기하지만 고생의 단편만을 이야기 해줄 뿐.

그들 또한 무림맹에서 그다지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제들이 무림맹의 생활에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안다. 허나 꿈과 현실은 철저하게 다를 것이다.”

“그게 무슨…….”

“태을문은 무림맹에서 노예처럼 굴려지게 될 것이다.”

“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아니 그들까지 갈 필요도 없겠지. 백팔봉의 상위 문파들은 하위 문파를 인간 이하로 대접한다. 그런 그들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으리라 보느냐?”

이 점은 문주님을 비롯한 당주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였다. 그래서 전생엔 문 내의 어른들은 돈과 무림학관이란 무기를 가진 계철영을 대사형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런 전생은 내가 모두 없애 버렸다.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는다. 우린 우리 스스로 도와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선 무림학관의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간부로서 들어가야 10명을 지휘하는 부대주의 직위를 가질 수 있지. 넌 하급 무사 직위로 태을문을 무시하는 이들을 견뎌낼 수 있겠느냐?”

무림맹도 결국은 상명하복의 체제를 가지고 있다.

위에서 끌어주는 이가 없다면 결국 최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더더욱 사형이 갔어야 하는 거잖아요!”

사련은 이 상황이 두려우면서도 주먹을 꽉 쥐고 견디며 말을 했다.

“나 또한 갈 것이다.”

“네?”

“정시를 통해. 무림학관에 갈 거다.”

“사형…….”

“그러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제 정신이에요?”

사련은 마치 용을 봤다 이야기 하는 사람 보듯 못 믿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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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그냥 가서 이야기해 보자고요. 혹시 알아요. 바꿔줄지.”

“그렇잖아요. 1등 먹은 사람이 인정한다는데. 이해해 주지 않겠어요.”

사련은 끈질겼다. 설득을 하기도 하고.

“어? 자꾸 이럴 거야? 그럼 나 무림학관 안 가! 진짜 안 가요! 나 안 간다면 안 간다는 사람이야!”

협박을 하기도 했으며.

“사형, 사실 전 불치의 병이…….”

“그러니 죽어가는 사매의 소원으로…….”

애원을 하기도 했다.

“안 돼! 안 바꿔줘. 돌아가! 안 바꿔 줄 거야!”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우리가 투닥거리며 태을문에 들어서려는 순간.

태을문에서 계연석이 나오고 있었다.

핏발이 잔뜩 선 퀭한 눈동자.

며칠이나 감지 않은 듯 떡이 되어버린 머리.

그나마 씻지도 않았는지 온몸에선 주취가 풍기고, 고왔던 비단옷엔 주름이 잔뜩 지어있었다.

나오던 와중 나를 발견한 계연석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지더니, 이내 독기를 가득 품고 나를 노려보았다.

“네놈 때문이다. 모두 네놈.”

난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금지약을 써 놓고 누구 탓을 합니까? 내가 그런 약을 쓰라고 떠밀었습니까?”

“……크흑.”

“더구나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했다면서요?”

이자곤은 돌아가는 길 계철영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집에 들렀다고 한다.

계룡상단은 금지약을 쓴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막아섰지만, 무림맹의 견성사자와 견성무사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그렇게 금지약인 폭혈단을 복용한 것이 확인되었고 계룡상단은 이번 일로 인해 물적 피해와 오명을 모두 뒤집어 썼다.

“내가 당하고만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자꾸 자기 잘못을 두고 누구 탓을 합니까? 진짜 제대로 시시비비를 가려보고 싶으신 겁니까?”

그때, 사련이 나의 소매를 끌었다.

“그만 들어가요. 사형.”

사련 또한 계철영의 단전이 최종적으로 깨졌다는 소식을 들은 탓이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단전이 다시는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니, 계연석 또한 막 나가는 심정이 되버린 걸 사련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게 애초에 심성을 곱게 쓰지 그랬습니까. 그랬다면 이리 오지도 않았겠죠.”

나는 그 말을 한마디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연석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남아 원한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태을문 장내는 시끌벅적했다.

부생당도 이수했고, 견성사자의 시험도 모두 마친 아이들은 마치 자유라도 된 듯 삼삼오오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데? 왜 당주님은 아무도 안 보이시는 거지?”

기이하게도 장내엔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동룡이 나에게 다가왔다.

“대사형. 지금 대현전에 드시랍니다.”

“무슨 일 때문이지?”

“모르겠습니다. 긴급히 당주 회의가 열린 듯합니다.”

