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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4화 (34/357)

#34. <전설을 찾는 이류무사(6)>

각자 준비를 마치고 다시 만난 건 3일 뒤였다.

미타성수가 있는 동굴의 입구는 마령고원의 계곡 사이에 흐르는 강 속에 존재했다.

강의 물살이 워낙 강한 탓에 수공을 익힌 자도 접근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억지로 접근하다 동굴에 들어서기도 전에 물살에 휩쓸려 동정호까지 떠내려갈 수 있었기에,지도를 열심히 팔아먹은 하오문이 정해진 날짜에 상류의 물길을 바꿔 주기로 했다.

약속 날짜가 되자 악양은 사람들로 인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언제부터 시작이죠?”

“인시(寅時)부터 상류의 물살을 막겠다고 했습니다.”

남궁선화의 물음에 정보를 확인해 온 무사가 답했고.

그녀는 우리에게 다시 말을 전했다.

“묘시부터 움직이기로 하죠.”

“조금 천천히 움직이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말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인원이라곤 달랑 나 하나밖에 오지 않은 주제에 나서는 것이 꼴을 보기 싫은 탓도 있겠지만, 아직 나에게 억하심정이 많이 남아있는 철검문의 무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왜 그러시죠?”

“계곡이 넓다곤 하나 이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들어가려고 하면 분명 초장부터 큰 싸움이 벌어질 겁니다.”

무림맹의 만통부에 올라왔던 보고서에는 대략 만 명의 사람이 동시에 좁은 강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초반부터 난전이 벌어졌다고 했다.

검진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탓에 다수의 무리도 큰 사상자를 냈고, 강호의 이름 날리던 고수들도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어차피 동굴 안의 길은 누가 먼저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 정도로 넓고 복잡합니다. 먼저 들어가고 말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남궁선화도 내 이야기를 이해한 듯 보였지만 실제로 생각과 행동은 크게 다른 법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먼저 들어가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드네요.”

“…알겠습니다.”

난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이 무리의 대표는 남궁선화나 마찬가지인 상황. 무리하게 상대를 설득하려 하는 것보단 내가 할 일을 하는 쪽이 더 나을 터였다.

“여기, 하나씩 가지고 계십시오.”

난 남궁선화와 성모란, 유지량에게 각각 내가 만든 족자를 하나씩 넘겨주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놀랍군요.”

족자를 펼쳐본 유지량이 기함했다.

“저희 걸 하나씩 준비한 건가요?”

“안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최소한 자기 일행과 흩어지지만 않는다면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겁니다.”

남궁선화와 성모란은 자신의 무사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무사들도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람들이 정말 많네요.”

아직 새벽 해가 뜨지도 않았지만 마령고원으로 향하는 인파가 거리에 가득했다.

“더구나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흑도 무리도 보이고요. 저들 광마오견 맞죠?”

성모란은 주위를 둘러보며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미타성수의 효능 때문에 그럴 겁니다.”

“네? 미타성수의 효능이 흑도에게 좋은가요?”

“같은 효과라도 흑도들에겐 다릅니다. 백도문파의 제자가 한 줄기의 내공심법을 익힌 덕분에 단전이 정순하고 체내의 거름이 없는 반면, 흑도들이 익히는 내공심법 대부분이 근본이 없고 내공의 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고수가 될수록 진기가 닳고 신체가 오염되는 경우가 많죠. 그런 이들이 미타성수로 탈태를 한번 겪을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오…….”

“……!”

대답하는 성모란뿐만 아니라 남궁선화도 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진 공자는 왜 그렇게 현청 대협을 싫어하는 건가요?”

현청은 용소아의 도명이었다.

“싫어하지 않습니다만…….”

“거짓말 말아요. 현청 대협 보는 시선이 우리 오라버니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살기를 품고 있던데.”

시선을 슬쩍 돌리니 철검문의 무사들이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성모란을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포기한 채 말을 이었다.

“대책 없이 자신만 따르면 살 수 있다고 말하기에 싫었던 겁니다.”

“근데 현청 대협은 그럴 만하잖아요.”

“물론 무공 실력으로만 따지면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 안에선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알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분명 유리한 점은 있죠.”

“네. 그렇지만 자신이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다는 태도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정말…… 다른 이에게 굽히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하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녜요. 앞이 소란스럽네요.”

바닥이 질퍽한 길을 지나 물이 발목까지 차는 길에 들어섰다.

마령고원의 계곡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앞쪽의 인원이 꽉 막혀 이동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반면에 거리를 두고 있던 뒤편의 인원들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왜 이리 좁지.”

성모란이 불평하는 사이, 남궁선화는 이상함을 느끼고 무사들에게 경계를 명했다.

“전투 준비하세요.”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하나둘 검을 뽑자 뒤편에서 다가오는 인원들의 걸음이 조금 느려지긴 했지만, 강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인원들의 밀림에 자신들의 의지와 다르게 점점 붙기 시작했다.

“성 소저, 무사들과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앞쪽에서 비명이 들립니다.”

“??”

성모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발목을 흐르던 물에 붉은 물감이 섞이기 시작했다.

“!!”

성모란이 뭐라 이야기하기도 전에 남궁선화도 남궁세가의 무사들 사이로 들어섰다.

유지량과 모산파의 술사들은 이미 남궁세가 무사들의 무리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크아악!

크악!

멀리서부터 들리던 비명이 이제 제법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강물에 물감을 푼 듯 희미했던 혈흔은 점점 많아져 피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전투는 계속 커지기만 했다.

전투를 바라보던 제삼자의 일행이 뒤에 밀려드는 인원에 밀려 대신 검을 맞고, 검을 맞은 자의 일행은 또다시 전투에 끼어든다.

적·아의 구분이 없는 난전이 시작된 것이다.

흑도 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탓에 전투는 중간에 멈출 생각도 없이 들불처럼 번졌고, 어느새 남궁세가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퍼져왔다.

“대연 검진을 펼쳐라!”

무사가 외치자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최소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뒤를 꽉 막고 있는 인원들 때문에 검진은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너무 좁습니다!”

“선화 아가씨를 최우선으로 지켜라!”

“존명!”

어느새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전투에 억지로 참여했고, 뒤이어 철검문의 무사들도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양옆의 절벽은 삼십 장 높이의 상단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였기에 피할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이대론 안 돼.’

난 재빨리 비룡조를 뽑아 절벽의 벽면에 꽂아 넣었다.

마치 거미가 자신이 뽑아낸 실을 타고 절벽을 날아오르듯 절벽 위로 뛰어 올랐다.

“난리도 아니군.”

강로를 따라 상류에는 이미 수십의 사람이 죽고 그들의 시체를 밟고 새로운 사람들이 전투에 끼어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피해도 미약하지 않을 상황.

일단은 이 무의미한 전투를 피할 필요가 있었다.

“단단하긴 하지만 일 감자의 내공이라면.”

비룡조가 단단하게 박혀있는 것을 확인하고 공력을 끌어올려 오른손을 단단하게 보호했다.

그리곤 태을문의 권법인 대양권으로 벽면을 때리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단단하게 꿈쩍 않고 있던 절벽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은 무인들의 얼굴이 대번 핼쑥해졌다.

“저, 저놈 저거 뭐 하는 거야!”

퍽! 퍼퍽!

구멍이 뚫리자 구멍에서 떨어져 나온 흙과 돌덩이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피, 피해!”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만해!”

밑에선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벽면을 두드렸고, 어느 정도 크기가 확보된 이후에 유지량을 비롯한 모산파의 사람들을 향해 비룡조를 쏘았다.

“줄을 잡으세요.”

남궁세가의 무사들 사이에서 얼떨떨해 있는 모산파의 술사들이 줄을 잡고 내공을 회수함과 동시에 줄을 끌어당겼다.

동시에 바닥을 박찬 세 사람이 가볍게 끌어 올라 절벽의 중간에 안착했다.

“잠시 여기 계십쇼.”

“…….”

막 전투를 겪은 유지량은 잠시 넋이 나가 있는 모습.

난 재빨리 바로 옆에 벽면에 붙어 다시 벽을 뚫기 시작했고, 크기가 어느 정도 확보되자마자 철검문의 무사 중 부상당한 두 사람과 그 사람을 지키던 한 사람을 끌어 올렸다.

“다른 사람이 올 수 있게 벽을 파십시오.”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공은 국 끓여 먹을 겁니까?”

다시 다른 벽을 뚫고 이번엔 남궁세가의 무사 중 모산파의 술사들을 보호하다 다친 사람과 멀쩡한 사람을 끌어 올렸다.

“…….”

그쯤 되자 내 의도를 파악한 건지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말없이 벽면을 파기 시작했고, 전투를 준비하던 이들 중에 조공에 조예가 깊은 자들이 벽을 타고 올라 나처럼 굴을 파기 시작했다.

덕분에 떨어지는 돌들을 피해 전투가 잠시 소강되긴 했지만, 여전한 싸움의 불길은 계속 사방으로 퍼져갔다.

마지막으로 철검문의 무사들을 끌어 올린 후, 무사들은 아래에서 벌어지는 난전에 정신을 놓은 상황이었다.

사방에서 적아를 구분 안 하고 사람들이 칼부림을 부리고 있었다.

저 아래의 일이 자신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 무사들의 얼굴엔 핏기가 가셨다.