당주회의라 함은 문파를 이끌어가는 당주급과 문주, 일부 장로들이 참석하는 엄숙한 회의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가 긴급하게 열린 것도 신기한데, 그런 당주 회의에 나더러 참석하라니?

난 의문을 접어두고 대현전으로 향했다.

“제자 진소운. 들었습니다.”

내가 포권지례를 올리자 홍문주가 손을 까닥하는 걸로 인사는 생략했다.

긴 탁상의 맨끝 빈자리에 조용히 가 앉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의라 하였는데,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 뿐 아무도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홍문주 앞에는 기이한 종이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당최 이 일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동안 내왔던 후원금을 돌려달라니요.”

“그렇고 말고요. 세상의 어떤 문파가 자신들이 받은 후원금을 돌려주는 경우가 있답니까.”

“이는 우리 태을문이 만만하니 그런 것입니다. 당초 계철영의 주화입마도 그들이 자초한 일 아니었습니까?”

당주들과 장로들이 침을 튀겨가며 하는 이야기를 듣자 하니, 계연석이 자신의 아들이 그리된 것을 빌미로 그동안 냈던 후원금을 돌려달라한 모양이었다.

‘참, 가지가지 하네.’

속으로 욕을 하는 한편, 어쩌면 쉽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무문에는 시주를 하고, 도가무문은 시주와 도장비, 제사 등을 해주고 돈을 받는다.

태을문도 어찌 보면 도가무문에 속하긴 했지만, 종교의 색깔이 진하지 않고 뜻만 받드는 것이기에 제사나 굿은 하지 않아왔다.

결국 계연석이 후원금으로 낸 돈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빌린 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애당초 계룡상단이 이런 때를 대비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외당의 당주답게 아버지는 사태의 문제를 단박에 꿰뚫었다.

허나 문제를 꿰뚫었다 뿐이지 해결책은 없는 상황.

“이 금액을 모두 변상하자면 어찌해야 하나?”

“문주님!”

“안 됩니다! 문주님!”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세상 어느 문파가 후원금으로 들어온 돈을 돌려준답니까?”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문에 후원금을 내고 돌려달라 하는 간 큰 이는 없다.

애당초 안 주었으면 모를까 주고 빼앗는 것은 상대를 능멸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기에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었다.

더구나 상대를 기만하는 행위를 좋게 보는 사람들이 없기에 풍문에도 좋지 않았다.

‘계룡상단주가 구석에 몰렸군.’

특히나 상인인 계룡상단은 이번 일로 인해 타격이 클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강행하는 것은 그가 품은 원한이 그리 큰 탓이리라.

“상단주가 관청에 고발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네. 이것에 대해 대책이 있는가?”

관청까지 끌어들이겠다는 이야기는 계연석도 자신의 상태를 살피지 않겠다는 이야기와 다름없었다. 사방으로 이야기가 공표될 터이니 상단의 신뢰도는 더더욱 떨어지겠지.

이는 계연석이 무인들이나 쓸 법한 동귀어진을 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휴.”

“크흠.”

“참.”

관청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계룡상단과 달리 관과 끈이 없는 태을문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더구나 후원금을 돌려주라는 결과까지 나와버린다면 결과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외당주. 우리가 가진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

“……가산을 모두 팔면 간신히 맞을 겁니다.”

그나마 몇 개 안 되는 돈 나오는 구멍인 객점과 여관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잠시 뜸을 들인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 좀 그렇습니다만, 왕가장의 도움을 좀 받는 것이 어떨는지요?”

“왕가장?”

“네. 일전에 왕가장주가 이런 일을 예상했던지. 태을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 자신을 찾아오라 했었습니다. 상황이 여의찮다면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그런 말을 했다고?”

“허.”

아버지의 말에 당주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문주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우리 태을문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 많은 돈을 대가 없이 준다는 건 사리에 맞지도 않고 상인이 그러한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네만.”

“네…… 그것이…….”

잠시 주저하던 아버지가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 나는 왜?

“대제자인 진소운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네에?”

당주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고 나는 놀람의 탄식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혹시나 상재의 뜻이 있다면 상인 일을 가르쳐 보고 싶다고…….”

갑자기 난 사문의 빚 대신에 팔려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안 될 말이네. 태을문의 대제자가 상인의 일을 한다니!”

홍문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주들은 아닌 걸 알면서도 뭔가 아쉬운 한숨을 내뱉었고, 특히나 쾌화당의 강채석 당주가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인간이!

“차라리 사문의 재산을 다 파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네.”

“…네. 그렇지요.”