“진 공자의 말대로 나중에 올 걸 그랬나 봐요.”

남궁선화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죄책감을 표했다.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빠지면 그때 들어가도록 할까요?”

하마터면 남궁세가의 무사뿐만 아니라 철검문의 무사들까지 모두 위험에 빠뜨릴 뻔한 남궁선화는 더 이상 자신의 결정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싸움이 시작된 이상 이건 한참을 갈 겁니다. 하나둘 절벽 위로 오르는 사람들도 많아질 거고요.”

“그럼 어떻게 하죠?”

“이대로 입구까지 가는 겁니다.”

“……어떻게요? 우리에겐 그런 기물이 없어요.”

“혹시 조법을 익히신 분 없습니까?”

내가 철검문과 남궁세가의 무사들에게 묻자 서로 눈치를 보던 무사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철검문의 무사로 내가 성모란과 붙어있을 때마다 죽일 듯 나를 노려보던 이였다.

“제가 인연이 닿아 파혼조법을 익힌 적이 있습니다.”

나를 향했던 살기는 어느샌가 사라진 그가 상관에게 보고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럼 제가 작은 틈을 만들어 주면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밟고 잡을 만한 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길을 만들겠습니다. 여력이 되는 무사님들은 모산파의 술사님들을 하나씩 엎고 이분이 만든 홈을 따라 입구까지 가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성모란과 남궁선화에게까지, 확답받자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모산파의 술사를 하나둘 업기 시작했고, 나머지 무사들은 만약에 대비해 밑에서 올라오는 기습에 방비하기로 하였다.

“시작합니다.”

핑.

비룡조를 쏘아 반대편 절벽을 향해 날아간 후. 대양권으로 벽 일부를 부숴 틈을 만들었다.

그러곤 다시 반대편 절벽을 향해 비룡조를 쏘아 날아간다.

파혼조법을 익힌 철검문의 무사는 내가 만든 틈을 이용해 벽에 매달린 채로 다음 사람이 디딜 수 있을 만한 홈을 만들었다. 그가 가볍게 이야기한 것과 달리, 그의 손이 벽을 팔 때마다 내가 부술 때와 다르게 단단한 바위가 진흙으로 바뀐 듯 쉽게 쉽게 파였다.

그렇게 우리가 절벽 사이를 날아 입구까지 가기 시작하자, 우리의 뒤를 따르는 이들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진 공자! 뒤쪽에 사람들이 따라붙었어요.”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저들이 공격하면 저들도 더 이상 갈 수 없을 테니까.”

입구로 한참 가까이 다가갈 때쯤.

성모란이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그곳엔 용소아를 비롯한 하민중 일행이 시산혈해의 사이에서 필사의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용소아와 무당의 도사들이 제법 여유로운 반면, 하민중과 그의 일행들에선 어느 정도 희생자가 나온 듯 보였다.

“곧 입구에 다다릅니다. 집중하세요.”

계곡 상부의 입구 근처는 오히려 한산한 분위기였다.

죽을 사람을 대부분 죽었고, 산 사람들은 모두 동굴 안으로 들어간 터였다.

바닥에 내려선 나는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들을 피해 소천검법을 휘둘렀다.

“크아악!”

“컥!”

피 분수가 흩뿌려지며 계곡에는 이제 물 대신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내 뒤를 이어 바닥에 내려선 철검문의 무사들은 득달같이 달려가 입구를 막고 선 이들을 모조리 베었고, 우리는 다른 이들이 방해하기 전에 급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도, 갑작스레 드러선 우리를 향해 검을 날리는 이들을 피해 몇 개의 갈림길을 지나 인적이 없는 곳에 다다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헉헉헉!”

“헉! 허억!”

정신없이 숨을 돌리던 이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아무런 피해 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상자가 없다니 다행이군요.”

“……하아.”

“……허어.”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물론이고 철검문의 무사들도 오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진 공자 덕분이에요. 진 공자 아니었으면 벌써 몇 사람은 죽었을 텐데.”

“논공행상은 나중에 하도록 하죠. 지금은 언제 흥분한 무인들이 들이닥쳐 혈투를 벌일지 모르니.”

“하지만 급하게 들어오는 바람에 지도를 확인할 새가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

내가 그리 말했음에도 남궁선화는 발걸음을 떼지 않은 채 멀거니 나를 바라봤다.

“진 공자, 길을 부탁해도 될까요?”

남궁선화의 말에 남궁세가의 무사들과 철검문의 무사들이 반대할 거라며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주위를 둘러보니 성모란을 비롯한 철검문과 남궁세가의 무사들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부탁드릴게요.”

그제야 철검문과 남궁세가의 무사들의 얼굴에 작은 안도감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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