아버지도 뭔가 아쉬운 듯 요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 해도, 왕가장에 돈을 빌려보는 것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저희가 당장 후원금을 모두 갚을 여력은 없으니 몇 년에 걸쳐서 갚는 걸 전제로 말이지요.”

“흐음.”

결국 이 또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당주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그저 식은 차만을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크흠, 우리 대제자의 의견을 들어보는 건 어떻게 습니까?”

그때 갑자기 강채석이 내 이름을 꺼내었다.

당연하게도 당주 회의에서 발언권이 없는 나는 누군가 발언권을 주기 전엔 말을 할 수 없었다.

“소운이 말인가?”

“네. 이래 봬도 대제자 아닙니까. 뭔가 우리 당주들이 생각 못 할 만한 그런 영특한 생각을 해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평소 상재에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르고요.”

이 양반이! 지금 후원금에 나를 팔아넘기려 들어?

내가 강채석을 노려보자 강채석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거, 그리고 소운이가 왕가장을 물려받게 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닙니까?”

대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실컷 꿀물을 마신 강채석의 말에 나를 비롯한 모든 이의 표정이 어안이 벙벙했다.

“왜 이러십니까? 소소 그 아이가 소운이와 잘되면 왕가장과 태을문이 서로 남이 아니지 않습니까?”

왕가장의 왕금산이 제 몸보다 귀하게 여기는 외동딸을 삼류문파 태을문의 이류 무사에게 시집 보낸다고? 강채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근데 우스운 것은 다른 당주들 중에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만.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네. 난 소운이에게 상재를 가르칠 생각이 전혀 없으니.”

홍문기가 단박에 장내를 정리했다.

“너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봐도 좋다.”

홍문기가 뭔가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제자가 뭘 알아서 할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내 말에 당주들을 비롯해 홍문기도 뭔가 실망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도 상관없으시다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

“사실 제가 천지사방으로 돌아다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떤 산에서 광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광부?”

“네. 그 광부가 말하길 왜 이런 곳에 광산이 생기지 않는지 의문이라고 하더군요.”

문주를 비롯해 당주들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광부의 말이 화운산 뒤쪽에 위치한 석주산이란 산에 질 좋은 철광석이 잔뜩 쌓여있다고 합니다.”

“철광석?”

철은 광석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광물이다.

특히나 무림문파는 철이 곧 병장기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거대 문파들은 자신들의 자산 중에 광산을 꼭 포함하곤 한다.

질문은 문주 대신 아버지가 했다.

“석주산은 나무도 자라지 않는 그냥 돌산 아니더냐.”

석주산은 주인이 없는 돌산이다.

토양이 척박하여 나무가 자라지 않는 잡풀 가득한 쓸모없는 산이었기에, 누구도 그곳에서 뭔가를 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격도 말도 안 되게 저렴했는데, 쓸모없는 산을 가지고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사려 하지 않았다.

“그 광부 말이, 석주산을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금방 철을 캘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태을문에서 석주산을 구매하고 왕가장에 돈을 빌려 광산을 개발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하면 차근차근 계룡상단의 빚도 청산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이야기를 했지만 다들 별반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좋은 광산이 있었다면 진즉에 누군가 차지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고, 광부가 알아볼 정도였다면 관까지 나설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로선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이 년 뒤엔 이 일대에 엄청난 폭우가 내리며 석주산에 엄청난 산사태가 일어난다.

그와 동시에 석주산의 흙들이 쓸려 내려가고 그 안에서 대단위 철광석 광산이 발견되기 때문이었다.

석주산의 소유주였던 관청은 갑자기 생겨난 광산에 떼부자가 되고, 아버지는 그 산을 샀어야 한다면서 무려 1년 내내 술주정을 하곤 했었다.

“네가 만난 그 광부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겠지. 허나 그의 말만 믿고 투자를 하기엔 지금 위험도가 너무 크구나.”

문주님도 내 말이 허무맹랑하다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구태여 그것에 책을 잡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실 거 같아 제가 지난 몇 주간 석주산의 땅을 좀 파보았습니다.”

“엥?”

“뭐?”

“뭐라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품속에서 참외만 한 돌멩이 하나를 내려놓았다.

진한 흑색에 연한 은빛이 도는 철광석이었다.

이는 오전에 광천신장을 수련할 겸 파본 산 구덩이에서 하나를 집어 온 것이었다.

“이걸 발견한 지는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대장장이에게 확인을 받아야 했던지라 지금 말씀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내 다음 말이 예상되었던지 당주들의 입과 눈동자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장장이 말이 뛰어난 품질의 철광석이라고 하더군요.”

그 점잖은 홍문기도 입과 눈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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